•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박사모 김천시지부 스크랩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 : 조계종의 역사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푸른늑대. 추천 0 조회 56 11.09.26 2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 : 조계종의 역사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길 희 성*

 

머리말

 

필자는 “한국불교사 연구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글에서 한국불교사 연구 90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한국불교의 전체적 이해를 위해 더 연구되고 정리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 셋을 언급한 바 있다.1) 첫째는 한국불교의 전체적 성격을 통불교(通佛敎)로 보고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논하는 문제였고, 둘째는 한국불교의 종파사가 아직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어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 조계종(曹溪宗)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셋째로는 한국불교의 국가불교적 성격에 관한 문제, 즉 한국불교사에서 불교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여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셋은 별개의 문제 같지만 실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는 결국 한국불교 전체의 정체성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국가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결국 호국적(護國的)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특성을 추상적으로 논하거나 이념적 동기에서 논하지 않고 한국불교사 전체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현재 한국불교의 실제 모습에 대한 연구에 근거하여 논한다면, 우리는 한국불교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먼저 고찰해야만 한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며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의 성립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전개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한국불교의 종파사 전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조계종의 이념적 정체성 문제, 즉 누구를 종조(宗祖)로 하며 어떠한 사상을 종지(宗旨)로 삼을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도 단순히 어떤 학자나 영향력 있는 불교 지도자의 개인적인 이념적 동기나 성향에 따라 주장되기보다는 위와 같은 역사적 고찰을 근거로 하여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오늘의 조계종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재 한국불교 전체를 대표하다시피 되었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어떤 의미로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고찰한 후에 그 이념적 지향성을 정하거나 논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탐구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조계종의 이념적 정체성,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불교 전체의 이념적 정체성을 의미 있게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한국불교 정체성에 대한 주장이나 조계종의 성격과 정체성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은 이러한 객관적인 역사적 고찰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학자들의 개인적인 이념적 성향이나 혹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현실과는 다르게 조계종의 정체성이 규정되기도 하였으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게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논해지기도 하여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학계의 정설은 서 있지 않은 형편이다.

한 종파의 정체성은 물론 단순히 역사적 문제만은 아니고 이념적 문제이기도 하다. 한 종파가 표방하는 이념적 정체성은 그 종파의 역사적 현실과 현재의 모습보다는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나 이념에 근거하여 논하거나 규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과 현실을 무시하고 이념적 정체성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현실성을 결여한 공허하고 허황된 주장에 빠지기 쉽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논의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한국불교가 걸어 온 발자취와 그 현재의 모습에 부합하는 선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즉 그 특성과 정신, 그 성격과 이념 등을 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관점에 서서 한국불교와 조계종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전개되어 온 과거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평가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 그 담론이 형성되게 된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고 난 후, 역사적 관점에서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들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 한국불교의 정체성 담론

 

한국 학자들에 의한 한국 연구의 성격을 특징짓는 단 하나의 특징을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민족주의적 담론을 꼽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 어문, 종교 및 철학, 예술, 민속 등 그 어느 분야의 연구이든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채색되지 않은 분야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근대적 의미에서의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민족문화 전통의 자주성과 특성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면서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학자들의 제국주의적 성향에 맞서는 한국 학자들의 대항적 담론은 자연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치, 군사적 실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한인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적어도 학문의 세계에서만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일제와 더불어 시작된 한인 학자들의 한국 연구는 일종의 ‘독립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해도 크게 빗나간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적 담론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 강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민족주의 사관 내지 담론이 물론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바로잡아 민족의 정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민족주의적 담론이 식민주의적 담론 못지 않게 또 하나의 왜곡과 과장을 낳으며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저해하고 있지나 않은 지 냉정하게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광복 50년을 지나 새로운 세기와 천년기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아직도 그러한 민족주의적 담론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장애를 일으키고 있다면, 이는 오직 진실만을 추구해야 하는 학문적 사명에 배치될 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진정한 발전도 가로막는 일이 될 것이다. 민족주의는 강한 정서적 애착과 정열을 수반하여 실상을 왜곡하기 쉽고 자기 문화에 대한 근거 없는 자화자찬 내지 과장으로 이끌기 쉽다. 학문에 있어서 이른바 과학적 객관성과 실증성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도 문제이지만,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는 공정성과 비판적 능력의 결핍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정당화되기 어려운 치명적인 결함이다. 학문 세계에서 민족주의란 아무리 약자의 것이라 해도 자칫하면 진실을 은폐하는 허구적 담론을 낳기 쉬우며, 열등감에 근거한 약자의 자기 기만 혹은 한풀이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최근 우리 학계에 <한국학>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 편으로는 한국인이 자기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서 마치 남의 것을 대하듯, 그리고 연구자 자신은 마치 한국인이 아니라는 듯이 자신을 대상화하여 거리를 두는 태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이 학문적 주체성을 포기하고 외국 학자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에 스스로를 내맡긴다는 비판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학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입장에 서면 한국학이라는 말보다는 국학, 한국사보다는 국사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모든 한국문화에 대한 서술에서 일인칭 복수인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우리 나라, 우리 문화, 우리 사회 등), ‘우리’ 대신 ‘한국’이라는 지칭어를 사용하는 것을 꺼려한다. 필자 자신도 바로 이 글을 쓰면서도 그러한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현상이 한국인들(우리들!)이 스스로를 냉정하게 객관화하지 못하는 지적 폐쇄성과 미성숙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단호하게 배척되고 극복되어야 할 현상이다. 외국 대학에서 한국에 관한 연구를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논문들이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건만 대체로 불신을 받거나 소홀히 취급된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비판정신 내지 학문적 공정성의 결여이며, 이러한 단점의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국학 연구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정서 내지 시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한국학은 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 적어도 하나의 변증법적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학만이 편견 없이 공정하고 국학은 모두 국수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학적 시각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성숙한 자세에 도움이 된다면, 세계화 시대의 국학은 마땅히 그것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국학>이라는 말도 일본에서 유래된 말이며, 일제의 유산 가운데 하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적 담론은 한국불교의 연구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학자들에 의한 한국불교사 연구에는 민족주의적 혹은 ‘애국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불교가 한국 민족의 삶과 문화 속에 오랜 세월 동안 자리잡아 왔다는 점, 한국불교가 적어도 일면으로는 분명히 호국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조 500년 동안 억압 속에서 지내온 불교계의 반작용 등이 이러한 애국적 담론을 창출하는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정서는 인식의 장애로 작용할 위험성이 높다. 한국불교 사상에 대한 명석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는 박종홍󰡔韓國思想史: 佛敎思想 篇󰡕(1972)은 명저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험성에 쉽게 노출되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고구려 승 승랑(僧郞, 5세기 후반-6세기 초 활동), 원측(圓測, 613-696), 원효(元曉, 617-686), 의천(義天, 1055-1101), 지눌(知訥, 1158-1210)의 불교사상을 다루면서 박종홍은 이들 사상가들의 뛰어남과 그 명석한 두뇌에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땅에 묻힌 승랑과 원측을 과연 한국불교의 사상적 전통 속에 포함시켜야 할 지의 문제는 그의 책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그들이 단지 한국 땅에서 출생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의 사상가가 되기에 족한 것이다. 또한 원효나 지눌의 사상적 업적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천의 불교사적 의의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과연 그들의 사상이 박종홍이 찬탄하고 있는 것만큼 위대하고 독창적인 것인지 한번쯤은 심각하게 의심해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낌새조차 그의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물론 원효의 경우, 그 사상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 중국의 그 어느 불교사상가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겠지만, 최남선, 조명기, 박종홍 등을 필두로 하여 이기영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숭배’에 가까울 정도의 원효 찬양은 학문적 평가라기보다는 다분히 민족적 자긍심에 호소하는 감정적 평가가 아닌지 냉정히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국불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담론의 원인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불교가 한국 문화에 끼친 지대한 영향과 찬란한 업적은 누구도 부인 못 할 객관적 사실이며, 불교와 한국 역사는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거의 운명적으로 하나였다 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에, 한국불교에 대한 담론은 자연히 애국적 담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 호국불교적 전통이 가미되면 더욱더 그러한 경향이 심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아마도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불교 신자들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거리를 둔 비판적 시각보다는 아무래도 심취적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기 쉽다. 더군다나 조선조의 불교 억압에 대한 반동, 그리고 기독교와 같은 ‘외래’ 종교의 번성에서 오는 위기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한 연구를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성격, 다른 한편으로는 호교론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호교론적 담론은 특히 한국불교 전체의 성격과 특성을 논하는 문제에 오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한국불교 전체를 두고서 그 성격과 특성을 논하는 정체성의 담론은 특수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다. 불교는 4세기 말경 삼국 정립기에 이 땅에 들어와서 1600여 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개되었으나, 한국의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나 사상가들 혹은 학자들이 한국불교를 인도나 중국의 불교와 차별화 시켜 그 특성을 의식하거나 논했던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인도는 언제나 한국 불자들의 가슴속에는 불법(佛法)의 남상(濫觴)으로 의식되어 왔으며, 중국은 서역의 경전들을 한역한 후, 그 경전들을 주석과 함께 한국 땅에 전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고승들을 배출한 곳, 그리고 각종 학파 내지 종파들의 발원지로 의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불자들이 한국불교를 독자적인 역사적 흐름 내지 전통으로 의식하고 그 성격과 특성을 논하거나 규명하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도와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었으며, 한 특정한 국가나 지역적 안목에서 이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교와 같이 한 국가나 지역, 사회나 문화권마저 초월하여 전파되는 보편주의적 종교에 있어서 지역적, 국가적 의식이 대두된 것은 역시 근대적 국가의식 내지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현상이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민족의식은 다분히 일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의 변두리 국가로만 의식했던 일본의 침략은 한국 지성인들에게 세계를 향해 눈을 뜨게 했으며, 타 국가들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의식하는 뚜렷한 국가의식 내지 민족의식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정체성의 문제를 대두시켰으며, 불교의 경우에도 <한국> 불교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무엇이 과연 한국 불교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낳게 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의 탐구와 그 담론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 시각에서 한국불교 전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한국불교사 연구는 일제시대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도 일본 학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한국불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일본 학자 타카하시 토루(高橋亨)는 “조선불교의 역사적 의타성”이라는 논문2)을 쓸 정도로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그의 󰡔李朝佛敎󰡕(1929)에서는 “조선불교가 전체적으로 중국불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조선유학과 중국유학의 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다”라고까지 평하고 있다.3) 또 일본 학자로서는 최초로 한국불교의 통사인 󰡔朝鮮禪敎史󰡕(1930)를 저술한 누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도 “조선의 불교는 중국불교의 연장으로서 선종(禪宗) 같은 것도 중국선종의 직수입에 불과하다”4)고 말하면서 한국불교의 독창성과 창조성을 부정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독창성 내지 독자성을 부정하는 이와 같은 견해들이 초기에 한국불교를 연구했던 대표적인 일본 학자들에 의해 표명되자, 한국 불자나 불교학자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직접 거론하여 반박하는 논문은 아니라 하여도, 적어도 한국불교의 독자적 정체성을 민족적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밝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난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위에 언급한 누카리야의 책과 같은 해인 1930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논문이다.

최남선은 “朝鮮佛敎: 동방문화사 상에 있는 그 위치”라는 논문,5) 특히 제 4장 “元曉, 通佛敎의 建設者”에서 인도불교가 ‘序論的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가 ‘各論的 불교’라면 한국불교는 ‘結論的 불교’로서 이론과 실행을 고루 갖추고 종파를 초월한 ‘通佛敎, 全佛敎, 綜合佛敎, 統一佛敎’라고 주장하면서 원효를 ‘불교의 완성자’로 찬양하고 있다. 최남선의 이러한 견해는 그 후 한국불교 연구가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면서 한국불교에 대한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한국불교의 특성을 통불교로 규정 짓는 것은 타당한 견해일까? 나는 이 문제와 그리고 한국불교의 특성을 밝히는 다른 견해들에 대하여는 이 글에 이은 후속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우선 다음과 같은 선행하는 문제들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한국불교라는 장구한 역사와 다양한 얼굴을 가진 역사적 실체에 대하여 어떤 고유한 특성을 찾고 논하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그것은 하나의 본질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아니면, 모든 역사가 특수한 역사이듯이 한국불교가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자명한 일이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최근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의 불교학 교수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Jr.)의 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한국불교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으려는 종래 한국 불교학자들의 노력이 시대착오적임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불자들이 <한국>이라는 국가 내지 지역적 특수성을 의식하는 불교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조 말기 내지 일제시대부터였으며, 그 이전에는 자신들이 한국 승려라는 지역적 출신은 의식했지만, 불법의 보편성에 따른 범불교적 의식이 더 강했고, 불교의 지역적 특성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은 희박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란 따라서 근대의 민족국가적 시각을 그 이전으로 투사하는 하나의 ‘상상’(imagining)의 산물이라는 것이다.6) 물론 이러한 관점이 그로 하여금 현재 한국불교의 특성이나 정체성을 부인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시각을 아무런 반성 없이 과거로 투사한 한국불교에 대한 민족주의적 담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가령, 그는 신라 출신 승려지만 순전히 중국에서 활동하다 중국에서 입적한 원측과 같은 인물을 한국의 불교인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화된 스님들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해도, 그들을 한국 불교승려(Korean Buddhists)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이들 스님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지녔던 생각들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약간 변형해서 사용하자면, ‘요즈음 역사에 대한 축소된 상상력’(shrunken imaginings of recent history)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넓었다. 근세 이전 한국 승려들은 모르긴 하지만 자신들을 ‘한국’ 승려로서보다는 어떤 수계(受戒)의 계보나 문중, 혹은 어떤 학파나 수행 전통에 속하는 자로서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을 가리키고자 했다면, 그것은 ‘한국 승려’보다는 6세기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여러 고승전들에서 발견되는 승려들의 분류법에 따라서 역경(譯經), 의해(義解), 습선(習禪), 명률(明律), 호법(護法) 등으로 지칭했을 것이다. 이러한 범주들은 국가와 문화간의 경계선들을 넘어 선 것이었으며(고승전에는 ‘한국 승려,’ ‘일본 승려’라는 범주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고승전들은 그와 같은 범주들 밑에 한국, 인도, 중앙 아시아, 일본, 그리고 거란의 승려들을 집어넣은 것이다. 따라서 고승전들은 어떤 스님을 ‘신라승’ 혹은 ‘해동의 현자’라고 언급하기는 해도 ― 실제로 고승전에 나오는 표현들임 ― 그들은 주로 호법, 의해 등으로 분류되며 동시에 아무개의 제자, 스승 혹은 누구를 소개해 준 자로 나오는 것이다.7)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불교’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에 대한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확실한 대답은 한국불교를 한국 땅에서 전개된 불교역사 전체를 일컫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역사적 총체를 관통하는 어떤 <한국적> 특징이 있는 지 없는 지, 있다면 무엇인 지 등의 문제는 차후에 따져볼 문제고, 일단 한국불교를 우리는 한국에서 전개된 불교의 역사적 총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하나의 민족국가로서의 현재 한국의 역사를 시간적으로 언제까지 소급해야 할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 지역을 어디까지 잡을 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의 역사를 조선조, 고려조, 그리고 통일신라까지 소급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신라와 백제를 한국불교의 범위에 넣는 것도 문제가 없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 그 영토가 통일신라기에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그래도 고구려가 통일신라의 일부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옛 발해나 만주 지역을 제외한 고구려 불교 역시 한국불교사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이라는 말을 규정한다면, 한국이라는 지역 밖에서 전개된 불교 역사는 당연히 한국불교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영토 밖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지 않고 입적한 고구려 출신 승랑이나 신라 출신 원측의 경우 한국불교사의 범위 내에 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근대 이전의 한국 승려들이나 불교 사상가들에게 민족국가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해도, 현재 우리들의 관점에서, 특히 세계의 타 지역 불교사를 의식하며 비교하는 관점에서 한국 땅에서 전개된 불교사를 고찰해 볼 때,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한국불교의 전반적 특징을 논하는 일은 가능하며 의미 있는 일이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포괄적으로 일반화시킬만한 한국적 특징이 한국불교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의 탐구는 어디까지나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불교의 구체적 모습과 상황을 무시하고 과거 어느 시대의 한국불교를 이상화하거나 어느 한 사상가의 불교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불교 전체의 특성을 논하는 일은 하나의 이념적 논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역사적 실상은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개는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진행되지만 역사의 이해는 오히려 현재로부터 과거로 향한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를 더듬는다. 물론 우리는 이와 동시에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반성하고 과거를 더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자로서의 주체적 결단 내지는 이념적 선택의 문제이지 역사적, 학문적 탐구의 대상은 아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서 역사적 탐구와 이념적 논의는 일단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하며, 이러한 구별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의 특성을 통불교로 규정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 지 혹은 이념적 지향성에 따른 것인 지가 불분명하고,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나 종지(宗旨) 문제를 둘러싼 논의도 역사적 논의와 이념적 논의를 구별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문화나 역사, 종교와 예술 등 인간현상을 탐구하는 일에 있어서 역사적 논의와 이념적 논의가 현실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한 관심은 현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못지 않게 미래를 꿈꾸면서 현재를 개혁하고자 하는 실천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기도 한다. 역사적 인식에 있어서는 이념적 당위성이 때로는 현재의 인식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과거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탐구에서 학문의 순수한 객관성을 주장하는 소박한 실증주의를 옹호할 의도는 없다. 다만 지향해야 할 미래를 논하는 일과 이념적 선택도 책임 있는 것이 되려면 현재와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현재 한국불교의 실상을 도외시하고 학자들이 미래적 당위성이나 이념적 신념에 입각하여 과거를 이상화하거나 치우친 이해를 묵인한다면, 이는 결코 한국불교의 앞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이념적 관심보다는 역사적 탐구의 입장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탐구의 범위를 좁혀서 한국불교의 현재를 대표하고 있는 조계종의 역사적 이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어서 한국불교사의 총체적 인식에 근거하여 한국불교의 특성과 정체성의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 두 개의 조계종: 조계종의 역사

 

조계종의 기원과 역사적 전개, 종조와 종지를 둘러싸고 학계에는 많은 이견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단지 조계종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관련된 주요 논문들은 ‘불교학회’의 이름으로 편집된 󰡔韓國曹溪宗의 成立史的 硏究 ― 曹溪宗 法統問題 中心󰡕(民族社, 1986)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후 여기에 전개된 논의를 뛰어넘는 연구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나는 편의상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저자들의 다른 저술들을 참고하면서 조계종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책 서문은 지금까지 조계종의 정체성에 대하여 제기된 문제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曹溪宗이란 말할 것도 없이 고려시대에 성립된 종파이다. 대부분의 모든 종파가 중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한국불교의 諸宗派도 中國宗名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曹溪宗만은 이 땅에서 성립된 高麗特有의 宗派로서 고려시대에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주류를 이루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핵심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조계종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성립,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많은 논란이 있으며, 그 논란은 아직도 학계의 공통된 견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의 諸說을 검토하면, 曹溪宗 宗祖와 法統問題(普照와 太古), 조계종의 성립시기와 宗名淵源의 문제, 한국불교의 臨濟, 太古 法統說 문제, 이상의 몇 가지 문제로 집약된다고 하겠다.8)

조계종의 역사는 그 종조나 종지를 둘러싼 문제에 비하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명확히 규명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이다. 물론 두 가지 문제가 얽혀 있어서 엄격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는 역사적으로 구명될 문제임에 반하여 조계종의 종조를 누구로 할 것이며 종지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 지는 다분히 이념적 성격을 띤 문제므로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쉽지 않다.

조계종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인식되어야 할 점은 조계종에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조계종과 1941년에 형성된 조계종, 즉 두 개의 조계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양자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며, 따라서 많은 혼란을 야기 시킨다. 특히 조계종의 종조, 법통, 종지 등을 둘러싼 논의가 많은 혼선을 빚고 ‘과열’되는 것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양자의 연속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현 조계종이 선()불교를 표방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당연히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전통의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가 전혀 다른 역사적 실체임 또한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 고려 시대의 조계종은 세종 6년 종파들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되면서 독자적 종단으로서는 사라졌고, 그 후 한국불교는 종명조차 부지 못 할 정도로 쇠퇴하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정체성이 제약되던 상황하에서도 부흥의 기운이 돌면서 1941년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표방하게 되었으니, 양자 사이에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이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연속성을 가정한 논의는 결코 책임 있는 학문적 논의는 되지 못한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엿보여, 고려에 성립된 조계종과 현재 한국불교를 이끌고 있는 종단으로서의 조계종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현 조계종의 역사적 자기 이해를 반영할지언정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일단 불연속성을 전제로 하여 두 조계종의 성립 과정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후에 다시 연속성의 관점에서 양자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현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1. 고려시대의 조계종

 고려 조계종의 연원을 둘러싼 논쟁에 불씨를 제공한 사람은 한국불교 연구의 개척자 이능화(李能和). 그는 󰡔朝鮮佛敎通史󰡕 여러 곳에서 조계종이 보조국사 지눌(1158-1210)과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下篇, 普照始設曹溪宗이라는 제목 아래 그는 지눌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하여 희종(熙宗, 1204-11)이 그 이름을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로 개명함에 따라 조계종(曹溪宗)이 창시되었으며, 그 후 조계산에는 대를 이어 조계종사(曹溪宗師)들이 출현하였으며 태고보우,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76),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92), 구곡각운(龜谷覺雲, 14세기 활동),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 등 고려말 조선초 굴지의 선사들이 모두 조계종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9) 五敎兩宗祈禱平賊이라는 제목 아래 말하기를, 오교양종이라는 표현은 고려 원종(元宗, 1259-74) 대에 처음 등장하며, 그 시기는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지눌의 조계종 창시 이후라고 한다. 그리고 오교는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천태종을 가리키며, 양종은 라말여초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가리키는 선적종(禪寂宗)과 지눌 이후의 새로운 선종인 조계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0)

한편 또 다른 곳에서 이능화는 선종의 유파(流派)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의 선종은 먼저 파옌원이(法眼文益, 885-958)와 융밍옌쇼우(永明延壽, 904-975)의 종지를 따르는 선적종(禪寂宗)이었으나 지눌이 조계종의 개조(開祖)가 된 후, 그의 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禪門拈頌󰡕 30권을, 그리고 그의 제자 각운(覺雲) 선사가 󰡔拈頌說話󰡕를 지어 조선 선가에서 받드는 규얼(圭臬, 준거)이 되었다; 그 후로도 이 종파는 쇠하지 않고 번창하여 드디어 선종의 총명사(總名詞)가 되었다; 비록 다른 종파의 선승이라 할지라도 조계종사(曹溪宗師)라는 빛나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으며 조계종은 실로 해동에서 창시된 가장 특색 있는 종파다. 이능화는 나아가서 고려말 경의 선종에는 조계파와 임제파의 2파가 있었는 데, 임제파는 조계종의 이름에 의탁하여 있었으며, 조계종은 임제파를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임제파는 곧 중국 임제종의 쉬우(石屋, 1272-1352)와 핑샨(平山, 1279-1361)으로부터 각기 법을 전수 받은 태고와 나옹으로서, 나옹의 법맥은 무학과 득통(得通, 1376-1433)으로 이어지다가 두절된 반면, 태고의 법맥은 환암혼수, 구곡각운, 벽계정심(碧溪正心, 15세기 활동),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 그리고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로 이어졌다고 말한다.11)

이상과 같은 이능화의 견해는 비록 상세한 고증 없이 불과 몇 쪽 안 되는 지면에 쓰여져 있지만, 한국불교의 종파사에 대한 그의 견해와 지눌에서 휴정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불교의 전승을 보는 그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후학들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준 견해이기도 하다. 이제 이 견해를 중심으로 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 ― 지눌의 조계종 창시설,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정체성 문제, 고려말 조계종의 계보 문제 ― 을 살펴보자.

 

1) 지눌의 조계종 창시설

첫째로 문제가 된 것은 지눌이 조계종을 창시했다는 견해로서, 이것은 김영수, 권상로, 김영태 등에 의해 부정되었다.12) 이들은 조계종이라는 말이 한 종파의 이름으로서 지눌 이전에도 분명히 사용되고 있었다는 문헌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대다수 학자들은 지눌 창시설을 수용하지 않는 편이다. 김영태는 “高麗의 曹溪宗名考”에서 고려시대 ‘조계’라는 말의 용례를 고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조계’가 육조 혜능 대사 혹은 선불교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고려의 종파명으로서 조계종을 지칭한 틀림없는 예는 나의 판단으로는 단 하나뿐이다. , 그것은 명종 2(1172)에 세워진 高麗國曹溪宗堀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으로서, 이 비는 지눌의 수선사 개창(1205) 이전에 세워진 것이다.13) 따라서, 지눌의 조계종 창시를 고수하고 있는 쪽에서는 이 비문이 언급하고 있는 조계종은 지눌에 의해 창시된 조계종과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비의 주인공인 대감국사 탄연(坦然, 1070-1159)은 린지(臨濟, ?-867) 7대손이었던 중국 송()나라의 징인따오전(淨因道臻)으로부터 법을 받고 돌아와서 임제(臨濟) 선풍을 선양하고자 했던 혜소국사(慧炤國師)의 제자로서, 그의 문중에서 그의 시호가 육조 후이넝(慧能, 638-713)의 시호인 대감(大鑑)과 같음을 계기로 하여 해동 조계종 창설 운동을 벌였으나 국가의 공인을 얻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사후 15년이 지난 명종 2, 즉 무신의 난을 틈타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비를 세웠지만 결국 그 후에도 공인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조계종이라는 말이 일시적으로 그의 비문에 사용되기는 했으나 이는 지눌이 창시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은 조계종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이다.1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지눌이 조계종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눌을 이어 수선사 주지가 된 국사들의 비명 대다수가 그들을 조계종이라는 말 대신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社) 제 몇 세, 혹은 단순히 조계산 제 몇 세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또 최선(崔詵)이 쓴 修禪社重創記(1207)도 조계종이라는 말 대신 大乘禪宗曹溪山修禪寺重創記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들은 조계종이라는 말이 의천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필경 의천 이후 어느 때부터인가 구산선문들이 천태종을 의식하면서 자기들의 단합된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큼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이 명칭이 지눌 이후에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을 거쳐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지눌이 창건한 수선사가 고려 불교계를 주도하면서 조계종이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려말선초에는 모든 선사들이 조계종을 자신의 종명으로 채택하기에 이른 것은 확실하다.

 

2) 오교양종의 정체성 문제

이와 관련하여 이능화의 설에 의해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오교양종의 정체성 문제다. 이능화와는 달리 김영수는 양종이 선적종과 조계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태종과 조계종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수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천태종은 법계(法系)도 선종의 것을 따르는 등 선종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15) 따라서 오교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견해를 달리한다. 오교의 정체성을 푸는 열쇠로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전거는 大覺國師墓誌銘(숙종6, 1101)에 나오는 “현재 불교를 공부하는 자들로서는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원융종, 선적종이 있다. 국사는 6종을 꼭 같이 지극하게 연구했다”16)라는 말이다. 이능화와 김영수 등은 여기에 거론되는 ‘종’을 모두 당시 존재했던 종파로 간주하여 이능화는 오교를 계율종, 법상종, 법성종, 원융종, 천태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김영수는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김영수는 묘지명에 따라 천태종 대신 열반종을 오교에 포함시키고 천태종은 양종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과연 묘지명에 언급된 것들이 당시의 종파명인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學佛>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이들이 종파명이기 보다는 당시 공부하던 교학사상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며, <>이라는 말도 반드시 종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영태는 “五敎九山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위의 6종을 ‘學宗’, 즉 여섯 전공분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것을 종파명으로 간주하여 종파들의 존재를 신라시대까지 소급시키는 김영수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17) 김영태는 나아가서 󰡔韓國佛敎史槪說󰡕(1986)의 부록 한국종파사 이해에서 한국에서 종파가 성립된 것은 고려조에 들어와서부터며, 그것도 실제로 확실한 종명을 가지고 교단적 종파가 성립된 것은 고려말 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좀 지나친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는 몰라도 적어도 고려조에서는 일찍부터 교단적 의미의 종파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우선 김영태 자신도 천태종과 조계종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천의 천태종 창립 이전에 화엄종(華嚴宗)이나 자은종(慈恩宗)이 종파로서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이유로 굳이 천태종을 새로운 종파로 창립했겠는가? 사실, 금석문(金石文)을 통해 교단적 의미의 종파들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찰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종파의 이름으로서, ‘大華嚴’이나 ‘大慈恩’과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그 절이 내세우는 이념이나 학종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그 절이 소속된 종파명으로 간주해야 옳을 것이다.18) 예를 들어, 고려 현종 12(1021)에 건립된 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이 그러하고,19) 인종 3(1125)에 의천이 출가했던 절인 영통사(靈通寺)에 세워진 그의 비명 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贈諡大覺國師碑銘이 그러하다.20)

허흥식김영태와 마찬가지로 김영수의 오교양종설을 비판한다.21) 그는 인종 10(1132) 에 건립된 임존 찬(林存 撰) 僊鳳寺大覺國師碑(陰記)에 나오는 “[天台宗]은 국초부터 크게 번성했던 曹溪, 華嚴, 유가와 軌範을 같이하여 세상에서는 4大業이라 한다”는 말에 근거하여 천태종 창건 이전 300여 년간에는 화엄종, 유가종, 조계종만 있다가 천태와 더불어 고려의 4대 종파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22) 그는 ‘業’이라는 말을 ‘宗’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해석이며, 더군다나 조계종이라는 종파가 의천 이전에 존재했다는 확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불교의 종파구도를 정치 상황과 연결시켜 파악하려는 허흥식의 시도는 주목할만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에 이르러 제도가 뒷받침된 종파불교가 확립되었던 셈이 된다. 신라시대의 불교는 學派佛敎이고 황룡사 주지인 國統을 정점으로 단일한 僧政 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종파불교의 성립이 불가능하였다. 신라 말 불교계의 통제가 와해되고 군소 종파의 난립시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 또다시 불교계의 통제를 위한 제도가 확립되었다. 고려의 불교제도는 군소 종파를 통합시켜 초기의 3대 종파, 중기의 4대 종파의 균형 위에서 발전하였다고 정리될 수 있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불교를 학파불교라 한다면 고려시대는 종파불교라고 불러도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된다.23)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가 잠정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대각국사의 천태종 창립을 전후 하여 고려 불교계는 화엄종, 자은종, 조계종(선적종), 천태종의 4개 종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고려말 조선 초까지는 11개 종파로 난립하다가 태종 6(1408) 7개 종파로 통폐합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3) 고려말 조계종의 계보 문제

이능화는 지눌 이후 수선사를 중심으로 하여 조계종이 크게 성행하다가 고려말에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이 도입되었으나, 조계종에 의탁하여 지내다가 나옹의 법맥은 무학과 함허에서 두절되고 태고의 법맥만이 서산대사 휴정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이능화는 조계종의 지눌 창시설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휴정에 의해 주도되는 조선조 선의 법맥을 태고보우까지 소급되는 임제종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능화와 마찬가지로 지눌의 조계종 창시를 주장하는 이불화나 이종익이 서산의 법맥을 지눌에 연결시키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다. 서산 이후의 조선조 불교가 서산종(西山宗)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위치가 절대적임을 감안할 때, 그의 법맥이 누구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선종으로서의 현 조계종의 법맥, 종조, 종지 등을 포함한 정체성 문제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최근의 논의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김영태고익진의 논문이다.24) 우선 두 논문이 일치하는 점은 서산 자신이 밝히고 있는 자신의 계보는 부용영관-벽송지엄, 그리고 한 세대 더 소급한다면 벽계정심까지 올라갈 뿐이며,25) 그 이전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 서산의 법맥을 그보다 더 소급하여 구곡각운→환암혼수→태고보우로 잇는 법통설은 서산 이후 그의 문도들, 특히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와 중관해안(中觀海安, 1567-?)이 지은 서산의 행장(行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후 조선조 불교의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사실은 그 보다 더 먼저 형성된 계보, 즉 서산의 법맥을 나옹 내지 지눌, 더 나아가서 중국의 법안종(法眼宗)에 연결시키는 허단보(許端甫[허균許筠], 1569-1618)의 법통설26)에 대항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허단보는 나옹으로부터 5번 전하여져, 즉 남봉수능(南峰修能, 연대미상)→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을 거쳐 서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셋째로, 고려말부터 서산에 이르기까지 태고는 나옹에 비하여 미미한 존재로서 서산 이전의 거의 모든 문헌들은 태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나옹만을 추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정황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남는 가장 결정적인 의문은 어찌하여 서산의 문도들이 서산에게 사사한 일도 있으며, 그의 제자였던 유정(惟政)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허단보의 법통설을 굳이 반대하여 서산의 법맥을 태고보우에 연결시키는 법통설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어떤 사실적 근거가 있어서인가, 아니면 이념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날조였던가? 이에 대하여 김영태고익진의 견해는 차이를 보인다. 김영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태고나 나옹 모두 조선 전기의 폐불 상황에서 그 법계가 무너지고 잊혀져서 서산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서산 문도들이 나옹 대신 태고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산 자신이 임제종을 선의 정맥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문도들은 나옹보다는 태고가 임제의 정맥을 더 순수하게 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김영태에 의하면, 나옹도 린지의 18대손인 핑샨쥐린(平山處林)으로부터 법을 받기는 했으나, 그는 인도 승 지꿍(指空, ?-1363)화상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태고만큼 순수하게 임제종 법통을 이었다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고익진은 나옹의 적통은 환암혼수보다는 무학자초-함허득통으로 이어진 계보였으며, 따라서 정심→지엄→영관→(서산)휴정으로 이어지는 계보와는 다른 계보였으므로, 서산이 허단보의 설처럼 나옹계라 하더라도 결국 방계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서산의 법맥을 무리하게 나옹에 연결시키기보다는 아예 태고계로 잡는 것이 더 낫다고 그의 문도들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환암혼수는 나옹보다는 태고의 상수(上首) 제자였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지엄-휴정은 경전의 선적 해석에 기울어지는 무학-함허 계통보다는 보조선을 계승하고 있으며, 태고와 그의 문하 역시 보조선적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27)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통에서는 보조를 배제하고 태고만을 세운 것은 무학이 佛祖宗派之圖에서 나옹을 린지-핑샨의 직계로 잡은 것에 대항하여 린지-쉬우의 직계로서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전법은 내용으로는 보조선이지만 법계는 임제종으로 되는 이중구조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계종의 법통설을 두고 보조냐 태고(린지)냐 하는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고익진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의 논문을 마치고 있다:

두 설은 다 史實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太古법통설은 休靜-惟政의 계통이 득세한 뒤 본래의 법계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태고법계를 단순한 臨濟宗으로 간주해도 안 될 것이다. 사상은 普照禪을 주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28)

고익진의 견해는 임제종 정통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김영태의 해석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고익진의 논문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하다. 우선, 서산의 법맥이 가장 확실하게 소급되는 벽송지엄의 사상과 선풍이 보조지눌을 계승하고 있음을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조와 태고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던 종래의 견해와는 달리 양자를 동일 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산의 법통을 보조 혹은 태고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둘 다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익진은 조계종의 종조와 종지를 둘러싸고 발생된 혼란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다만 서산의 문도들이 제기한 태고법통설이 ‘본래의 법계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의 의미는 더 정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본래의 법계’란 말은 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서산휴정으로구성된 서산 문하의 전통적인 법통설이 문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계보라는 뜻도 아니며, 서산의 사상과 선풍이 실제 나옹과 무학-함허보다는 보조와 태고에 가깝기 때문에 서산의 법통을 태고까지 소급하도록 하는 법통설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로서 확실한 것은 서산의 법계가 벽송지엄 혹은 벽계정심에게까지만 소급되며 그 이전은 불명이라는 점이다.

고익진의 견해에서 한 가지 문제로 남는 것은 과연 태고의 선풍과 사상이 벽송지엄의 경우에서처럼 보조와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태고의 선풍이 지눌과 비교할 때 폭이 좁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아무래도 의심스럽고, 그렇다면 서산의 문도들이 그의 법맥을 굳이 태고로 소급하는 법통설을 세운 것은 역사적 근거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나옹계에 대한 대항의식과, 김영태의 주장대로 서산이 임제종의 정맥을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이념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법통설이 전통적으로 조선조 선가에서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종으로서의 조선조 불교는 벽송지엄과 서산에서 보이듯 실제상으로는 보조지눌의 사상을 따르면서도 법통으로는 태고 법손임을 주장하면서 암묵적으로 임제종을 표방하게 되었다. 고익진의 견해대로 이중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 태고법통설을 주장한 서산의 문도들이 사상적으로는 지눌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태고의 법손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과 괴리가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자기 이해에 근거한 이념적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필경 당시 중국 불교가 임제종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현대의 조계종

 이상에서 보았듯이 고려의 선불교는 라말여초에 성립된 9산 선문이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창 이후 어느 때부터인가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결속되었고, 보조지눌 이후로는 수선사(송광사) 주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태고와 나옹이 중국으로부터 임제선을 들여오면서 고려 선종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고려 선종은 조계종의 이름으로 계속되었다. 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조계종은 세종 6(1424)에 천태종과 총남종(摠南宗)과 합하여 선종(禪宗)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순수 선종인 고려 조계종은 일단 하나의 종파로서는 막을 내린 셈이다. 그 후 서산과 유정이 선사로서 그리고 승병을 통한 구국 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선종은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한국 불교가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종파명으로서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세종조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1941년이었다. 김영태는 그 간의 불교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世宗 6년 이후 禪宗 속으로 들어가 그 宗名을 잃어버린 曹溪宗은, 禪宗이라는 복합종단 안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成宗朝의 抑佛과 燕山, 中宗朝의 廢佛을 겪는 동안에 불교계는 禪宗과 敎宗이라는 두 종파마저 잃게 되었다. 표면적 종파 이름만이 아니고 교단내부에서도 禪宗이니 敎宗이니 하는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한 無宗 無派의 현상 속에서도 그 법맥을 이어 온 것은 曹溪宗 계통이었다. 조선조 중엽의 불교 암흑기를 산중에서나마 중흥시킨 서산대사 休靜이나 그 제자 사명당 惟政은 曹溪退隱 혹은 曹溪宗遺로 자처하여, 그들의 계통이 曹溪宗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백년 뒤의 일이었다. 산 속에 깊이 숨어 宗名에 관심이 없었던 불교계가, 都城 출입금지가 풀리고 남의 나라 불교 종파가 서울에 들어오는 급변한 시대사정을 만나 나름대로의 宗名을 붙이기에 이르렀다.29)

그리하여 특정한 종파의식이나 종명, 그리고 교학사상도 없이 표류하던 한국불교는 원종(圓宗, 1908), 임제종(臨濟宗, 1911)의 이름을 표방하다가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따라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 1911)이라는 이름으로 30년을 보냈고 1941년에야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종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총칭으로서의 이 조계종과 순수 선종으로서의 고려 조계종 사이에는 시간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같은 사실을 무시하고 현대 조계종을 고려 조계종의 단순 연속으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동일시하는 것은 사실을 심히 왜곡시키는 일이다. 물론 조선조 내내 선이 한국불교의 주류로서 명맥을 유지해온 것은 사실이며, 1941년에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내세웠을 때는 한국불교가 선불교 중심이며 고려의 조계종을 계승한다는 뜻을 천명한 셈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 해도 역시 두 조계종 사이에는 연속성 못지 않게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다. 현대 조계종은 1941년 당시 한국불교 전체를 지칭하는 총칭이었기 때문이다. 김영태는 이 점을 간과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속성만을 부각시키는 기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1941년 봄에는 太古寺 (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總本山으로 삼고, 종단 이름을 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일본 총독부의 사찰령 이후 줄곧 禪敎兩宗이라는 불분명한 종명을 써오다가 이 때 曹溪宗이라는 종명으로 확정을 하게 된 것이다. 曹溪宗이란 한국 재래 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었으며, 특히 신라말부터 전래된 禪宗이 고려에 와서 九山禪門을 형성한 이래 그 총칭적인 종명으로 조선조 초에까지 이르렀다... 그 뒤 종명 없이 내려오는 동안에도 曹溪宗 계통이 줄곧 법맥을 이어왔으므로 전통적인 종명으로서의 曹溪宗을 되찾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0)

이러한 견해는 현재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 내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지만, “조계종 계통이 줄곧 법맥을 이어왔으므로 전통적 종명으로서의 조계종을 되찾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견해는 다분히 비약이다. 앞에서 고찰한 대로, “줄곧 법맥을 이어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기 어렵고,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결코 과거 고려의 조계종이 아니라는 점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불교계에서 조계종, 태고종 이외에 다수의 종파들이 옛 종파명들을 내걸고 다시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대에 출현한 조계종은 그 명()과 실()이 상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조계종이라는 명칭의 사용이 부당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1941년 당시 한국불교는 어쨌든 선불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한국불교 지도자들은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채택함으로써 선종으로서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천명하는 이념적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역사의 우여곡절 끝에 종파의 구별마저 상실하게 된 당시 한국불교 전체를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만약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사실상 초종파적이었던 한국불교 전체를 포괄하기에 손색없는 이름이라면, 그것이 마치 순수 선종인양 그 종조와 법맥을 따지는 일은 자가당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일과 초종파적 불교로서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같은 조계종의 이름으로 둘 다 인정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현재의 조계종이 양자를 모두 놓치지 않기를 원한다면,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가 선이 주이면서도 교학이나 정토신앙 등을 비롯하여 여타의 신행들을 포함하는 종합적 불교임을 주장하고 지향한다면, 그리하여 한국 조계종이 중국이나 일본의 선불교 종파들과는 달리 매우 포괄적인, 그야말로 통불교적 성격을 띤 한국 특유의 융합적 선종이라면, 이 점 또한 분명히 천명하고 선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이념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전통과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등의 문제들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 조계종의 종지와 정체성의 문제: 사상적 전통의 관점에서

 

1941년에 발족한 조계종이 한편으로는 고려의 조계종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500여 년의 단절이 있은 후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당시 한국불교의 전체를 총칭하는 이름이라면, 과연 이러한 새로운 조계종은 어떤 뚜렷한 이념적 기반을 지닌 종파일까 아니면 단순히 역사의 우여곡절 끝에 타율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941년 당시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이 단지 불교 외적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 상황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한국불교 전통에 내재했던 사상적 성향과 지향성의 결과이기도 하다면, 우리는 현 조계종과 적어도 고려 조계종 사이에 역사적 단절 못지 않게 사상적 연속성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조계종이 자신의 성격을 순수 선종으로서 편협하게 정의하려 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선을 위주로 하면서도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언행(信行)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종단이라면, 그렇게 하는 사상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조계종의 이념적 정체성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조계종을 이끌고 있는 종정(宗正) 이하 여러 선지식들과 조계종에 몸담고 있는 불자들이 중지를 모아 결정할 이념적 선택의 문제로서, 단순한 학문적 논의의 대상을 넘어선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에도 역사적인 측면, 즉 과거 한국불교의 사상적 전통이라는 역사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나는 여기서 이 면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선불교로서의 조계종의 종조 문제나 법통설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든,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현대 조계종이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을 종지(宗旨)로 하고 있다는 데에 놀라울 정도의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사상사적으로 충분히 정당화되는 견해로 보인다. 김영수, 타카하시 토루(高橋亨), 에다 토시오(江田俊雄), 그리고 고익진의 견해를 빌어서 이 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고려 조계종이 지눌에 의해 창시된 것이라는 이능화의 견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초기 한국불교 연구의 대가 김영수는 다른 한편으로 조계종의 종지를 지눌이 천명한 돈오점수론(頓悟漸修論)에서 찾고 있다. 김영수는 “朝鮮佛敎宗旨에 就하야”라는 논문에서 조선불교(그의 표현 대로는 曹溪禪宗)의 종지는 선과 교, ()와 수()를 아우르는 돈오점수의 원리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頓悟漸修의 曹溪 宗旨가 普照國師 시대로부터 완성된 후에는 曹溪九山의 法侶가 다 이 종지를 嗣承하여 조계구산은 이에 통일을 얻었다. 우리 조선불교의 宗祖인 太古화상은 문파별로는 迦智山 道義國師의 후예임으로 사굴산 梵日國師의 법손인 普照國師와 더불어 동일한 傳燈은 아니지만, 같은 曹溪宗이므로 頓悟漸修의 보조사상은 그대로 嗣承한 것이다.31)

이상 普照國師의 唱한 曹溪宗旨의 대의를 다시 더 한번 간단히 말하면 古來의 禪敎 兩家에서는 너무나 일방으로 치우치는 감이 不無하여 禪學者는 一向 天眞自然을 爲主하므로 수행을 힘쓰지 아니하고 敎學者는 一向 漸修成功을 爲主하므로 見性悟道를 믿지 아니하던 것이다. 절충조화하여 禪家 曹溪宗의 本旨인 不立文字 直旨人心 見性成佛의 종지에 의하여 자기 自性을 頓悟하고 敎家 華嚴經의 교리인 地位漸次의 普賢行을 漸修하여 성불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頓悟漸修의 曹溪宗旨이다.32)

타카하시는 조선조 불교에 있어서 서산대사의 절대적 위치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大師가 출현하여 크게 禪과 敎의 體가 둘이 아니며 敎는 곧 佛語요 禪은 곧 佛心이며, 佛語는 入門이며 밝은 눈을 지닌 불자는 끝내 나아가서 佛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자후를 발한 후부터 점점 승계의 권위가 되어 敎와 禪의 다툼은 거의 결정되었으며 교와 선을 兼修하면서도 坐禪見性으로써 최종 大事로 하는 조선 특유의 한 종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敎禪兼修를 주장하는 서산대사의 불교관의 계통을 찾아보면 멀리 조계종 중흥조 普照國師의 三門에 연원하며 가깝게는 그의 法祖인 碧松과 法父인 芙蓉의 宗義를 계승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33)

 여기서 타카하시는 조선조 불교의 기둥인 서산의 선교겸학(禪敎兼學),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사상이 지눌에게서 온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이것이 한국 특유의 종파 내지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다 토시오는 서산 이후 한국 선가에서 전해지는 태고보우 중심, 임제종 중심의 법통설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그러면 禪宗으로서의 조선불교의 祖師는 역사와 실제 상으로 靑丘의 達摩라고도 부를 수 있는 高麗의 普照國師 知訥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그 종파는 고려의 중엽부터 이조의 중엽까지 전후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특유의 禪敎綜合的 선종인 曹溪宗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34)

한국불교가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1941) 6년 전(1935)에 씌어진 이 논문에서 에다는 선이 중심이면서도 교를 포섭하는 선교종합적인 조선불교가 종명을 가진다면, 마땅히 고려 중엽부터 조선조 중엽까지 번성했던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하며, 그 종조는 지눌로 해야 한다는 견해를 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든 3인은 모두 한국 불교전통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로서, 한결같이 한국불교의 선주교종적(禪主敎從的) 전통, 선교융합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지눌의 사상적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한국불교는 역사로 보나 실제 영향력으로 보나 보조지눌과 그의 사상을 이은 벽송지엄→부용영관→서산휴정의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고익진의 논문은 지눌과 벽송지엄(휴정의 法祖) 사이의 사상적 유사성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해주고 있다. 지엄의 오도(悟道) 과정이 지눌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도서都序󰡕󰡔절요節要󰡕로 참 알음알이(如實知見)를 얻게 한 후 󰡔선요禪要󰡕󰡔서장書狀󰡕으로 지적이해의 병(知解病)을 씻게 하는 사교입선적 그의 지도 방법은 지눌이 사용했던 것 그대로이다. 고익진은 심지어 “그렇다면 지엄은 조선 중종대의 법란 속에서 보조선을 부흥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고까지 추측하고 있다.35) 뿐만 아니라, 휴정의 법맥을 나옹에서 태고로 바꾸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서산의 제자 편양언기의 경우도 지눌과의 사상적 연속성이 뚜렷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禪門은 최하의 根機를 가진 자들을 위해 敎를 빌려서 [진리를] 분명히 보여준다. 소위 性, , 空의 3종이다. [그러나 이들은] 理路, 語路, 問解, 思想이 있기 때문에 圓頓門의 死句가 된다. 이것은 義理禪으로서 앞의 格外禪이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정해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각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진리, 마음]을 입으로 잃어버리면 拈花微笑도 모조리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 떨어질 것이요, 만약 그것을 마음으로 얻는다면 거친 언어나 세밀한 말도 모두 實相을 말한다.36)

타카하시는 편양의 사상을 평하기를, “스님은 선과 교와 염불(念佛)의 세가지를 일심문(一心門)에 귀속시켜, 마음을 닦는 진실한 방법은 선이라고 단안을 내리기 때문에 선으로써 교와 염불을 종합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고려 보조국사의 삼문(三門)에 환원되는 것으로서, 서산대사의 법을 이은 것이 틀림없는 까닭이다”라고 한다.37)

결론적으로 말해, 현 조계종이 선종이면서도 교학과 염불 등을 수용하는 포괄적 종단으로서 사실상 한국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종단이라면, 그것은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의해 많은 역사적 우여곡절 끝에 생겨난 결과물이라는 사실 못지 않게 고려의 조계종, 특히 보조국사 지눌로부터 내려오는 선사상적 전통의 구현이라는 이념적 연속성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여러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공통된 증언에도 불구하고 임제종과 태고보우 법통설을 주장해온 서산대사 이후의 조선 선가의 전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38) 최근에 한국불교에 큰 족적을 남긴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그 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였으며, 그는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지눌의 선사상을 맹공한 사람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39) 그의 견해를 학설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한 선사로서의 개인적인 종교적, 이념적 신념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지 애매한 면이 없지 않으나,40) 그의 지눌에 대한 견해의 정확성 자체는 학문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지눌 비판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의 비판이 오직 지눌 사상의 일부분인 돈오점수론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성철이 그토록 중시하는 따후이(大慧, 1089-1163)선사의 간화선(看話禪) 전통도 한국불교의 경우 지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한 것은 임제선을 이상으로 여겨 선의 순수성 내지 완벽성을 지키려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지눌이 주장한 닦기 전 깨달음(修前悟)으로서의 해오(解悟)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증오(證悟)만을 염두에 두면서 닦음()과 깨달음()의 질적 차이를 강조한 그의 접근법은 돈오돈수보다는 오히려 점수돈오(漸修頓悟)로 귀결된다. 화두(話頭) 공부를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치열한 수행을 한다 할지라도 깨닫기 전까지는 점수(漸修)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1) 여하튼 선사로서의 성철의 주장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결코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이해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이상에서 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의 담론이 형성된 배경과 그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방향을 논했다. 그리고,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가 구체적 결실을 맺기 위해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서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를 대표적인 한국불교 연구가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의 탐구는 미래적, 이념적, 당위적 차원에서도 논의되어야 할 문제지만, 그에 앞서 역사적 연구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임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서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를 역사적, 사상사적 관점에서 다루어 보았다. 이제 이러한 예비적 고찰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한국불교 일반의 특성과 정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담론을 고찰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13385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