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들은 머리를 싸메고 공부하면서도...
정작, 눈을 부라리고 파고드는 그 자료들인... 선대 기록들의 신빙성은 고려치 않는데 큰 모순이 발생합니다.
저도 아직 청태종 홍타이지의 본명을 알 순 없습니다.
우리가 철석같이 의심치 않던 청태종의 이름이란 홍타이지(皇太極)는...
청태종의 황호란 설도 있습니다 만...
둘 다 아닌 듯 합니다.
청나란 개국초부터 철저히 몽골황후를 맞았고...몽골의 제도와 풍습을 유지하려 애썼고...
몽골 대칸 릭딘칸의 옥새를 입수하고 난 연후에야 드디어 조선에 황제임을 인정해 달라고...
그 증거로 자신을 지지한 몽골 패륵들을 죄다 동원해 앞세우며 조선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청나라도 몽골과 똑같이...왕 호칭을...한(칸)이라 했습니다.
고로, 왕자&태자들의 호칭도 같을건 뻔 한 겁니다.
몽골어로 왕자는 "한후"입니다.
몽골어로 홍태지(홍타이지)는...
왕자들 중...왕세자...즉 황통을 이을 황태자(皇太子)란 말입니다.
그 말 만 으로도...황태지(皇太極)...황태자(皇太子)...
중국어를 몽골이 받아 사용한 건지...
원래 몽골어 홍태지에 유래한 음차글이 황태자의 어원인 진 아직 모르겠으나...
홍타이지(皇太極)는 청태종의 본명이 아닌...황태자란 직위명임을 여러분께 보고 드립니다.
위에 유추해 보건데...
청태조의 이름이란 애신지료 누루하치도...이름이 아닌...몽골어 다루하치(다루가치)와 유사한 관직명일까 합니다.
주신(조선?)...또는 금(大金)의 다루가치란 뜻 같습니다.
다루하치는...달단의 왕...
누루하치는...흉노(훈누)의 왕..이것 아닐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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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청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이다. 휘는 황태극(皇太極). 만주어로는 홍타이지(만주어: - Hong Taiji)라고 한다.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아바하이(阿巴海)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나 이는 만주식 연호인 '압카이 수러'가 서양에 잘못 알려져서 탄생한 별명이다. 부황인 천명제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연호를 천총(天聰)이라 하다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 역시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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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및 치세
1592년 11월 28일 만력 20년 애신각라 황태극은 엽혁나랍씨 소생으로,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代善, Daišan),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Amin), 누르하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버일러(貝勒)로 알려지게 되었다.
1626년 천명 11년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누르하치가 죽자, 후계자로 지목되어 한(만주식 군주 칭호. 칸과 같은 의미이다.)의 보위에 올랐다.
1627년 천총이라는 연호를 개원하였다. 즉위 당시 명나라와 교전 상태에 있어 주변 상황이 다소 어려웠으나 만주족과 한족과의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후 외정에 나섰다. 당시 조선 가도에 들어가 후방을 어지럽히는 모문룡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항복을 받아 후방의 안정을 꾀한다.
1631년 차하르의 링단 칸에게 승리를 하였다. 1635년 천총 9년 주변의 여러 국가를 침공 및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내몽골를 평정하여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大元傳國 玉璽)를 손에 넣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淸), 즉 청나라를 개국하였고, 연호를 다시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1636년 12월 여전히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서 1월 30일 부로 전쟁을 끝내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조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스런 항복을 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
그 후 중국 본토를 노리며, 산해관을 공격하였으나 중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643년 9월 21일 뇌출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내삼원(內三院)과 6부(六部), 군사 및 행정제도인 팔기군체제를 재정비하여 대청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후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첫댓글 위에서 말씀하신 청태극과 황태극에 대한 내용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편을 보게되면,
몽고는 호(胡)다. 중국의 북막(北漠)에서부터 동쪽으로 흑룡강 밖에 이르는데, 합하여 48부(部)가 되니, 이른바 청태극(靑太極)ㆍ황태극(黃太極)이 이것이다. 서액라사(西額羅斯)에 사는 것을 합이합(哈爾哈)이라 하고, 동액라사(東厄羅斯)에 사는 것을 대비달자(大鼻㺚子)라 한다고 한다.
서액라사를 합이합으로 명명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합이빈>하얼빈에 해당하며 대륙에 동북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합이합과 합이빈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사한 지명은 분명이 유사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분명히 서쪽에 있어야할 지명과 유사한 지명이 동쪽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누군가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을 했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과 별도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3/ 서학(西學) 편을 보게되면, 한자는 좀 다르지만, 극서 지역에 두개의 학교가 있는데, ....."박이도□이아(博爾都□爾雅)는 구라파의 극서(極西) 쪽에 있다. 이 나라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다. 즉 액물랄(阨物辣)과 가응발(哥應拔)인데, 구라파의 고사(高士)가 대부분 이 두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이러한 표현으로 '액'이라는 음이 서쪽지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단서가 또 나타납니다... 서학의 대표격인 두개의 학교라고 하네요...
이 부분이 분명히 위에서 말씀하신 청나라와 그것의 설립인물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습니다. 아래의 연결되는 내용은 사교의 배척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해석이지만, 분명히 역사적으로 지명과 함께 사건이 서술된다면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보여지는 군요.
제가 추론하는 바는 극서라면 포루투갈과 스페인 이쪽이 아닐런지요? 결국은 같은 부분을 공유해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라고 봅니다만... 서구에서는 서양의 역사로 분류하지만, 우리의 고전 문헌을 따라가 보면 러시아(청/여진)과 같이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하는 문화로 설명해야 정확하다는 것이죠. 포루투갈은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진출한 최초의 서구국가가 되기도 합니다. 즉, 아시아적 요소가 있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에게도 학문이 있었다는 것이죠... 서양의 학문을 영미권에서 찾지만 그 이전의 원조격 원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이들 자신들도 문명을 동쪽에서 왔다 했습니다...지들지역의 역사면...지들 조상들의 역사고...결과적으로 지들이 역사내내 동양을 지배한 것인데...양이들이 왜 그걸 선전하지 않고...그저 문명을 동에서 왔다고 얼버무리겠습니까...?...그 서역조선의 근거들은...조선(아세아)의 서역 식민지 잔해들인 것이라 하는게 맞지...아세아(조선)의 중심을 서역 식민지로 해석함은...마치, 후세 사가들이...괌을 미국의 수도라 해석하는 식의 무리수라 하겠습니다.
포투갈...스페인...어딘 못 갔겠습니까...정화함대가 이미 아메리카 까지 가서...고려의 지배층(식민총독)들을 제거하고 새 황조(명조선)의 탄생을 선포하는게...양이들이 도달하기전 이미 한 번 피벼락을 맞은 잉카의 몰락일듯 한 것을여...
그렀다고 조선의 중심이 아메리카 일 순 없는 이치이겠져...
정말 천재십니다. 누르하치(누르한치==누르(쇠=금) + 한(칸) + 치)...즉 "금나라(쇠나라) 황제(칸)" 무리(족속=치)"란 뜻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