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면 어느 곳이든지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상당수는 이에 합당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성격이 괴팍하든지, 자기중심적이라든지, 사람을 싫어하든지... 아주 가끔 나타나는 예외적인 경우(한 사람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선각자여서 우매한 대중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를 제외하고는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미움을 받는 것 같다. 연구소에 앉아 있다 보면 상담을 위한 전화가 곧잘 온다. 어떤 분은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중에서 건강하지 못한 분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몸에서 진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평소에 꾸준히 관계를 맺어 와서 이해가 생긴 경우라면 모를까. 그래서 롤로메이는 상담을 고통당하는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며 자아를 죽이는 행위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여기,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두명의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윌 헌팅’이라는 청년이고 또 한 사람은 ‘멜빈 유달’이라는 중년남성이다. 둘에게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 있다. 윌 헌팅은 그 유명한 MIT공대학생들이 며칠 동안 풀지 못하는 수학문제를 단순간에 풀어버린다. 멍청한 녀석들이 지성인인 척 하면서 대학을 지나다니는 꼴이 윌 헌팅의 눈에는 한심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이라는 사회 안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냉소적으로 주위를 바라볼 뿐이다. 반면 중년남성 멜빈 유달은 유명한 로맨스 소설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한다. 써 내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출판사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비위를 맞춘다. 유달의 객관적인 생활은 부족한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혼자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혼자이면 외로움을 느끼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생긴다. 하지만 유달은 철저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차단한다. 혼자인 것이 좋다. 사람들이 공동체생활을 불편해 하는 이유는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일정부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내와 맞춰가면서 살아야한다. 방바닥에서 비디오테잎을 빌려다 봐도 마누라가 싫어하는 취향인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한다. 참 머리 아픈 일이다. 그런 것을 겪어가면서 끈적끈적한 유대감이 생기고 서로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달은 그런 것이 아주 질색이다. 더구나 그는 노이로제환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매일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 앉아서 어제와 똑같은 웨이트레스의 접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하고 함께 산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남자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반면 윌 헌팅에게는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맥주집에서 왁자지껄 떠들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거친 농담을 주고 받고 욕설로 우정을 확인하는 터프가이의 세계, 그는 여기에 머무른다. 더 이상 다른 세계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틈이 보이면 기를 쓰고 그 틈을 뚫고 올라가려고 한다.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윌 헌팅은 그 본능을 무시한다. 선을 그어놓고 절대로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왕년에 어느 아파트 촌에서 교육전도사를 하던 시절, 그 교회에 학원을 6개나 다니던 아이가 있었다. 악기도 3개 정도 다룰 수 있는 재주꾼이었다.
“너 음악을 좋아하니?”
“아니요. 음악이라면 이가 갈려요.”
“그런데 왜 음악학원에 다니니?”
“안 다니면 엄마한테 혼나요.”
악기를 배우는 이유는 음악을 사랑하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데 있는 데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증오한다면 차라리 악기를 다루지 못해도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 헌팅은 시스티나성당의 그림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지는 않는다. 심리학자의 이론은 줄줄줄 꿰고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열지는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의 문둥병자라고 할 수 있다. 뜨거운 것이 가슴에 닿아도 뜨겁지가 않고 가슴 속에 얼음덩어리가 떨어져도 차갑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많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울거나 웃거나 하지 않는다.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어느 신학박사의 설교는 참 논리적이고 기가 막힌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회중들을 울릴 수 없다. 반면 무식한 할머니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간증은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것이 영혼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신비이다. 아무리 천재적이고 똑똑하면 뭐하는가? 천재성이 자신의 영혼을,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면... 천재청년 윌 헌팅, 그는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길은 열려 있다. 그 구원은 머나먼 우주 저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매일 만나는 이웃에서 시작된다. 자기에게 접근하는 사람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는 구제불능 노이로제환자 멜빈유달, (어느날 한 여성이 유달에게 호감을 갖고 묻는다.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여성을 잘 이해하세요.” “여성은 남성에게서 이성과 책임감을 뺀 존재입니다.” 그는 매사 이런 식이다.) 그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은 어이없게도 강아지 한 마리이다. 버델이라고 불리는 이 강아지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괘팍한 멜빈유달의 행동너머에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아울러 괴물같은 그에게도 따뜻한 불씨가 남아있음을 이 신통한 동물이 알아 본 것이다. 계속 구박하고 상처받을 만한 말만 골라서 내뱉어도 이 놈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상처를 받거나 말거나 하지. 이럴 경우는 언어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도 자기가 좋다고 달라붙는 데는 도리가 없나 보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강아지 베델은 유달의 마음을 연 최초의 존재가 된다. 내친 김에 유달은 다른 두사람의 천사가 된다. (그렇다고 유달이 갑자기 착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입에는 독설이 가득차고 식당에서도 까다롭기 짝이 없는 손님 노릇을 한다.) 강도를 당하고 좌절한 게이 화가 사이몬에게 잠자리와 먹거리를 공급하고 심지어는 고향에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고향으로 가는 여정에서 사이몬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감을 받는다. 유달로부터 구원을 받는 또 한명의 사람은 유달의 전속(?) 웨이트리스 캐롤이다. 캐롤에게는 천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들이 있다. 이 병약한 아들로 인해서 캐롤의 삶은 언제나 고달프다. 그러다 갑자기 아들에게 꽤 유명한 의사가 나타난다. 유달이 출판사사장에게 손을 쓴 것이다. 가장 골치덩이었던 손님에게 뜻밖의 온정을 받은 캐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리고 동화처럼 사랑이 싹튼다. 이 중년남성은 개를 돌봐주고 경멸했던 동성애자 화가를 돌봐주고 불쌍한 여인을 돌봐주면서 자신이 갇혀있던 감옥의 문을 조금씩 열게된다.
천재청년 윌 헌팅에게도 구원의 빛이 던져진다. 유달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조금씩 나눔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면 윌 헌팅은 그를 향한 주위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치유를 경험한다. 윌 헌팅의 천재성을 발견한 램보교수, 하바드대학생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윌 헌팅의 재능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그의 연인 스카일라, 삐뚤어진 그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도와주는 심리학자 숀, 밑바닥 인생에서 함께 살지만 헌팅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우정을 나누는 처키, 한 사람이 치유되고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이토록 많은 사람이 사랑을 퍼부어 준다. 물론 처음부터 윌 헌팅이 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짓밟고 조롱하고 자신을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채찍질을 하며 상처를 낸다.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빛나는 인생이 눈앞에 펼쳐질 텐데 왜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는 것일까? 비밀은 윌 헌팅의 어린시절에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매일밤 허리띠로 맞아야만 했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그의 몸에 난 상처보다 더 큰 자욱의 상처가 그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단 한사람, 아버지로부터 사랑만 받았어도 그가 인생을 그토록 어렵게 살지 않았을텐데... 어린 시절의 치명적인 아픔이 자신을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결정지은 것이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대부분이 심한 죄책감 속에서 살아간다는 통계가 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말이다. 숀은 윌 헌팅을 끌어안고 절규한다. “네 책임이 아니야.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은총은 다름아닌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 지긋지긋한 죄책감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처받은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가 있다. 같이 맥주마시고 어울려 다녔던 처키이지만 친구의 가치를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네가 이곳을 떠나 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버리는 거야. 어느날 네 집문을 두드렸을 때 10초간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나는 제일 행복할 거야.” 사랑은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것이다. 우정을 소유하고, 사랑을 소유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곪게 만드는 것이다.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상처입은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데 있다. 남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만 모여사는 공동체는 건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다. 아이가 없는 가정, 결국 1세대로 끝나버리고 만다. 건강한 공동체는 반드시 상처를 안고 시작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공동체의 아름다운 기운은 상처입은 구성원들을 치유한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치유되면서 공동체의 아픔도 치유가 된다. 쟝 바니에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인간들 자체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으며, 보다 더 깊은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나약성을 드러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항상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피할 수 없는 상처들이 나누어지고 서로가 마음을 주고 받는다. 완전하지 않지만 부족한 나눔들이 오가는 공동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공동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