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데뷔 20년을 맞은 '적토마' 이병규. 2013년 타율왕 이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팬들은 여전히 '이병규' 이름 석자에 열광한다. 아직 더 뛰고 싶은 그에게 세월이란 무엇일까
하루에도 천 리를 간다는 적토마(赤兎馬). 삼국지에 등장하는 이 명마는 수많은 영웅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이병규도 그랬다. 그라운드에서 20년의 세월을 LG맨으로 살았다. 누구보다 뜨겁고, 신바람 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거침없이 달리는 이병규에게 팬들은 '적토마'란 별명을 선물했다. 여포와 관우를 번갈아 태운 적토마처럼 이병규도 LG를 떠나 잠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즈에서 뛰었다.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않은 적토마와 달리 그는 친정 LG로 다시 돌아왔다.
이병규는 데뷔 시절부터 화려했고, 커리어 내내 최고 자리를 지켰다. 그도 그럴 게 1997년 프로에 데뷔한 이병규는 그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동시에 차지했다. 특히 1999년 최다안타 1위(192개)에 등극하며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올랐다. LG 통산 최다 안타의 주인공 역시 그다(2천42개). ‘유지현 - 서용빈 - 김재현' 트로이카의 시대가 끝났을 때도 영웅의 자리를 지킨 이도 이병규였다. 그는 이미 LG 역사에 길이 남을 '현역 전설'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2016년이다. 이병규는 현재 LG 퓨처스 팀에서 훈련 중이다. 몸 상태도 좋고, 특별한 부상도 없다. 퓨처스리그에서 0.444의 고타율까지 기록 중이다. 누구보다 뜨거운 타격감을 자랑하는 이병규지만, 1군 승격 소식은 아직 없다.
위기에 빠진 '적토마' 이병규
외야에서 몸을 풀던 이병규가 심판들과 수신호를 주고 받는 장면
5월 3일 전국에 불어 닥친 강풍으로 서 있기조차 힘들던 경기도 이천 LG 챔피언스파크. 나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은 아침부터 선수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띈 이가 바로 이병규였다. 이병규는 이른 시간에도 어린 선수들과 어울려 배팅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신인 선수들이 아침 일찍부터 훈련을 시작하고, 베테랑 선수들은 조금 늦게 구장에 나올 터. 하지만 이병규는 달랐다. 프로야구 최고령 선수지만, 일찍부터 구장에 나와 가장 먼저 훈련을 시작했다. 이어진 외야 수비 훈련에서도 이병규는 가장 먼저 글러브를 챙겨 우측 펜스로 달려갔다.
이병규는 수비 훈련 내내 후배 선수들과 담소를 주고받았다. 여러 가지 조언을 건네는 듯했다.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행여나 후배들이 긴장할까 먼저 장난을 걸기도 했다. 'LG'라는 큰 산을 홀로 짊어졌던 리더답게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고 있었다.
최근 이병규의 1군 복귀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의 복귀 시점을 놓고 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다. LG 1군 성적이 신통찮으면서 이병규가 반전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양상문 LG 1군 감독은 조금의 미동조차 없다.
일각에선 양 감독과 이병규의 불화설을 제기한다. 한편에선 "팀이 리빌딩을 선언한 가운데 은퇴 직전의 노장 선수를 1군에 올려 뭘 하겠냐"는 소리도 한다. 그런 부담 때문인지 이병규는 외부와의 인터뷰를 모조리 거절하고 있었다. 2월에 진행된 LG 퓨처스 타이완 스프링캠프에서도 이병규는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만난 그는 사안이 민감한 만큼 오해를 피하고 싶어 했다.
“별 문제 없이 훈련도 열심히 하고, 경기에도 나서고 있다. 괜한 오해나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 나중에 상황이 좋을 때 다시 만나자.”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이병규는 정중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이날 예정됐던 경찰청과의 경기는 기상 악화로 취소됐다. 이병규는 마지막까지 구장에 남아 스트레칭 훈련을 소화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기자는 '할 말은 많으나 그 할 말을 아껴야만 하는' 이병규의 입장만큼이나 뭔가 모를 애잔함을 느꼈다.
기자의 취재 당시 LG 퓨처스팀 로스터엔 1군 선수들의 이름이 많이 보였다. 봉중근을 비롯해 류제국, 김용의, 류강남 등이 부진과 컨디션 난조 등의 이유로 이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퓨처스팀 전체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김동수 퓨처스팀 감독의 부담감도 무겁게 느껴지긴 매한가지였다.
노장에 대한 예우인가? 형평성의 부재인가?
여전히 그의 방망이는 뜨겁다. 퓨처스리그 15경기에 출전한 이병규는 0.444의 타율을 기록 중이다. 홈런도 2방을 쏘아올렸다.
이병규만큼 자주 거론되는 선수가 김광삼이다. 프로 데뷔 후 LG에서만 18년을 뛰었던 그는 최근 등판한 3경기에서 평균 자책 ‘0’을 기록했다. 1군 선발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김광삼의 활약은 눈에 띄는 장면이었다. 당장 그를 1군에 올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5월 1일 잠실에서 벌어진 kt와의 경기. 원래 선발 예정이던 우규민을 대신해 퓨처스에서 올라온 투수는 김광삼이 아니라 봉중근이었다. 평균 자책 ‘0’을 기록한 투수 대신 퓨처스리그에서 평균자책 14.34를 기록 중이던 봉중근을 선발 기용한 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물론 베테랑 봉중근에게 퓨처스 성적은 숫자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 기록만으로 봉중근을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LG의 한 관계자는 “김광삼의 속구 구속이 아직 정상적이지 않다. 1군에서 뛸 몸 상태가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올라갈 것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논란의 골자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할 형평성과 공정성이었다. 봉중근 등판에서 형평성과 공정성은 자취를 감췄다. 양 감독은 이날 경기 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봉중근을 선택한 이유로 '동기부여'와 '집중력'을 꼽았다.
양 감독의 이유가 합리적이라면 팀을 위해 20년, 18년을 헌신한 두 베테랑 이병규, 김광삼에게도 같은 이유가 적용돼야 했다. 특히 두 선수는 퓨처스리그에서 맹타와 호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동기부여'와 '집중력'이 필요한 이들은 봉중근뿐만 아니라 이병규, 김광삼도 마찬가지였다. 재미난 건 양 감독은 이와 관련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로에 선 LG. 리빌딩의 성과는?
2016년 5월 3일, LG 퓨처스 팀 선발 라인업
리빌딩(rebuilding)의 사전적 의미는 개축(改築)이다. 도시를 재건하거나 집을 개축하거나 혹은 신체를 개조할 때 리빌딩이란 말이 사용된다. 야구에서 리빌딩은 팀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다.
야구에서 리빌딩은 팀의 고질적인 병폐를 청산하고, 젊음과 혁신을 이루고자 할 때 단행된다. 메이저리그 역시 하위권 대부분의 팀이 리빌딩을 주창한다. 대개 주축 선수들을 처분하고, 재능 있는 유망주로 팀을 꾸리는 방식으로 리빌딩이 진행된다. 현재보단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역풍도 있다. 리빌딩 과정에서 팀의 주축 선수 대부분이 팀을 떠날 수밖에 없다. 팬들의 원성이 빗발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LG 역시 이 부분을 피해갈 수 없다.
양 감독 취임과 함께 팀은 변하기 시작했다. LG는 순차적인 리빌딩을 선언했고, 이후 놀라운 모험을 시도했다. 지난해 11월 2차 드래프트에 앞서 LG는 ‘40인 보호 선수 명단’에서 베테랑 이진영을 제외했다. 타 구단 관계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항간엔 이병규를 필두로 정성훈, 이진영 등 베테랑 선수들이 팀 분위기 저하의 주범이란 말도 있었다. 팀을 추스려야 할 선수들이 오히려 젊은 선수들을 기로 찍어 누른다는 것. 이진영을 '40인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하고, 이병규를 1군 스프링캠프에 부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이 많았다.
‘적토마’ 이병규를 대신해 채은성, 이형종, 이천웅 등 젊은 선수들이 대거 1군에 올랐다. 본격적인 체질 개선에 들어간 것이다. 서상우와 이형종은 기대에 부응하듯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이천웅 역시 주전 우익수로 나쁘지 않았다. 이형종과 강승호는 데뷔 후 처음으로 1군행 티겟을 손에 쥐었다.
LG의 리빌딩은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 70경기 출전에 그쳤던 ‘미운 오리’ 루이스 히메네즈가 백조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를 중심으로 박용택과 ‘작뱅’ 이병규가 새 판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어린 선수들이 떠받치는 외야진 역시 지난해보다 성장했다. 한마디로 타선은 어느 정도 자릴 잡았다. 반대로 ‘큰뱅’ 이병규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레전드의 불꽃은 타올라야 한다.’
팀 타선을 이끌었던 이병규. 수많은 타자들이 그를 믿고 의지했다. 이병규가 팀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이병규는 LG 소속으로 통산 2천42안타를 기록 중이다. 팀 통산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통산 WAR(선수 대비 승리기여도) 역시 55.21로 타자 전체 1위다. 기록 면에서 이병규보다 뛰어난 LG 타자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명실상부 LG의 레전드다. 최근 그는 퓨처스리그에서 4할 타율(0.444)로 폭발 중이다. 최근 10경기에서 13안타를 몰아쳤다. 홈런도 기록하며 무력시위에 나섰다. 늙었다는 핑계가 더는 통하지 않는 이유다.
타자로서의 강점도 여전하다. 수많은 경기 경험과 노림수는 그의 최대 장점이다. 모 팀 코치는 "지금도 지명타자나 대타로 출전하면 상대 투수들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을 것"이라며 "다른 건 몰라도 방망이는 건재한 거 같다"고 말했다.
리빌딩은 젊은 선수만 데려다 놓는다고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베테랑 선수들의 조언과 신·구 세대가 벌이는 건전한 경쟁이 밑받침 돼야 비로소 리빌딩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병규는 한국 나이로 43살(1974년생)이다. 팀 내 가장 어린 선수가 21살(1996년)임을 고려할 때 그 선수보다 무려 22살이 많다. 아들뻘 되는 선수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이병규를 보며 "이제 그만 흰 타월을 던지라"고 요구하 이도 있다. 하지만, 흰 타월을 던지라고 강요하기 전에 공정한 기회와 설득력 있는 명분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 논란에서 가장 답답한 이는 이병규 본인일 거다. 두 살 어린 홍성흔(두산)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홍성흔도 이병규처럼 퓨처스에 오래 있었다. 그러다 외국인 타자 닉 에반스가 부진하자 우여곡절 끝에 1군에 올랐다. 1군 첫 경기던 4월 30일 홍성흔은 보란 듯이 시즌 첫 안타를 때려냈다.
국내 프로구단의 레전드 대우에는 늘 아쉬움이 많다. 미국만 해도 상황은 다르다. 미국의 경우 부상으로 인한 리햅(마이너리그 재활 경기)을 제외하면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를 마이너리그로 내리거나 마이너리그에 내렸다손쳐도 이유없이 오래 두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능력만 있다면 스프링캠프 초청 선수로 시범 경기 동안 팀에 합류시켜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규는 스프링캠프도 퓨처스 선수들과 함께 해야 했고, 좋은 기량을 선보임에도 여전히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한 채 퓨처스리그에서만 뛰고 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아무리 이병규가 타율 4할 이상을 기록해도 퓨처스 성적은 퓨처스 성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다. 퓨처스리그엔 4할 타자가 즐비하다. 신뢰성 있는 지표라고 보기도 힘들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와 기존 프로선수들의 기량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 퓨처스 성적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이유다. 또한 1군과 퓨처스 사이에 존재하는 클래스 차이 역시 부인할 수 부분이다.
‘적토마는 달리고 싶다’
LG 1군 양상문 감독은 젊음과 혁신을 선택했다. 팀의 리빌딩도 그 일환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이병규는 팬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히고 있다.
지미 롤린스는 지난 200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빅리그에 데뷔한 메이저리그 17년 차 선수다. 필라델피아에서만 15년을 뛰었고. 2007년엔 내셔널리그 MVP까지 거머쥐었다. 총 네 차례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공·수를 모두 겸비한 최고의 타자로 살아왔다.
그런 롤린스가 2월 23일 마이너 계약을 맺자 많은 이가 놀랐다.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낸 그가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마이너 계약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주전 유격수 알렉세이 라미레즈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떠난 가운데 화이트삭스는 롤린스를 좋은 대안으로 여겼다. 그렇다고 주전 보장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주전 자릴 차지할 수 있었다.
화이트삭스는 롤린스가 타자 이전에 젊은 선수들에게 기술적인 조언과 인생 상담까지 해주는 멘토 역할을 담당하길 기대했다. 많은 팀이 리빌딩 과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을 영입하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 선수들에게 롤린스만큼 다양한 경험을 나눠줄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그렇게 서로 경쟁하고 배워가는 것이다. 2천500안타에 58개만을 남겨둔 롤린스. 기록을 떠나 아직 은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규 역시 은퇴를 논하기엔 아직 합당한 명분을 아직 찾지 못했다.
지난해 이병규는 커리어 최악의 부진(타율 .219)을 경험했다. 3년간 맺은 총액 25억 5천만 원짜리 계약 역시 올 시즌으로 모두 끝난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아직 우승 반지를 껴보지 못했다.
‘I was born to love you(나 그대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이병규가 타석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I was born to love you’가 흘러나온다. 영국의 록밴드 '퀸'의 히트송이다. 노래 제목처럼 LG 팬들을 위해 태어났던 이병규다. 노래의 마지막 가사처럼 이젠 팬들이 그를 사랑해줘야할 때다.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바로.
‘Yeah, give it to me(나를 사랑해 주세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