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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가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모하게도 기회주의자인 카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모으시는 주님>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에제 37,21ㄴ)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요한 11,52)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입니까?>
사순시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주간이 목전입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런저런 보속이나 결심을 계획했었는데, 결과가 만족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과 생각만 앞섰지,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서 너무 부끄러운 분들, 지나치게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성주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일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죽음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럴듯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물이 아쉬운 분들, 성주간 동안 딱 한 가지만이라도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교회가 강조하는 세 가지 측면,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단식은 그 자체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와 단식의 결과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더이상 세상에 안계시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분,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1939~2003)이십니다.
총칼이 난무하던 군부독재자 시절, 모두가 숨죽이고 엎드려 지내던 혹독했던 유신 시절, 공개석상에서 긴급 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을 크게 외치셨습니다.
5공 시절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은폐 조작된 것임을 만천하에 외쳐 6월 항쟁의 단초를 마련한 분도 김승훈 신부님이셨습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던 시대, 김승훈 신부님께서는 용기를 내셨습니다.
그로 인한 체포와 투옥, 고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민주화의 희생양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시고 나서야 밝혀진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살아생전 신부님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저런 물질적인 도움, 정신적인 도움,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평소 신부님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늘 없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 수배 대상자 학생들, 가난한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손을 벌리니 돈이 남아 나지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남의 빚보증 서 준 서류만 잔뜩이고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는데 가장 큰 도전은 재정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로 회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분이 김승훈 신부님이었답니다.
도움은 물질적인 도움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당시 수많은 단체에서 신부님의 이름을 요청할 때 기꺼이 서명해주셨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임이나 집회 장소를 못 구할 때는 기꺼이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던 성당을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주곤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미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신부님 곁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찰하는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는데, 신부님께서는 그들까지 살뜰히 챙기셨습니다.
정말이지 품이 넉넉한 큰 어른이셨습니다.
손톱만한 작은 나눔이나 희생도 뻥튀기처럼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드시는 김승훈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처럼 소리소문없는 자선과 희생,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이요 단식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 관여하시는데,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 문제, 그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다.”
(김승훈,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 최고의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표징’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일들을 일으키신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에게 큰 손해가 생길까 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전과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 하지만, 그자들은 마음속으로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이 진짜로 지키고 싶어 한 것은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요한 5,42)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요한 8,42-44ㄴ)
그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했던 자들입니다.
2)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희생’은 원래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 쪽에서는 ‘희생’이 맞지만, 카야파와 최고의회 쪽에서는 ‘살인’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가 자기는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지도자가 독재자입니다.
정치 지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있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 함께’ 희생하자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희생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어떤 공동체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 시키기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3) 카야파의 말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복음서 저자의 해석이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예언입니다.
카야파와 최고의회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고, 그 희생 덕분에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섭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4)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말을 카야파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5,38-39)
이 말은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서 한 말인데,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면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애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에는 가말리엘이 최고의회에 없었을까?
있었다면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그는 분명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최고의회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5)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내린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불법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은 폭력에 의한 살인이고, 그 ‘살인죄’에 대한 책임은 그들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연은 없다” -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회개하라. 살리라.”
(에제 18,31ㄱ.32)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많이들 아프고 병든 모습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적습니다.
정말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방황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가 따릅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역시 답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 새롭게 눈에 띈 말마디들이 고마웠습니다.
서울 이경상 주교의 문장이 확정되었고 사목표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Vivere In Corde Jesu)”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목 표어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 성심으로 살고 싶음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세상과 벽을 쌓는다면 갇혀있는 나와 마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지겹다면 오히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루 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면 무지렁이로 끝날 뿐이다."
- 다산
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사 추기경의 다섯 번째 사순강론 성서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고 청중 맨앞 한복판에 경청하는 교황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누구든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누구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웅변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 섭리의 결과요, 신의 한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곤 도대체 해명될 수 없는 공동체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요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수도공동체 삶을 “렉시오디비나”했을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넷으로 요약되는 하느님 섭리의 깨달음이요, 지금도 이런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서 진행된 수도원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하느님의 섭리”였고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은 잠시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8)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좋고 나쁜 모든 일 안에,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 속에도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삐뚤빼뚤한 선 위에서도 반듯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사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모범적 섭리의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중에 말씀하시지 않지만 대사제인 카야파가 우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입니다.
이래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안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시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굳게 믿으며 묵묵히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어 당신 몸의 성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삶의 일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구원 섭리의 원대한 꿈의 실현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대로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참 좋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예레 31,10ㄹ)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의 후일담입니다.
그 일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 표징보다 적대 세력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럴 수밖에요.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문제, 즉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운운하며 자기들의 불안을 민족적 운명으로 확대하고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공격욕구를 합리화합니다.
그때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요한 11,50)
가야파의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요한 11,51)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는 그 자신도 의도치 못한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울 한 쪽 접시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인류를 올려놓고, 다른 한 쪽 접시에는 예수님을 올려 놓은 채 평형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미치광이 몽상가 죄인일 뿐이라고 규정해 놓고서도 대사제직에 부여된 영의 뜻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단순히 로마인들의 비위를 맟추기 위한 희생양 정도가 아니라, 죄악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고귀한 죽음이 될 것임을, 자기도 모르면서 고백한 셈입니다.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 주시는 새 희망이 울려퍼집니다.
"한 임금, 유일한 목자."
(에제 37,22.24)
주님께서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그분 종 다윗을 이을 새로운 통치자는 가야파 입을 통해 발설된 "한 사람",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에제 37,23.27 참조)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계약의 말씀이 다시 갱신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시리라."(에제 37,23)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 가운데의 성전 안에 현존하시리라는 이 약속은 마침 오늘 복음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관습에 잘 드러나 있지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요한 11,55-56)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새 계약은 이렇듯 유다인들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온 백성, 온 인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육체와 신분, 이스라엘에게만 부여된 듯 자부했던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요한 4,21.23)
유다인들이 사유화했던 정결례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하느님 현존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제사를 통해 그분 이름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나 확장되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이 오히려 영의 자유로운 활동과 믿는 이들의 헌신으로 부활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파스카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잠시 숨을 돌리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유혹과 어둠의 시간을 예수님 수난과 발맞추어 성실히 완주할 수 있기를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 북돋워 주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벗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최근에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싱크대에 있는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난 것입니다.
원인은 분쇄기에 음식물을 아예 넣지 않고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식이 되면서 하수관도 부식되어서 잘못하면 물난리가 날 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도 동생 수녀님이 가끔 관리를 해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디지털의 세상에 살면서 여기저기 비밀번호를 지정하게 됩니다.
자동으로 기억하게 해 놓지만, 나중에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주 사용해야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교회가 매년 이렇게 ‘사순시기’를 전례 안에서 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죄인인 나를 위한 헌신과 희생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이 꺼지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에 원인을 찾아보니 원인이 엄청 많았습니다.
배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용량의 초과일 수도 있고, 시스템의 오류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손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저의 능력을 벗어난 것 같아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의외로 쉬운 방법을 알았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스마트폰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보험처리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새 스마트폰이 오면 자료를 옮기면 된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기종을 휴대하기 편해서 접이식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열게 되니 접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사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찰, 회개, 결심, 고백, 보속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권리를 주기도 하지만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4가지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입니다.
저는 30개월의 군 복무를 다 하였습니다.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해서 교구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기에 자녀를 교육할 의무에서는 제외되지만, 교구 성소국장으로 지내면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33년 동안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을 더하면 저도 직무에서는 배제되는 원로사목자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아는 율법학자라고 해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사제라고 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다짐한 바리사이파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구원은 능력과 직책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선행을 통해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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