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시민 서가 1호, <신정일의 서가> 서가지기의 꿈과 소망
[인터뷰] 3만 권의 책이 숨 쉬는 집, 제1호 전주 시민 서가를 찾아서
어릴 적 동네 만화방을 자주 찾았다. 재미있는 만화책을 읽으며 웃고 감동하고, 이야기에 푹 빠져들다 보니 신간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그 설렘이 참 좋았다. 만화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린 나에게 만화방은 또 하나의 '집'과 같은 공간이었다.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는 시간이 흘러 글과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 되었고, 산책길에 우연히 들른 동네 서점에서는 삶의 소중한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서점의 이야기를 전하는 라디오 DJ를 했고, 도서관 서포터즈와 관련 일을 거치며 어느덧 책과 사람을 잇는 사서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
돌아보면 내 삶에는 언제나 책이 있는 공간이 함께했다. 만화방에서 시작된 책과의 인연은 서점과 도서관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책의 즐거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내게 또 하나의 특별한 서가가 있다. 바로 ‘전주 시민서가’다. 개인의 서재를 시민과 공유하는 뜻깊은 프로젝트로, 그 첫 번째 공간에 신정일 작가의 집이 선정되었다. 도서관 못지않은 3만여 권의 장서가 빼곡히 들어찬 집. 오랜 세월 한 사람의 삶과 함께해 온 책들이 시민들을 맞고 있다.
한 사람의 집이 모두의 서가가 되기까지, 그 공간을 가꿔온 서가지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1. 서가지기 소개 : 안녕하세요, 선생님. 인터뷰를 읽을 시민분들께 선생님과 지금 계신 이 '집'에 대해 가볍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진북동에 자리한 <신정일의 서가>는 저의 집이자,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제외하고 전부 책으로 채운 작업실이자 도서관이며, 박물관입니다. 제 영혼 속 켜켜이 쌓인 추억들이 진열된 박물관이자, 온몸으로 체감한 삶의 경험과 한(恨)을 글이라는 매개체로 풀어내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며 가장 편히 쉬어가는 휴식처이기도 합니다.
Q2. 집의 의미: 선생님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인가요? 이 집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들려주세요.
송기원 시인의 <꽃밭을 지나며>와 <다시 꽃밭을 지나며>에는 "이렇게 예쁜 꽃들이 그들 몰래 피어 있다니", "이렇게 예쁜 꽃들이 그들 몰래 시들어 버리다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에게 이 수많은 책은 곧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들과 같습니다. 이 집엔 시들지 않고 언제나 생생하게 피어 노래하고 웃으며 말을 건네는 수만 송이의 꽃이 피어 있습니다. 혼자만 간직하기엔 너무나 아까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소개하고 싶은 보물들이지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집을 지키는 이 책들에 파묻혀 사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이 생생하고 행복한 공간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Q3. 시민 서가의 시작: 1970년대부터 수집하신 3만여 권의 책과 오랜 세월이 담긴 사적인 집을 '전주 시민 서가'로 세상에 개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곳에는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허균의 <성소부부고> 김시습의 <매월당집> 헤로도토스의 <역사> 사마천의 <사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니체, 카프카,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등 오래된 고서들, <문학사상>을 비롯한 수많은 잡지의 창간호, <뿌리 깊은 나무>, 그리고 <민음사 세계 시인선>,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의 시선집 1번부터 차곡차곡 모아둔 희귀본들이 가득합니다.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류의 보물들이지요. 이 소중한 책들을 시민들과 나누고자 전주시와 뜻을 모았고, '전주 시민 서가 1호'로 지정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매달 세 번째 수요일에는 시민 강의를 열고, 학생들이 찾아와 호흡하는 탐방 공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Q4. 책과의 인연: 언제부터 이렇게 책을 모으기 시작하셨나요? 수만 권 중 가장 먼저 사셨던 책이나, 방문객에게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특별한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열일곱 살 무렵, 임실의 작은 마을에서 암울한 청년기를 보내던 때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빌려 읽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라는 첫 줄에 완전히 사로잡혔지요. 그 책을 통해 데카르트와 카프카를 알게 되었고, 어머니를 설득해 겨우 얻은 돈으로 전주 문성당 서점에 달려가 그 책을 직접 샀습니다. 이어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읽어나갔지요. 방황하던 청춘의 날, 지금은 치즈마을로 이름이 난 중화성리에서 걸어나와 임실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전주역에 도착해, 문성당 서점에 가서 품에 안았던 그 책들을 지금도 바라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고 서늘해집니다. 자살을 말하던 책이 역설적으로 저를 살려준 셈이지요.
Q5. 과거의 서가: 선생님의 어린 시절에도 지금의 시민 서가처럼 마음을 쉬게 하는 '집' 같은 공간이 있으셨나요?
아쉽지만 없었습니다. 옛사람들의 공부법에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읽을 책도, 마음 편히 쉴 공간도 마땅치 않던 시절이라 그저 산과 들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온 산천이 곧 안락한 도서관이자 박물관이었던 셈이지요.
어린 시절 나를 오롯이 품어줄 집이나 서재가 없었기에, 오랜 세월 가꿔낸 이 공간이 더욱 각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 집이 나만의 울타리를 넘어,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하고 안락한 품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Q6. 가장 아끼는 공간: 이 집 안에서 선생님이 가장 애정을 느끼고 자랑하고 싶은 구석이나 책장은 어디인가요?
작업을 위해 컴퓨터 책상에 앉았을 때 손길이 닿는 책장을 좋아합니다. 평생 마음으로 섬겨온 스승(私淑)들의 책이 꽂혀있지요. 니체, 카프카, 장 그르니에, 카뮈, 노발리스, 플라톤, 베르그송부터 열자, 장자, 공자, 소크라테스, 스피노자,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한국지명총람>까지. 언제든 펼쳐보고 싶은 책들이 나를 지긋이 응원하며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를 가장 아낍니다.
Q7. 삶을 대변하는 책: "집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이 집과 선생님 자신의 삶, 혹은 살아오신 가치관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책 한 권을 꼽으신다면 무엇인가요?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책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1981년, 간첩혐의를 받고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몸과 영혼이 멍든 채 돌아왔을 때 읽은 책입니다. 소록도 나환자촌을 배경으로 한 그 소설 속에서 운명 같은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절망의 늪에서 깨달았습니다. 실천 없는 사랑과 자유는 허사라는 것을요. 내 가슴속에서 '실천적인 힘'이라는 불꽃이 꿈틀거렸고, 1985년 전두환 정권 당시 주저 없이 문화운동을 시작하며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다시 살게 한 문장입니다.
Q8. 공유의 가치: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었던 집을 타인에게 열어두면서 새롭게 느끼게 된 '공유의 가치'나 보람은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제 꿈은 집 안 모든 방에 책을 가득 채우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책 무게 때문에 하중을 걱정하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요.(웃음)
그렇게 내 집에 가득 차 있는 책을 보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전주 시민들의 집, 나아가 모든 국민의 집마다 저마다의 작고 예쁜 서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나 아이의 이름을 딴 서가를 만들고 책을 나누는 문화가 시작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공유가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변화일 것입니다.
Q9. 공간의 부담감: 서가에 책이 점점 늘어나고 방문객이 오가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삶의 공간이 줄어들거나 느낄법한 불편함/두려움은 없으신가요?
책은 계속 늘어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한 공간이 있고, 강연에서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분들을 만나는 기쁨이 커서 불편함은 없습니다. 훗날 책이 더 늘어나 큰 공간으로 옮겨가야 한다면 그때 결정하면 됩니다.
니체는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공식으로 '운명애(Amor Fati)', 즉 필연적인 것을 감내하고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삶의 모든것이 운명이었습니다. 그 운명을 사랑하기에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누리고 있습니다.
Q10. 미래와 확장: 앞으로 이 시민서가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온도를 지닌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라시며, 어떻게 꾸며가고 싶으신가요?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운명, 나아가 나라의 운명도 바꿉니다. 어린 시절(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장덕조의 <광풍, 계유정난에서 김시습을 다룬 소설>이나 청소년기 읽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헤세의 <싯다르타>가 나를 키웠듯, 이곳을 찾는 이들도 삶을 살찌우는 진짜 좋은 책을 만나길 바랍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평생 우리 땅을 걸으며 쓴 <신 택리지>(전 10권)를 품어낼 '택리지 도서관'을 만들어 우리 국토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입니다. (끝)
사실 이곳은 오랫동안 내가 살아온 집이자 아버지의 서재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려준 신정일 작가는 다름 아닌 내 아버지다. 돌아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게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언제나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집 안 곳곳에 책이 쌓여 있었고,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어린 나는 그 책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공부에도 흥미가 없었고, 아버지의 책보다는 만화책이 훨씬 좋았다.
그런 내가 자라서 서점을 찾아다니고, 도서관에서 일하며, 책과 사람을 잇는 일을 꿈꾸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서점과 도서관을 좋아했던 이유도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그 풍경 때문인지 모른다.
아버지의 책으로 가득했던 집에서 시작해 한참을 돌아 다시 책이 있는 공간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제 아버지의 집은 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시민 모두의 서가가 되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가 모아온 책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어린 시절 만화방이 나에게 또 하나의 집이었듯, 아버지의 서가도 누군가에게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2026년 10월 17일,
이 인터뷰는 2026년 9월 딸 나라와 나눈 대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