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청상과부 백선행 이야기♠️
옛날 평양에 열여섯살에
과부가된 여인이 있었다.
이 처자는 1848년 평양의 이름없는
촌부 백지용이라는
사람의 맏딸로 태어났다.
백지용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런 소녀 백씨는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홀어머니손에 자라
열네살에 안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간지 2년만에 병약했던 남편이 죽자
“남편잡아먹은년”
이라고 시집에서 쫏겨 났다.
친정으로 돌아온 16살소녀
백씨는 친정엄마와 함께
쌍과부가 되었다.
그로부터 먹을것 안먹고 입을것
안입고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그가 26살 되던해 친정엄마 마져
세상을 떠나갔다.
“너는 똑똑한데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다 ”
라는 말을 남기고 ...
그때 친정엄마가 물려준것은
현금 천여냥과 백오십냥 짜리
집한채가 전부 였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이 몰려와
부모 제사를 모실려면 아들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야 한다해서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사촌오빠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오빠가 전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다.
그래서 스물여섯살에 빈털터리가
된 백과부는 다시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다.
이때부터 환갑때 까지
"평양의 백과부"로 불렸다.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이십리나 떨어진 시장에가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와 돼지를 길렀으며
남들이 먹다버린 복숭아씨를 모아
시장에 내다팔고 콩나물 장사도 했으며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했다.
이런 백과부를 두고 사람들은
“악바리 백과부,지독한 백과부”라 불렀다.
때로는 홀아비들이 찾아와 같이 살자고
우격다짐으로 데려 갈려고도 했고
또 아직 나이젊은데 첩실자리가 있으니
팔자 고치라는 회유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시정잡배 들에게 끌려가
치도곤도 많이 당했다.
그러나 백과부는 꿋꿋하게
열심히 일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았으며
남의 궃은일에는제일먼저 달려가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백과부를 좋아했고 백과부가
하는일은 모두 도와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백과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고 탐관오리 평양 부윤이
그를 불러 재산을 바칠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백과부는 죽으면 죽었지
이유없는 재산은 못 내놓는다고 버티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생사람 잡지 말라고
상소를하며 동헌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탐관오리 평양부윤은 어쩔수 없이
그를 풀어 주었다.
그렇게 번돈으로 백과부는 땅을 샀다.
그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대여해주고 소작료를 받아
다시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당시 돈있는 사람들은 고리대를 이용해서
쉽게 재산을 늘렸지만 백과부는
그렇지 않았다.
옛말에 덕을 베풀면 복이 온다 했던가요?
그동안 많은 덕을 베푼 백과부에게도
복이 찾아 왔다.
지금까지 악착같이 벌어온 돈을
10배로 늘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백과부는 일본에서 건물을 지을때
시멘트로 짖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일본놈이 가지고 있던 대동강 근처에 있는
만달산을 싼값에 구입 했다.
만달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산이지만 몽땅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일이 그녀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얼마후 시멘트가 대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면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가득한 만달산을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되팔았다.
그렇게 부자가 된 백과부는 1908년
환갑을 맞아 대동군 고평면 고향에
커다란 다리 하나를 놓았다.
이 동네는 마을 중앙으로 큰 냇가가 있어
평소에도 물이 많아 잘 건너지를 못했는데
이곳에 큰다리를 놓으니 마을에
큰 경사가 아닐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백과부를 크게 칭송하자
“돈이란 아무리 아까워도 써야 할곳엔
꼭 써야 하지요” 란 말만 했다 합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백과부”를
“백선행”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선행"은 이름도 없던
백과부의 이름이 되었다.
그 뒤에도 백선행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많은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또 배우지 못한 어머니의 한이면서
자신의 한이었던 학교를 세우고
또 장학 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평양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가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하자고 하자
현재 가치로 150억원 상당의
공사비와 운영자금을 제공했다.
그래서 이때 지어진 공회당이
지금의 이 되었다 합니다.
1933년 5월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때 35만원(현재가치350억원)의
재산은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진 백선행의 장례식에는
1만여명의 인파가 운집했으며
수백수천명이 상복을 입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300개가 넘는 화한과 만장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평양 백과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합니다.
열여섯 앳된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한 그녀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그녀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은 수백수천을
헤아렸고 평양시 전체가
그를 애도했다 합니다.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수 있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부자였답니다.
돈이란 버는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사람의 인품이
평가되는 것이라 생각 됩니다.
그래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
라는 속담이 있지않나 합니다.
돈을 벌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고난을 구분하지 않고 벌지만 막상 그돈을
쓸때는 꼭 필요한 곳에만 써야되며
만인에게 기뿜과 도움이 되여야 하는
씀씀이야 말로 정승같이 쓰는돈이
아닐까 하나이다.
千備錄 천비록.
카페 게시글
이종선의 글
♠️16살 청상과부 백선행 이야기♠️ (이문재 제공)
이종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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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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