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추억은 뒷산, 앞뜰이 모두 놀이터요. 장난감이자 운동장이요. 인생공부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뜰은 먹고 사는 생존의 현장이었으니 이른 봄 논갈이 심부름, 모내기부터 나락 타작, 늦가을 보리를 심고 겨울 보리밟기까지 1년 내내 헤집고 다녔으니 발 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뒷산은 소 깔(표준말로는 꼴이란다)을 베러 이 밭둑, 저 밭둑은 물론 땔감을 구하러 삼인산, 대절터, 만지산 등 이 산 저 산을 10리도 넘는 산길을 지게를 지고 자작개비며, 소나무잎이며, 나무장작을 구하러 다녔는 데 산성은 가까운 곳이요. 멀리는 춘양 대신리 마을 가까이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가족의 일원으로 나름 열심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제 몫을 하는 것을 보고 부모님은 대견해 여겼을 것이고....
예쁘장한 정숙이 친구는 초등학교 때 광주로 전학갔는 데 방학 때 가끔 고향에 와서 우리들과 함께 뒷산 너머로 땔감을 구하러 가서 땔감을 머리에 이고 경사진 길을 내려오며 당황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봉산성 가는 길은 예전에는 마을 뒷산 삼인산을 지나 능선을 타고 비봉산성으로 가거나 서낭당, 벼락바위를 지나 장군재를 통해 가곤 했는 데, 재와 산성 사이에 제법 왕릉처럼 우뚝 솟은 흙무더기가 있는 데, 어른들은 이것이 말무덤이라고 하셨다.
그랬을 것이다. 언젠가 왜구의 침략으로 피나는 전쟁을 했을 것이고, 참혹한 전쟁 끝 널부러진 사람들 시체와 말(馬)의 사체를 묻었는 데, 말의 무덤은 큰 흙무더기로 남아있고,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의 작은 무덤들은 세월에 씻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60을 바라보는 지금, 한실마을에서 비봉산성으로 이어지는 여러갈래 길은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 능주 남정리 양복사에서 비봉산성을 향해 올랐다.
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완만하다. 절입구에서 10여분 올라가면 큰 느티나무가 있는 데 이 곳이 대절터이다. 큰 절이 있어서 대절터라고 불렀는 데 주춧돌이 남아있고, 느티나무는 훌쩍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있다. 우물은 아직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고, 이 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시절이 그립다.
등잔밑이 어둡다던가. 대한민국의 내놓아란 산들을 많이 탐방했지만 마을 뒷산의 비봉산성은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심하다. 실제로 비봉산성 길은 마을에서 이어진 길은 오래도록 끊겨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진도의 남도석성, 용장산성, 담양 금성산성, 순천 낙안읍성과 왜성, 고창의 모양성, 진주 진주성, 부산 동래성, 금정산성, 서산의 해미읍성, 광주 남한산성, 수원의 화성, 서울 북한산성 등 여러 지역의 산성들을 다녀보았지만 능주도곡의 비봉산성, 춘양 예성산성, 한천 금오산성, 동복 철옹산성, 동면 오성산성 등 한 고을에 산성이 5개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그만큼 이 지역은 물산이 풍부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고장으로 멀리는 청동거울, 청동기 칼, 청동기 말주령 등 청동기 유물이 마을에서 발견하고 그 시대 무덤인 큰 돌무덤들이 지천인 곳! 내 고향이 그곳인 것이다. 대절터에서 잠시 쉬면서 후배가 가지고 온 따뜻한 커피와 귤을 먹고 비봉정(정자)으로 향했다. 비봉정은 대절터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양지바른 곳에 있다.
정자에 올라 능주마을을 내려다본다. 향교, 옛 동헌 입구인 죽서루, 면사무소, 영벽정, 내가 다녔던 능주중학교, 새로이 단장한 능주고교, 조광조 유허비 등이 한 눈에 펼쳐졌다.
조선 중기 중종 때 개혁을 외치던 조광조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39살에 파면을 당하고, 능주에 유배를 왔으며, 유배온 지 25일만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 데,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서 있다. 중학교 다닐 때 매일 이 곳을 지나쳤는 데, 역사의 소용돌이가 능주까지 밀어 닥쳤던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