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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5,1-39>
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3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7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8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10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군중에게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13 그러자 군중은 거듭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5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말하였다.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기쁨이 충만해 있습니다.
“호산나” 하고 외쳐대는 군중들의 환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호는 일시에 지나가고, 수난과 죽음의 비탄이 젖어듭니다.
환호와 환영의 축제 행렬은 이제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뀝니다.
축복의 성지 가지는 저주의 채찍이 됩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갑니다.
나귀 위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십니다.
왕으로 떠받들어져 성 안으로 모셔졌던 그분은 마침내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그래서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은 두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주님 성지 주일>이면서, 동시에 <주님 수난 주일>이라 불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 수난 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를 들려줍니다.
오늘 제2독서는 주님 성지 주일의 특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찬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전한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해서 당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비의 일면을 알아챘을 때에도(1,34; 3,12), 당신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도(9,9)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비에 가려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드러나는 부분이요(14,1-52), 둘째 부분은 다른 등장인물들, 곧 성전경비병, 군중, 대사제, 다른 유다인들, 빌라도와 그의 군인들이 등장하는 부분입니다(14,52-15,41).
이제 메시아의 비밀은 오늘 복음인 이 수난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신비의 전모가 폭로되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을 때 생긴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마르 15,38)
그렇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가리고 있던 비밀의 장막이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감추어진 베일을 '찢고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그분을 감추고 있던 신비의 베일을 벗겨줍니다.
바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바라봄’, 이 ‘발견’에 대한 놀라움에서, 예수님 수난의 극적인 사건은 비로소 신비롭고 경이로운 기쁨으로 번져갑니다.
결국 마르코복음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이 ‘발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발견’은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 감독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본’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마르 15,39)
이제 ‘십자가의 무력함’은 ‘전능함’으로 바뀌게 되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대체 백인대장은 이 나약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바보같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본 것일까?
사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이 아닌 시작을 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봅니다.
실패가 아닌 승리를 봅니다.
곧 그는 나약함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신적 권능을 봅니다.
전능함이 무력함 안에서 이루어짐을 봅니다.
약함의 어리석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권능을 봅니다.
어둠 가운데서 오히려 빛과 사랑의 무한함을 봅니다.
죽음을 건너간 사랑을 봅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 ‘찢어진’ 자리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자신을 바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을 보았습니다.
죽음은(십자가는) 언제나 모순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 모순은 찢어졌고, 아니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에 지배당하면서도 오히려 죽음은 찢어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사랑의 장소가 되고. 구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메달리신 분이 구원자 메시아임을 봅니다.
그리하여 외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마르 15,39)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이 ‘나약함’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찢어질 때입니다.
우리네 세상의 기준이 찢어질 때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찢어지고, 사랑에 눈을 뜰 때입니다.
사랑을 바라보게 될 때입니다.
사랑으로 바라볼 때입니다.
바로 그 모순과 화해할 때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십자가의 이 ‘무력함’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는 비결이 됩니다.
진정 자유로워지는 비결이 됩니다.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해방인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내 자신이 찢어지는 것이요, 내 의식의 장막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묵묵히 나약하고 어리석게 죽어간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비 앞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내놓고 죽는가?
그 바람에 찢어지고 있는가?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찢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지박살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 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 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의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길 희망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도 항구하길 기도합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 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르11,1-10)
정말 군중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아 놓으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 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묻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르 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4) 하고 외쳤습니다.
열렬히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만 반복하였습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주었습니다(요한 15,15)
소신 있게 판결해야 함에도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 정치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 15,31-32)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기에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진실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엉뚱한 구설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침묵하고 그저 그 뜻을 살아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고서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 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 시편 22,2)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8) 하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내려놓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거룩한 교환: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증거>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일과 같습니다.
종이에 성체가 피로 변해 스며든 카시아의 성체 기적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스며드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에덴 동산에서 가죽 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기기만 하면 상속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무언가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당신 인성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 겉옷을 깐 이유와 같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환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사야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에도 나와 있고, 신약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 8,9)에도 잘 표현됩니다.
가장 완전한 거룩한 교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육화론 54,3)라고 표현했고, 성무일도 제1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 제2 저녁기도, 후렴 1에도 위 교부들의 신학을 받아들여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에 있어 병자 성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을 처음 본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노란색이었고 얼굴은 부어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눈동자는 거의 흰자만 보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병자 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저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으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으려면 상대의 바이러스가 내게 옮겨올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뭔가를 주려면 필연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거룩한 하느님께서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인성을 받아들이신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인간의 인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성과 죄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 하느님 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앉아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저에게 푸르고 맑은 물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또 저에게서는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교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상황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라고 하신 어머니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바라며 경찰서로 휠체어를 타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십시오.
저도 채변 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냥 아버지라는 이유로 손과 옷에 똥을 묻혀가며 그 봉투를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거룩한 교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토요타 차량을 리콜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토요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제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비웃은 함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물의 겉옷으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분을 덮어드려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갈 동물을 선택하시는데, 엄청 웃깁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이왕이면 좀 있어 보이게, 코끼리 정도는 타고 들어가시면 참 좋았을 텐데. 코끼리가 아니라면 키 큰 낙타나 멋진 백마 정도는 괜찮았을 텐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지만 그 모습이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합니다.
생긴 것도 생뚱맞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그분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세와 능력긍 겸비한 초강력 세속 왕권을 학수고대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감에 ‘빅 엿’ 하나를 제대로 먹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셨습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머릿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의식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따뜻이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 사이로 내려가야 하고,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가시는 곳마다 백성을 웃음의 도가니, 그리고 감동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와 마주 앉아 썰렁한 아재 개그를 연발하시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 주일, 성주간>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많은 이’ 라는 말이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의 무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제자들의 무리’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행렬은 최고의회나 로마 당국에서 주목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니, 소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요한 12,16)
2)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의 앞뒤에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서 예수님의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입성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고, 재판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자들은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은(마르 15,11) 예루살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배반자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쪽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의 상황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마르 14,66-72),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서 숨어버렸고(마르 14,50), 신자들도 흩어져서 숨었거나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호산나!’를 외치다가 태도를 완전히 바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겁에 질려서 흩어져서 숨는 것과 배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모두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재현하고 묵상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과 헌신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성주간 예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성주간의 의미를 묵상하지 못하고 피곤함만 느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예수님 수난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 전례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전 과정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상(感傷)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고, 또 부활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5)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십자가의 길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고통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방법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기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는 생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믿음, 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희망과 기쁨이 생기고, 그 희망과 기쁨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사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한결같음이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그림과 더불어 위 짧은 말마디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깊은 내공의 믿음을 반영하는 한곁같음입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와 더불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산 어른의 다음 3월24일 오늘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마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 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늘 가톨릭신문 글로벌칼럼란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한 로버트 미켄스의 글에서도 교황님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 계속 전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나이들면서 건강 약해져도 오히려 더 큰 결단 보이는 중, 반대 세력과 급진 세력 모두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주눅들지 않고 교회 이끌어”
이런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미소띈 얼굴 표정을 짓는 교황님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가톨릭신문에서 소개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가톨릭교회 26분의 사제와 사제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한 3분 사제 역시 한곁같은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은 흡사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때 장애물 경기는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요!
일상의 삶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온갖 지혜와 용기로 타개해 나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신망애 정주의 삶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성지주일부터 시작된 성주간은 가톨릭교회에서 파스카 신비가 실현되는 절정에 속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성지주일의 긴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한결같음이 어둠을 밝히는 빛같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한결같이 제 강론을 올려주는 형제의 댓글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마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전날 하루의 성찰과 고백과 감사와 찬미의 삶의 결정판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니다.
항상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 한줄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멘.”
어둔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님이 참 경이(驚異)롭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세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덕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중에도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전개된 수난복음의 목차를 정리해봤습니다.
<마르14,1-15,47>
1.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2.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다
4.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5.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6.성찬례를 제정하시다
7.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8.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9.잡히시다
10.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11.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2.예수님을 조롱하다
13.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4.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숨을 거두시다
18.묻히시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과 수난을 겪어낸 주님의 한결같이 깊고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산나!" 당신을 환영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침에도 한결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상시 참으로 듣고 배움에 충실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종이 고백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한결같이 듣고 배우는 공부에 충실하셨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어 제2독서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또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토요일 제1저녁 기도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복음의 요약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하느님 향한 사랑의 비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백인대장의 다음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앞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더불어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수난복음 마지막 묘사,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여인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수난복음의 누구에게서 나의 얼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수난복음에서는 물론 평생 삶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비움이 파스카 신비의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어떻게?”
저는 셋을 권합니다.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주님처럼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닮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열렬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처럼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한결같은 배움과 비움, 닮음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의 감동적인 두 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본당의 물품과 자기의 물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어서 찾아보니 형제님이 자기 집 일에 쓰려고 잠시 가져갔다고 합니다.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학교도 나오고, 말도 잘 하는데 셈이 좀 흐린 것이 늘 문제였습니다.
먹는 자리, 생색이 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힘든 일, 봉사하는 자리에는 늘 이유가 있어서 빠지는 분이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늘 밝아서 좋긴 하지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아파트 단지에서는 비난 받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면 성당 밖에서도 신자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겉과 속이 다른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먼저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지나간 자리는 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뒷수습이 힘들었습니다.
솔선수범하고, 추진력이 있어서 좋았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나친 음주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고, 봉사도 잘 하는데 그만 술이 과하면 사람이 변하였습니다.
술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사람이 술을 위해서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사제관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자전거를 타고 성당으로 왔습니다.
성당의 문을 다 닫고, 하수구에 있던 오물을 다 꺼냈습니다.
그리고 성모상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33년이 지났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방앗간을 하면서 설날이나 추석이면 어르신들을 위해서 떡을 드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주는 형제님이었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면장님이 그 형제님을 위해서 표창장을 준다고 제게 연락해서 알았습니다.
말보다는 늘 먼저 봉사하던 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동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본당을 지켜 주시던 어르신이 있습니다.
성탄에는 손수 새끼를 꼬아서 구유의 지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가 어디를 다녀 올 때면 잘 다녀왔는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르신의 집에는 늘 기도의 향내가 났습니다.
집 안의 중심에는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하도 읽어서 낡고 낡아진 성경책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앞장서서 힘을 보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아픈 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비자 인도를 많이 하셔서 대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을 실천하는 분이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을 33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런 분들의 기도와 봉사 그리고 헌신과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종종 봅니다.
늘 모범생이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고,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는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길을 지나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십자가를 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성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갑자기 아프시거나, 여행을 가게 될 경우가 있죠.
그럴 때 보좌신부는 본당 신부님이 하셔야 할 미사를 하게 되고, 여러 단체의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는지, 아니면 의무감으로 하는지, 저 자신을 돌아보면 기쁜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의무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 6처는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 씻어 드림을 묵상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내용은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까는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기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 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까로 알려졌는데, "베로" 는 라틴어로 "베라"(참 진실한) 이고, "이까"는 "아이콘" 즉 성화상을 뜻하므로, 그녀의 이름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 이란 뜻이 됩니다.
이 사건 이후 그녀의 운명은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전설로 전해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드리면 좋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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