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월광사지에서 월광태자를 만나서 월광소나타를 듣다.
“가야산의 경치가 세상에 가장 빼어나니
천년 세월 고운(최치원)에 짝할 이 없네.
내 따르고 싶어도 끝내 이루지를 못해
남긴 계원팔경만 그저 읽었네.
고운의 자추릴 자세히 찾아 돌아오거든
그대여. 티끌진 나의 가슴을 씻어주오..
아, 고운 고운은 천년 세월의 학이라
그대 가는 것 보러 높은 누각에 기대네.”
고려 말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권사관을 전송하는 시로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데, 가야산에서 신라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을 그리워 하는 시이다.
예로부터 가야산은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88고속도로의 해인사 IC에서 나가 해인사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조그마한 산 기슭에 있는 절이 월광사라는 절이고, 그곳에 월광사터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벗과 헤어지는 낡은 다리 위 두 그림자 앞뒤로 나뉘어졌네.
경을 보는가, 솔 그늘에 높았다 낮아지는 글 읽는 소리
그림처럼 깨끗한 산천을 두고
세월따라 저 나무 늙어가누나.“
고려 말에 삼은 중의 한 사람으로도 알려진 이숭인李崇仁이 노래한 이 절은 가야왕국의 월광태자가 지었다는 절이다.
그토록 번성했던 대 가야가 역사속에서 사라진 것은 562년이었고, 그 날의 역사를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 진흥왕 23년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토벌토록 하고, 사다함斯多含을 부장으로 삼았다. 사다함은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들어가 흰 깃발을 꽂았다. 이것을 지켜 본 성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이에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서니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대 가야의 마지막 태자가 월광태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지막 왕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었다는 설, 또는, 그가 신라와 마지막 싸운 곳이 이곳 월광사 부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합천군 불우조에 ”월광사, 야로현 북쪽 5리쯤에 있는데, 세ᄉᆞᆼ에 전하기를 가야국의 태자 월광이 창건했다.“ 라고 기록된 그곳에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이 남아 그 옛날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이 절에 서 있는 월광사지 동서쌍탑은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으로 높이는 5.5m, 재료는 화강석이다.
오직 그 당시의 쌍탑만 남아 있고, 그 옛날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는 월광사지에서 월광태자를 만나서 가을 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으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소나타>를 듣는 날이 있기는 있을 것인가?
2026년 10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