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선지서가 있는 것 하고 없는 것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구약의 선지서가 없이 만약에 십자가나 예수님을 전해 버리면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시켜주는 예수님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약의 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이런 것들을 모르고 신약의 마태복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걸 달달 외우고, 거기서 신약 성경을 다 외운다 할지라도 거기 나오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오신 예수님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선지서가 이야기하는 것이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선지서가 있고 구약에 있는 선지자의 그런 글들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나타나버리면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구원을 틀어막는 예수님입니다. 구원을 틀어막아버려요. 일체의 모든 인간들의 구원 행위를 쓰잘데 없는 것으로 완전히 매몰시키는, 그걸 처리해버리는 그런 예수님이 됩니다.
사람이 천국을 간募?것은 참 가당치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천국은 천사들이 사는 곳입니다. 흠 없고 티 없는 천사들이 사는 곳인데,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하면 그 훌륭한 이사야 선지자가 그 천사와 있는 하나님을 보고 놀라버렸습니다. 소감을 이야기했는데 이렇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많은 백성 중에 거하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이렇게 와서 그 선지자를 밀쳐버리죠. 얼마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 2006년 월드컵 할 때 지단이 자기 부모 욕한다고 해서 머리로 상대방 이탈리아 선수를 쳐버리니까 벌렁 넘어져버렸죠.
하나님은 마치 독일 히틀러 군대와 같습니다. 저벅 저벅(군화 발소리) 걸어와서 그냥 창으로 칼로 돌격 앞으로 해서 찔러버립니다. 거기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에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이 저벅 저벅 걸어오면 저희는 물러가면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어디 숨을 곳이 없을까?’
숨을 곳이 어디 있어요? 망하게 되었구나! 그 관계, 그 고백 그것뿐이에요. 어디에 가는데? 하늘나라가 저기에 있고, 그냥 고요한 상태로 있고, 우리가 그것을 찬양하는 식입니까?
선지서가 빠져버리면 하늘은 그냥 있고, 예수 믿으라. 내가 왔다. 야, 믿어주자. 천당 간다.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선지서가 거기에 개입되면 하늘이 먹구름처럼 비구름을 몰고 태풍처럼 내려와 버려요. 내려와 버리면 로마 군병입니다. 로마 군병은 명령 하나에, “앞으로 갓”하면 앞에 뭐가 있는지 그것도 보지 않고 그냥 밀어붙이는 거지요. 저벅 저벅 하고 밀어붙여버리면, 이렇게 쳐들어와버리면 그냥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냥. 여러분, 불도저 앞에 오징어 갖다 놓으면 그냥 밟고 지나가는 겁니다.
선지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구원의 열망을 불도저가, 여기 불도저를 잘 모르시는 분이 있는 모양인데, 아스팔트 공사 할 때 불도저가 지나가면서 그냥 밀어버리는 거예요. 이 불도저 이름이 뭐냐 하면, 거룩입니다.
거룩한 나라 저기 있고, 고요하게 있고, 우리 사람이 거기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선지서가 빠진 상태에서 우리가 아는 예수고, 그것은 엉터리 예수고, 선지서가 개입된 예수님은 이 거룩이 저벅 저벅 소리를 내면서 불도저처럼 이 지상을 몰아서 밀어버리면 어떤 것도 그 앞에 버티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 오~, 밀리네.” 깔아뭉개 버리지요. 구원이고 뭐고 깔아뭉개 버린다고. 그냥 지나가버려요.
아모스에서 제일 핵심 되는 구절이 뭐냐? 5장 17절입니다. 아모스 5장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밟고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여러분이 놓치면 안 됩니다.
소선지서의 호세아, 아모스는 최초에 기록된 책이라고 하고, 심지어는 이사야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 속에서 로마 병정들처럼 명령에 따라 죽고 명령에 따라 사는 로마 병정들처럼, 또는 독일 군병들처럼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통과해 버리니까 누가 그 앞에 저항하고 버틸 수 있습니까? 그냥 당하는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때 학생들 머리카락 기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말 안 듣는 학생들에게는 학생과장 선생님이 바리깡을 들고 머리카락을 그냥 밀어버리지요. 그러면 머리에 고속도로가 생기지요. 양심 있는 선생님들은 귀 옆쪽으로 조금 밀지만 양심 없는 선생님은 이마 한 가운데로 지나가버리지요.
주님께서는 지금 자기 백성 한 복판을 고속도로를 내 버려요. 거기에 ‘구원해 주옵소서!’ 하는 인간들도 다 밀려버립니다.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신학적으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개별 심판이 아니고 집단 심판이라.
벌써부터 어렵기 시작하는데, 슬슬 어려워지지요? 뭐는 아니다? 개별 심판은 아닙니다. 개별 심판이 아니고 집단 심판입니다. 집단적으로 우리는 택한 백성이야, 하나님 백성이야,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려, 선지자의 말씀을 순종해. 이렇게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불도저식으로 왕창 밀어버리니까 집단적으로 모두 다 나자빠지고 결국은 아무도 구원 될 사람이 없지요.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집단 심판, 집단으로 밀어버리는 이유는, 이것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최후의 극단적인 한 명의 남은 자를 건지는 거예요. 그 남은 자 한 명에 의해서 새끼 치듯이, 바퀴벌레 새끼 치듯이 확 퍼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 최후의 남은 자 한 명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본인이 선지자면서도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주신 그 집단 심판의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본인이 선지자이면서도 ‘우리 같은 선지자니까 악수하고 잘 해보자.’ 이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선지자이고 메시아이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집단 심판의 저촉을 받아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가슴팍 위로 저주의 불도저가 그냥 지나가버려요.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이고 어떤 인간이든 주님의 거룩 앞에 ‘구원 받겠습니다.’라는 말이 함부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의 거룩 앞에 구원 받겠다고 나오는 것은 아직 거룩의 맛을 못 봐서 그래요. 거룩의 호된 맛을 못 봤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 자신한테 어떤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옵니다.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선지서를 빼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해버리면 자기를 구원하는 예수님, 자기를 사랑해 주는 예수님. 그런 예수로 인식이 됩니다. 그러나 선지서를 집어넣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어떤 인간도 ‘구원해 주세요.’라고 요구할 입장이 못 됨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떤 인간도 ‘나를 구원해 주셔야 됩니다. 날 구원 안 해주면 주님 쪽에서 손해입니다. 나를 그냥 놓치고 지나가시면 하늘나라에서 큰 실수 하시는 것입니다.’라는 그러한 인식이 들거란 말이지요.
그러나 선지서를 집어 넣어버리면 이런 인식은 완전히 다 헛된 자기의 야심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들통 나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많고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그렇게 쉽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죽어도 안 죽고 영생 얻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데 그것을 함부로 주겠습니까?
죽어도 영생 얻기 때문에 안 죽고 계속 영원히 축복 받으면서 산다. 이게 구원의 혜택이잖아요. 이것을 어떻게, 이 가치 있는 것을 어떻게 함부로 주겠습니까?
그래서 이 선지서는 뭐냐 하면,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거룩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어디에다 몰아넣느냐 하면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선지자한테 그런 것이 있는데, 계속 선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글쎄 죽음보다 더 큰 게 있다니까’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계속 선지자한테는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끊임없이 몰아넣어요.
이걸 제가 어제 아침에 주일 설교하면서 ‘선지자에게는 3종 셋트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안 웃었어요. 그 때. 왜 안 웃었는가 하면 그 때 갑자기 에어컨이 꺼져서 아무도 안 웃었어요(정전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고, 이웃에게 버림 받고, 그 다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 이게 선지자에게 해당되는 3종 셋트입니다. 이것 선물 셋트로 한 번 받아보시렵니까? 굴비 셋트, 갈비 셋트 이것 말고, 가족에게 버림 받고, 이웃에게 버림 받고, 제일 놀라운 게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고. 이게 3종 셋트인데, 이것은 그렇게 버림 받음에도 평소 선지자 외에 다른 사람들이 평소에 구원 받겠다고 하는 그 심보, 그 노림수, 그 음흉한 노림수.
구원을 왜 받아야 하는데? 구원 받고자 하는 의도가 뭔데? 다 내 잘되고자 구원 받겠다는 그런 사람에게 처절한 절망감을 안겨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예수든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다 내 구원을 위해서 배치된 하나의 수단들이고 도구들 맞잖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야 하나님 값을 하는 것이잖아. 그래야 자비로운 하나님 맞잖아. 라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모든 인간들에게 선지자는 3종 셋트로 다가가서 계속해서 그 사람을 정말 절망, 절망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절망, 그 껍데기 한꺼풀 더 밑에 있는 절망,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절망을 또 깨고 그 밑에 있는 절망. 하여튼 인간들이 마지막 결국은 ‘나 구원 안 받을래. 더러워서 구원 안 받을래.’
실제로 구원을 스스로 포기하는 지점까지 몰아넣기 위한 그 절망의 3종 셋트. 그 절망의 3종 셋트. 그것을 누가 당하느냐? 선지자가 당합니다. 메시아의 영을 품고. 베드로후서--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이것을 약간 실감나게 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교회를 60년 다니고 나이 80세 되어서 돌아가시는데, 죽는 날이 만약 8월 6일이라면 8월 6일날 나이 80이 되어서 목사님 모시고 이제는 눈을 감으세요. 하고 그러는데, 그 80세 되는 날, 내가 죽는 시점이 오후 5시 26분 그 때에 자기가 문득 느껴보니까 뭘 느꼈는가 하면, 내가 그동안 60년 교회 다닌 것이 뭘 알고 다닌 것이 아니고 행여 상상의 존재인 예수라는 자가 그냥 뭐 십자가 피 흘리고 자기를 믿으면 영생 얻는다고 하니까 뭐 안 믿어도 되지만 믿어놓으면 좀 안 낫겠나 싶어서 그렇게 걸쳐놓는 식으로 한 번 믿어 본거지 실제로 나는 예수 만난적도 없고 실제로 거기다가 내 목숨 건 적도 없고, 솔직히 나한테 목숨 걸었지 평생 동안 예수한테 목숨 걸은 적도 없고, 마지막 그 순간에 결국은 나의 뇌 세포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지막 순간 입을 떼면서 노인: “목사님” 목사: “예, 이제 마지막으로 신앙고백 하셔야죠” 노인: “쓸데없는 신앙고백은 치우고 내가 60년 선배로서 이야기하는데 목사 당신 사기 그만치고 내가 60년 믿어보니까 결국은 이게 인간들의 사고의 장난이었어.” 목사: “집사님, 마지막 성경 말씀 들려 드릴까요?” 노인: “내 많이 먹었다. 이제 그만해라. 성경 다 안다.” 교인: “찬송가 불러 드릴까요?” 노인: “치워라 그만. 현철이 노래나 틀어도. 앉으나 서나 -- 그 노래가 찬송보다 좋다. 내가 많이 했다. 종교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창작해 낸 하나의 정교한 시스템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 다 지나간 이야기잖아. 그 먼저 예수 믿고 웃으면서 갔다고 하는 말도 ?믿겠고 내가 60년 믿어보니까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신앙도 헛되고 예수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 노인: “자식들아” 자식: “예, 아버님.” 노인: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자식: “예” 노인: “내같이 후회하지 말고 진작 착각하지 말고 교회 다니지 마라.”
그러면 자식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 안 그래도 제가 벌써 교회 포기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그 말씀에 제가 용기가 납니다. 저도 평소에 아버지 생각에 동의했었습니다. 다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믿었지 사실은 내가 예수 만난적도 없고 확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옆에서 분위기 띄워주니까 안 하면 기독교 가정에서 예수 안 믿으면 왕따당할까 싶어서 했는데, 사실 내 속마음 딱 깨놓고 말해서 진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더 똑똑하다고 봅니다. 공연히 병신처럼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형색만 했는데 솔직히 지금이라도 아버지 그런 말씀 들으니까 용기가 불뚝 납니다. 이제부터 용기 있게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아멘!”
그런 절망을 진작 하지 않고 왜 얍삽하게 죽을 때 하느냐 말이지요. 진작 하지. 진작.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신학에 정통한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공부 참석한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성경에 나오기를 구원이란 것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인데 이게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이 문제거든요.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목사가 성만찬에서 주는 살과 피를 먹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쉬워요. 맛만 보고 먹으면 되니까. 세례 물 뿌려서 구원 받으면 물을 열 번도 더 뿌리지요. 어떤 형식으로 할 것 같으면 따라 하겠는데, 이것은 형식이 아니라 ‘본인들이 아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모호하게 나오니까 오랫동안 믿었다는 것은 하나의 관성이고 하나의 습관이지 그것이 신앙을 대신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나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자기 행위도 걷어 치워야 한단 말이지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그 앞에 자기가 나설 수 없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선지서를 빼 놓고, 선지서를 제대로 보지 않고 십자가와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해 버리면 굉장히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착각하게 만들고 자기를 자꾸 세뇌시키는,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요. ‘믿어야 돼. 믿어야 돼. 안 믿으면 마귀의 시험이야.’ 자꾸 최면을 거는데, 최면을 걸어야 된다는 그러한 불안감, 두려움 그것이 왜 생깁니까?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닙니까. 자신이 없기 때문에.
뭔가 반복하지 아니하면 탈선한다. 라는 그러한 기우, 그런 두려움이 생긴다는 자체가 뭔가 믿음이란 것을 자생적으로 자기가 구성하고 열심히 창작하고 있다는 그런 엉터리같은 심보를 고백한 것밖에 안 돼요. 내가 매일같이 나를 다독거려야 해. 라는 일처럼 자기를 속이는 일이 또 있겠어요?
십자가가 있다면, 성경대로 합니다. 십자가가 있다면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와서, 물론 이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서 나를 구원 한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한다? 구원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자랑한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서 나오는 구원의 공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구 뭐라고 해도 이의가 없어요.
이의가 없는데, 이게 분명히 맞는 이야기인데, 여기다가 뭘 집어넣는가 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을 내가 믿으니 구원 받는다고 해서 여기에 ‘믿음’이 마중을 나가요.
마중을 나가겠다는 말은 이게 선지서의 의의를 모르기 때문에 마중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요. 제가 마중 나갈게요. 구원의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저기 있습니다. 아, 제가 마중 나가지요.
이런 것을 저지하고자 선지서가 있습니다. 거룩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거룩이 어디 있습니까? 찾아가겠습니다. 이것은 철로역정에나 나오는 그런 엉터리같은 이야기지 실제로 성경하고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선지서는 거룩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불도저처럼 굴러 내려와서 밀어 붙입니다. 제가 불도저 이야기를 했는데, 왜 불도저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이게 에스겔 1장에 보면 그 불도저가 나와요. 사방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러한, 毬ご纛?보좌가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동서남북 움직이면서 모든 것을 다 뭉개버리는 그런 것이 에스겔 1장부터 그게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그러한 보좌, 기계 그것이 어떤 기계일까 제가 상상을 하다가, 한 날은 제가 어떤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TV에서.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라는 영화인데, 이게 뭐냐 하면, 코믹한 말도 안 되는 서부영화인데, 어떤 나쁜 마음을 가진 박사님이 문어로 거미같은 기계를 만들었어요. 사방을 움직이면서 돌아다니는 기계를 영화에서 본 적이 있어요. 좀 천박하지만 저것하고 비슷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아실 것은 그 보좌가 성령을 통해서 지금 심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계가 아니고. 저는 그것을 보고 탱크 종류로 봤는데 미국의 어떤 감리교 목사는 자기가 계시를 받았데요. 저거는 뭐냐? UFO랍니다. 에스겔 1장에 나타난 움직이는 보좌가 UFO라고 책으로 썼는데 그 책이 3권 쯤 나왔는데 신학생 때 돈 주고 사지는 않았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봤어요. 에스겔 1장의 보좌는 외계인이고 자기는 외계인을 직접 만나서, 외계인이 다른 게 아니고 천사인데 그 천사가 이것을 전하라는 소명을 듣고 자기가 전한다고 감리교의 간증집이 나와 있어요.
그리고 UFO가 되어야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 곡과 마곡에 나오는 이만만인가 라는 군사도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읽고 겁을 먹었지요.
선지서의 특징은 UFO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구원을 틀어막는다는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 구원을 틀어막는 방법이 뭐냐? 아모스 5장 17절처럼 ‘너희들 가운데 내가 완전히 통과해버린다.’ 고속도로를 내 버려요. 완전히.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거룩으로 밀어붙인다 이 말입니다. 남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 깨졌어요. 성전 다 깨졌어요. 제사장 소용없어요. 정기적으로 드리는 십일조나 제물 다 소용없어요. 기도 소용없어요.
여러분 교재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6페이지 위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제사를 저주한다.]는 대목에 “누가 너희에게 이렇듯 내 궁정을 마구 짓밟으라 요구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향냄새는 내게 구역질 나는도다”(사 1:11-17)
이제는 지겹다는 것입니다. 제사고 예배고 드리는 예물이고 찬송이고 다 지겹다는 것입니다. 찬송소리가 지겹다는 것이 아모스에 보면 나와요. 한마디로 말해서 질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질려버렸어요.
예물 드리면서 ‘하나님 저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십일조 드리면서 ‘하나님 저 구원해 주셔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기도하는 저를 구원해 주셔야 됩니다.’ 거룩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온통 생각하는 것이 내 구원 받겠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 구원을 틀어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서 솟아 올라오는 그것을 틀어막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몽이 활을 쏘면, 구원 받겠다고 활을 쏘면 중간에 다 부러지는 거예요. 이제는 지겹답니다. 그만 바쳐라.
시편 50편에 나오던가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들이 수많은 양과 소를 바친다 할지라도 그것가지고 내가 구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산천초목에 있는 짐승들이 다 내 것이다. 산천초목에 있는 짐승 가져다가 성전에서 제물 드린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고 제물을 좋아한다? 언제 내가 그런 것 받고 구원해 주었느냐’
교재 5페이지 봅시다. 맨 위에 [경배의 장소가 선지자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 지금 하나님께서 어디를 공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경배의 장소가 공격 대상이 됩니다. 경배의 장소를 그들이 거룩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장소 말고 거룩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면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선지자는 여기에 공격을 해 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거룩이 날아가 버리고 거룩이 거룩 아닌 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거룩이 없는데, 어떻게 거룩도 없는, 달리 말하면 의로움이 없는데 자기가 무슨 뻔뻔함으로 나를 구원하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없는 거예요. 없어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다는 주님의 뜻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게 선지서가 개입되어야 왜 세리와 창기가 소위 경건한 사람보다 먼저 천국을 갈 수밖에 없느냐?
선지서가 거룩, 경배의 장소를 공격하고 거룩한 공간을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뭐냐? 헤즈볼라.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걸 공격하는 천사들은 뭐냐? 위대하신 이스라엘 특공대들입니다. 싸거리(몽땅) 조져(박살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지서의 이런 뜻을 알고 그 다음에 십자가와 예수님을 거론할 때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구원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되고, 이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렇다면 그 구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같이 버림받은 사람 중 한 사람, 남은 자, 최후의 남은 자 그분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분의 불씨가 살아나서 그분의 공로에 합세해서 완벽한 거룩, 완벽하게 의롭다는 논리로서 성도가 구원되는 겁니다.
아이고, 문장이 길고 어렵다.
뭐냐 하면, 첫째는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고, 두 번째는 어떤 사람이 구원 되는가 하면 완벽한 거룩과, 하나님의 불도저에 견딜만한 완벽한 거룩과 완벽히 의로운 사람에 한해서만 구원되는데 그것이 누구와 같이 있어야 되는가 하면 마지막 남은 자, 구원되기로 작정한 마지막 남은 자와 한 통속이 되고 하나가 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우리를 구원하는 탓뮈? 예수님 보고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구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보고 구원하는 겁니다. 왜냐 아무도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는 거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남은 자를 생각하면 되는데 최후의 남은 자가 어떻게 최후의 남은 자가 됐는가를 아직 이야기 안 했습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 식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까 백전도사님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을 다시 설명 드리면, 여러분이 정리하는 생각으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원 받고자 하는 열망들을 예수님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가로막고 예수님 뒤에 누가 계시는가 하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태생에 항상 유일신이고, 신 = 하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어로 one. 1이거든요. 신이 둘 될 리가 없어요. 신은 독보적인 존재를 신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은 하나입니다. 1, one.
하나밖에 없는 분이 하나밖에 없는 분을 정성을 하나로 모아서 그분께 찬양 드리고 감사하면 우리는 구원 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상에서 나오는 신 개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타날 때 아들 개념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들 개념으로 나타나니까 이것은 그들에게 낯선 거예요. 아들 개념이 낯설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아들 개념과 더불어 아버지 개념으로 등장해서 신을 하나의 가족으로, 신을 아들과 아버지의 하나의 가족으로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뭘 뜻하느냐 하면, 이것이 중요합니다. 뭘 뜻하느냐 하면 신을,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근처도 안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지어낸 하나님이지 전부 가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의 신은 상상한 신은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식이 내가 바로 아들이란 방식 이외에는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들 뒤에 숨어있어요.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유일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수수께끼가 됩니다.
수수께끼는 하나님께서 이 수수께끼, 비밀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비밀을 주시는 이유는 풀 수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비밀로 은유로 비유로 수수께끼로 남겨두는 겁니다.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계속 남기기 위한 해석 이외에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가 없어요. 아드로느가 이야기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풀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못 풀기 위해서 수수께끼가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수수께끼가 풀려버리면 인간은 그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소유하면 그것을 풀었던 내 소유의 자격으로 구원시켜 달라도 대들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비밀을 풀었다는 내 이름으로 내가 구원되는 거예요. 이것은 가짭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내가 비밀을 낚아챘다는 내 이름으로 내가 구원 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성을 내 쪽에서 찾게 됩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니” 그런데 세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세리는 주님으로 오시는 분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것을 알고 있고,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내 지식으로 이미 획득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원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로 남지 않고 이미 해결된 사실로 그 앞에 등장해 버리는 겁니다. 제가 어렵게 설명해서 미안합니다. 좀 쉽게 하겠습니다.
어떤 양반이 ‘나는 맨 앞자리에 앉으니까 자연적으로 은혜가 되더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은혜 받는 비밀이 그 사람에게는 해결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형식이 되 버려요.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필요 없습니다. ‘나는 앞자리만 앉으면 무조건 은혜 받아.’ 그것은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은혜 받는 방법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앞자리에 앉고 있다는 나의 존재와 행위가 이미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대체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그 사람한테는 탈락되어 버린 겁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아들은 사라지고 바로 자기와 하나님과 내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방지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인간도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이 말은 기존에 있는 모든 유일신은 다 엉터리란 말입니다. 아들로 충분합니다.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했으니”(히10:5) 그 몸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몸의 능력으로 우리가 거룩을 얻었나니(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 하나님께서 한 몸을 준비했는데, 남은 자지요. 마지막 최후의 한 분을 준비했는데 그 최후에 준비한 한 몸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분에 의해서 이미 우리는 거룩을 얻었나니. 구원을 받았다 이 말입니다. 옛것은 날아가 버리고 새로운 것만 내 안에 남아 있는 겁니다.
주의 능력으로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이 제시한 수수께끼를 자기 것으로, 자기 소유로 전환하기 위해서 아들마저 삼켜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직접 아버지께 나아가려고 시도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바로 선지서가 말하는 아들 속에, 이 아들 안에 선지자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 안에 선지자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가 삼킬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여주므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아들의 능력이 아니고 자기 능력으로 아들을 높여서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에서 내 뿜는 그 능력으로만, 초청된 자만 아들 뒤에 있는 아버지의 나라, 새 하늘,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이게 요한복음에 나오거든요.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지서를 볼 때에 왜 아들이 꼭 나와야 되느냐? 그냥 성경말씀 주시고 믿으라. 그러면 구원하겠다. 이러면 될 텐데 왜 마지막 때에 아들이 꼭 이 땅에 와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불도저처럼 전부다 거룩으로 밀어붙이기 위해서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된다는 것을 선지자의 입장에서 전부 다 분명히 해 두기 위해서 주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을 안 했지요. 안했는데 막상 아들이 나타나서 그런 얘기 할 때 사람들은 자기 본인도 놀랍게도 그 예수님을 밀쳐버리고 예수님을 없는 것으로, 자기 가운데 유일신 쪽으로 그런 쪽으로 가버렸어요. 예수님을 밀쳐 죽이고.
그러니까 이것은 평소에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 자력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더 확연하게 된 겁니다. 지금 모기가 날 괴롭히는데--
자, 그렇다면, 제가 대략적인 것을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이러한 선지서를 알기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본적으로 아셔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 15장 17절을 한 번 볼까요. “해가 져서 어둘 때에 П?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여기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계약 체결하는 장면인데, 거기에 아브라함이 제물을 둘로 쪼개놓으니까 밤중에 하나님께서 그 중간을 통과하고 지나가지요. 지나가면서 계약이 성사되는 그 대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제물에 해당되는 사항이 뭐냐? 아브라함 본인이고, 별같이 모래같이 많은 아브라함 자손들이고, 그것이 바로 지금 선지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제물로 삼아서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걸 통과하므로 말미암아 이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가, 그것은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 없었다를 이야기하는 증인으로서 세우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선지서를 볼 때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마지막 때가 왔다. 이렇게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그러니까 우리는 피하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자’가 아니라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피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에서 ‘사자가 울부짖는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느냐’는 이 말은 심판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심판이 주어지니까 구원될 사람은 알아서 기라. 그 뜻이 아니고 어떤 인간도 이 심판에서 모면될 사람은 단 1명도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당해도 너무 당하잖아요? 글쎄 그렇게 당하는 역할을 하라고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이런 저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다고 착각들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니까 구원받고 싶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 아는 나라는 저희들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진짜 모세가 와서 하나님 말씀을 줬으니까 야, 신난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구나.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오해였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밟을 때 얼마나 그 저주와 심판이 혹독하냐를 만방에 떨쳐 보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뽑은 겁니다. 제물을 갈라놓고 통과하는 것, 요새 가끔 우리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고등어 굽습니다. 고등어 갈라놓고 노릿노릿 구워놓으면 참 맛있거든요.
우리는 내장이고 뭐고 속에 들어 있는 것 다, 부끄러운 줄 알지만 그걸 완전히 쪼개가지고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노출하면 그걸 ‘잘됐다 이놈아!’ 하고 밟고 지나가는 그 광경을 모든 이방 민족들이 구경을 하면서 “야! 여호와는 참 무서운 분이구나.” 그런 것을 보여주는 그 증인 노릇 하라고 이스라엘이 선택을 받은 거예요. 그걸 아셔야지요.
뭐 아모스가 복음 듣고 피했다고. 그랬다면 지가 메시야게.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그 심판 속에서 구원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은 자도 한 명도 없어요. 오직 한 명이 있다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분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작살납니다.
선지자가 숫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아무리 선지자가 추가되면 추가될수록 그들의 더 깊이 있는 죄는 고등어 쪼개듯이 쪼개져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런데 감사할 것은 죄지은 자신들에게 다른 민족들에게는 지나가지 않는데 주님께서 거룩으로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는 그 자체가 감사해야 됩니다. 주여, 주는 거룩하시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享윱求?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 그게 어딥니까?
십자가 진 강도가 강도짓하고 그동안 애먹인 것 다 안 좋지요. 하지만 그 강도가 자신의 한평생이 손해 보는 인생이라고 조금도 생각 안 했을 겁니다. 왜? 주께서 옆에서 하는 말이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기에.
만약 우리가 그런 소리 하나 듣고 싶다면 평생 강도짓 하는 것이 어떻게 그게 손해 날 짓입니까? 인생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대 성공한 거예요.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그런데 강도가 무슨 짓을 해서 낙원에 갑니까? 아무 한 것도 없어요. 강도짓 해서 구원 받았다고 하면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왜 구원 못 받습니까? 그거야 목사님, 구원 받은 강도는 믿음이 좋아서 그렇지요. 글쎄 믿음이 좋다는 그 믿음이 그게 소유가 돼 버리면 그것이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처럼 되 버려서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 아들이 소용없는 것이 된다고요. 이제 이야기가 더 어려워져 버렸는데 --
내가 옆에 십자가에 있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았다고 돼 버리면,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이 아들 제쳐놓고 강도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되지 왜 아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 되겠습니까?
평소에 강도가 그런 믿음 있었으면 그냥 구원했을 거예요. 그게 아니고 강도가 되든 백부장이 되든 회당장 아저씨가 되든 누가 되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라는 그 관계를 가지고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그 묶인 밧줄, 그 두 사람을 꽁꽁 묶은 밧줄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 믿음은 자기 소유가 될 수 없는 거지요. 주님께서 꽁꽁 묶으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러면 또 하나의 형식이 되지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소나무 뿌리 뽑고 40일 금식해서 됐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믿음을 얻는 수수께끼가 풀려버린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는 존재가 되 버려요. 그러면 너 잘났다.
바로 그러한 형식을 구체화 한 것이 선지자에게 책망 받은 이스라엘의 되풀이였습니다. 무수한 제물, 반복되는 제사, 아름다운 찬양 다 이것이 형식이고 껍데기의 되풀이 밖에 안 됩니다. 아무데도 소용없는 거예요. 우리는 원래부터 소용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소용없는데 소용 있고, 없고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증거하라고 한 사람에게는, 너는 아들을 증거하라고 뽑혀 나온 자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못 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말이 쉬워서 38년이지, 1년도 아니요 2년도 아니요 무려 38년. 야, 38년 된 병자. 참 지독하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데, 38년 된 병자가 39년째를 접어들고 있습니다. 39년이 되든 40년이 되든 그것은 그 사람한테는 의미가 없어요. 이것은 의미가 없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5년이 되었든 10년이 되었든 주님이 의미 있는 것이지 내가 10년 동안 아팠다든지 38년 동안 아팠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당신 어떻게 해서 예수 믿었습니까? 5년 믿어서 됐습니다. 10년 믿어서 됐습니다. 헌금을 많이 해서 됐습니다. 뭐 전도를 많이 ---
자꾸 자기 쪽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구원 받겠다는 것밖에 안 돼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낳게 해 줬으면 그냥 집에 돌려보내면 되는데, 예수님은 선지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어떤 기능이 들어 있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되지 못했다는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에 나오는 선지자의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능을 발휘해야겠지요. 어이, 아저씨. 예, 감사합니다. 갈 때 그냥 가지 말고 담요 가지고 가세요. 담요를 들고 가라고. 낳게 해 주셨으면 그냥 낳게 해 주시지 왜 담요를 들고 가라는 이야기를 왜 합니다. 그 38년 된 병자가 담요를 가지고 걷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위로부터,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이게 지금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공간으로 봅시다. 지금 이 공간에 여기 선지자 있고, 선지자 뒤에 형식이 있어요. 대표적인 형식이 있단 말이지요. 형식은 뭐냐 하면, 이미 수수께끼를 해결해 버린,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비밀을 획득한 사람들의 보장된 지식이지요. 이것을 되풀이 하면 구원의 효과가 나온다고 믿는 겁니다. 이게 선지서에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 선지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버리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선지자노릇 해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38년 된 병자입니다. 지금은 치료되었지만. 이 병자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 38년 된 병자는 안식일에 하지 말라는, 안식일에는 무거운 담요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형식에 얽매인 사람에게 38년 된 병자가 안식일 날 담요를 들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달리기를 했다 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선지자가 그들의 지식 그들의 구원론에 의하면 결국 버림 받는 사람, 너는 죄인 중의 괴수다, 버림 받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요.
그들이 알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정보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구원 받지 못한, 저주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주의 빈 공간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펑크를 내듯이 자꾸 터뜨리는 거예요.
터뜨리면 38년 된 병자가 곱게 집에 가지 않고 담요를 들고 감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기존에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 아들 없이 스스로 구원 되겠다고 하는 의도를 폭로시키는 기능을 38년 된 병자가 하게 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그 방식 그대로 아모스, 호세아를 해석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딴 말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자극을 주고 충격을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데 그 충격과 자극을 보니까 완전히 이것은 하나님께 저주 받는 그런 인간들이 하는 행세를 선지자들이 하고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이 선지자야 너는 가짜다.’ 아모스 보고, ‘야, 너 신학교 어디 나왔어?’ 그렇게 아니까 아모스가 하는 말이 “나는 선견자도 아니고 나는 선지자도 아닙니다.” 그럼 뭐야? “나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 시킨 대로 담요를 갖고 가는 거예요. 갖고 가니까 주위 사람들이 ‘너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저주 받을 놈이다.’ 그래 많이 케라(떠들어라). 선지자의 3종 셋트, 가족에게 버림 받고, 이웃에게 버림 받고, 심지어 그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그래서 여기 교재 3페이지를 봅시다. 이사야 49장 4절 “나는 헛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뺐다.” 이게 오늘날 성도의 가야 될 길입니다. 외치고 외치고 외쳐도 힘만 뺐다.
그리고 그 위에 보세요.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전혀 독자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의 사람들만 관계했다. 대중을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그들의 부르짖음은 메아리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무력했다.”
“나는 헛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뺐다.(사49:4)” 그 밑에 문장 보면, “하지만 그들의 무력함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인간 역사의 중력 --” 야 인간 역사의 중력. 표현 괜찮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형식을 하면 역사를 만들어요. 과거는 이렇습니다. 과거 효과를 본다고 역사를 만들어요. 그 역사는 하나의 인간 권력이 됩니다. 중력이 되지요. 인간 체제와 권력에서 발생되는 그 중력에 하나님은 쏠려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개시하지요. 어디서부터? 뻥뻥 뚫린 구멍으로부터. 낯선 구멍으로부터.
첫째시간 끝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선지자가 왜 선지자노릇을 합니까? 몰라. 시키니 하는 거예요. 그냥 구원 받은 입장에서 담요 가지고 가라고 하니까 가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 너 선지자야? 아니야. 너 제사장이야? 아니야. 그러면 너 바보구만. 그래 바보야. 뭐야 너? 몰라. 나도 모르는데 그냥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야. 누가 시키던데? 내 뒤에 보시는 분이. 이게 선지자예요.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 해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외치라고 하니까 외칠 뿐이에요. 그러다가 세례 요한의 목 베어 쟁반에 담겨 죽고. 뭘 건졌어요?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요.
그래서 3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암3:7-8) 그거에요. 이유도 없어요. 맹목적이에요.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만 구원시키기 때문에 그런 외롭고 소외되고 낯선 모습을 앞당겨서 선지자에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인간의 모든 구원을 차단시키고 오직 장차 오실 아들로부터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첫째시간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