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노래는 아리랑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아리랑은 부르고 누구나 한곡은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을까? 구체적으로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기 위해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되었을 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군들이 고향을 떠나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 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이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괴로워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국적인 민요가 돼 아리랑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구전으로 전해오던 민요를 서양식 악보에 기록한 것은, 1896년 당시 미국 선교사로 활약하던 헐버트(1863.1~1949.8.5)에 의해서다. 그는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나 다트머스대학을 거쳐 유니온신학교를 졸업, 1886년에 한국정부에서 국립으로 운영하던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내한했다. 1891년에 육영공원을 축소하려고 하자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가, 2년 뒤에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했다. 그는 문서선교를 위한 책자를 발간했고 영문 한국학 연구지인 '코리아 레포지토리'(Korea Repository)라고 하는 잡지에 한국의 역사와 풍속 언어 등에 대한 글을 실었다. 바로 이 잡지 안에 'Korea Vocal Music'이라는 란에 아리랑의 영문 가사가 실려 있다.
또 1901년부터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지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한국학 논문을 게재했다. 이런 한국학 연구를 통해 헐버트는 한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열강 제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게 됐다. 그의 책에 아리랑 악보와 가사를 실은 것은,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사역하던 1896년 2월에 태어난 아들이 생후 1년 만에 죽게 된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5년에 이미 한일합방 움직임이 보이자, 고종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고종 황제의 친서는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하려고 하는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는 사실을 알리는 밀서였다. 여기에는 한미수호조약 규약을 들어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워싱턴에 도착하는 날,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고 말았다.
미국은 일본과의 카스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고 있는 터라 고종 황제의 친서를 들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헐버트의 요청은 묵살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이준 등의 밀사보다도 먼저 도착하여 그들의 활동을 후원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므로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다른 많은 선교사들은 헐버트의 행동이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선교사들 간의 알력과 일제의 압력으로 그는 1907년에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으나, 노년의 여행에 따른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1949년 8월 5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바로 2년 전에 나는 서울 한강변 양화진이란 곳에 위치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를 방문하여 헐버트 선교사와 생후 1년 만에 죽은 그의 아들의 묘지에 참배했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를 보아서도 그는 당시에 식민지가 되는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아리랑을 불렀으리라 생각해본다. 나는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지의 방문을 통해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 임한 하나님 선교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가 있었다. 본국을 떠나 외국에서 오랜 세월 나그네요, 선교사로 일하면서 감지할 수 있었던 헐버트 선교사와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현대 한국교회가 선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헐버트 선교사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그는 선교사로 본국을 떠나 어둠 가운데 헤매는 우리 민족에게 빛을 보여주었다. 복음으로 구원의 길을 일러주었고, 교육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사역한 선교사다. 우리도 이런 교육 선교와 아울러 병원 의료 선교를 통해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선교적인 사명을 기억하자.
박해를 받는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스데반 순교의 역사가 초대교회에서 나타나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유대인만이라는 문화적인 면에서 한계상황에 부딪히는 일이 있다.(행전11:19) 그러나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전11:20)라는 말씀을 보니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부 소수자(Minority)와 남은 자(Remnant)를 들어 쓰신다.
우리에게 선교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임은 주의 손이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의 소문은 널리 퍼져 예루살렘 교회까지 들리게 되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왜 바나바가 선택되었는가.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자다.(행전11:23)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한 자다.
우리 교회는 선교에 관한 일이나 과제가 주어지면 그에 따른 적절한 인물을 파견하여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 함께 일할 사역자의 선택이 중요하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 데리고 와서 공동목회를 한 사실에서, 우리는 단독적인 선교 사역보다 협력해 이루는 공동목회의 비전을 지녀야 한다.
선교에 있어서 수반되는 것이 교육목회다(Teaching Ministry). 바울은 교회에 1년 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행전11:26) 그랬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