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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준비가 끝난 은해사(銀海寺)는 고요했다. 물기마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미처 제 본체와의 인연을 떨치지 못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렇게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千年古刹) 은해사의 겨울은 바람조차 고독했다.
사찰 종무소 직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흰 운동화가 있는 법당의 문을 두드리니 스님 한 분이 합장하며 우리를 맞았다. 그 스님은
우리가 찾는 세속 나이 만 71세 스님의 얼굴과 거리가 있었으므로 그에게 “혜인 큰스님 계세요?” 하고 물었다.
어림잡아
오십 남짓의 나이로 보이는 그 스님은 “제가 혜인입니다” 하고 답했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의 얼굴 같기도 하고, 깊은 산자락의 밤을 당장이라도
깨울 만큼의 포효를 내지를 것 같은 호랑이의 얼굴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여러 인상이 겹쳐 보이는 그가
은해사 조실(祖室·사찰에서 최고 어른을 이르는 말) 혜인 스님이었다.
80개가 넘는 말사(末寺·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를 거느린 큰절의 최고 어른이면서도 별다른 격식도 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그 모습 때문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와 마주앉았다. 은해사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려니 그는 까다롭게 굴기 시작했다. 동행한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어렴풋하게 찍어 주었으면 좋겠다”느니, “차라리 뒷모습을 찍는 것은 어떻겠냐”는 등 잔소리로 느낄 수도 있는
주문을 먼저 했다. 물론 나중에 그의 그런 주문이 자신을 너무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사진기자에 대한 주문에 이어 이번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적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서로 인터뷰랄 것도 없이
그가 예상 질문과 답을 적어 놓은 노트만 들고 나오면 될 판이었다.
혜인 스님이 직접 노트에 적어 놓은 첫 번째 예상 질문은
이랬다.
‘한국 불교계 중진이신 혜인 스님께 한마디 들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출가입산하여
일생(一生)을….’
말줄임표(…)로 끝난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1956년 3월
제주 대정중학 1학년 때 마음씨 고운 누나가 먼저 출가하고 나서 항상 그리움…. 그후 1년 뒤 누더기를 입은 혜철 스님의 훌륭하신 법문을
들으면서 발심출가.’
그가 첫 번째 예상 질문과 답변을 읽고 났을 때 기자가 “스님! 많이 바쁘신가 보죠?” 하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테고 해서 내 딴에는 미리 준비해 놓으면
시간도 절약하고 효율적일 것 같아서, 허허….”
그의 웃음과 함께 우리는 기자가 묻고 그가 답하는 인터뷰 형식을 따르기로
했다.
성철 스님, “절하다 죽은 놈 없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 신라 헌덕왕 1년인 809년에 혜철 국사가 창건했다. 대웅전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
“큰스님!” 하고 질문을 시작하려는데 그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제가 1956년에 출가했으니까 2014년이면
중 생활 58년째요. 그래서 ‘중진 스님’이라고 하는 호칭에는 별 이의가 없지만 ‘큰스님’이라는 호칭은 아휴…!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요?
“제 자신이 쌓은 덕은 얇고 적은데 높은 호칭으로 불리면 뭐 합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기에 결국은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언제나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복과 덕과 지혜를 넉넉하게 쌓아야 합니다. 출가하여
지금까지 지내 온 제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드러낼 만한 것을 쌓아 놓지 못한, 산중에 노구를 의탁하고 살아가는 그저 그런 중에 지나지
않습니다.”
혜인 스님 본인의 말대로 그는 속세(俗世)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처럼 ‘산중의 그저 그런 중’에 지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이다.
혜인 스님은 선(禪), 교(敎), 율(律) 삼장(三藏)을 겸통한 큰스님으로 존경받았던
일타(日陀) 스님의 제자다. 2013년 11월 24일 은해사에서 열린 ‘일타 대종사 제14주기 추모 다례재’에서도 혜인 스님이 문도 대표로
추도사를 했다. 한국의 대표적 고승(高僧) 일타 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가 대단한 스님이라는 뜻은 아니다. 스승 일타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애쓰면서 스승이 걸었던 구도(求道)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100만 배(拜) 기도다. 1971년 3월부터 혜인 스님은 해인사 팔만대장경각에서 200일 동안 100만 배의 절을 올렸다.
하루 5000배씩 절을 올린 것이다. 100만 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성철 스님에게 말했을 때 성철 스님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중간에 그만둘 요량이면 시작도 하지 말고 끝장낼 각오라면 한 번 해 봐라.”
혜인 스님이 “하겠다”고 하자 성철
스님은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어 지옥 안 간다.”
100만 배,
5000배, 200일…. 단순한 수치만 나열해 놓고 보면 100만 배가 안겨다 주는 육체적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간단히
108배만 해 보면 그 고통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루 5000배씩 며칠을 하다 보니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왔다. 그때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성철 스님의 “절하다 죽은 놈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절을 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이를 악물었는지, 무릎이 아픈 것인지조차 느낌이 오지 않았다. 무념무상(無念無想). 그렇게 200일이
흘렀고 100만 배를 성취할 수 있었다.
약천사와 광덕사 佛事
일으키다
불교계가 혜인 스님의 업적으로, 아니 혜인 스님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꼽는 일이 있다. 제주도
최대 규모 사찰인 약천사를 건립하고 충북 단양 도락산에 광덕사를 중창한 일이다. 고향이 제주인 혜인 스님은 3만5000평 규모의 약천사
불사(佛事)를 시작한 지 8년6개월 만인 1996년 9월에 완공했다. 종단의 지원을 받지 않고 그가 주변 신도들의 힘을 모아서 완공한 절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불사로 평가 받고 있다. 현재는 제주를 찾는 여행객들의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 잡을 만큼 유명한 사찰이 됐다. 약천사 완공 후
그는 “승려는 경제권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주지직을 내놓았다. 광덕사는 장차 국제총림으로의 발전을 목표로 불사가 진행되고 있고, 일부 완공된
시설만으로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정도의 성취만 놓고 봐도 그를 ‘큰스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의 나이 71세다.
—적어 놓은 답변을 보면 누이가 먼저 출가했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누나가 몸이 약했어요. 출가하면 몸이 좋아진다 해서 출가했던 거죠. 항상 누나가 그리웠습니다. 제일 착한 누나였거든요. 스님 생활이
뭐가 그렇게 좋은가 하고 생각하던 차에 혜철 스님이라는 분을 만나게 된 거죠.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왔는데 처음에는 거지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누더기 옷을 입은 스님에게서 굉장히 좋은 법문이 나오는 겁니다. 학교에서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말씀이 쏟아지는데… 나도 저런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누나가 출가한 지 1년이 지나서였어요.”
—58년 스님 생활을 하면서 후회한 일은
없었습니까.
“열여섯 살 때 강원도 연곡면 백운사에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출가를 했기 때문에 생전 지게질이라는 걸
해 보지 않았는데 거기서는 지게질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감자하고 옥수수밖에 없어서 하루 밥 세 그릇을 못 먹었어요. 늘 배고프고 힘들었죠.
하루는 지게에 감자를 지고 옮기는데 코피가 주루룩 흐르는 거예요. 그때 출가를 말리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너 잘 생각을 해라. 너
지금 그 나이에 가면 고생 죽도록 한다. 더 있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가거라. 어린 나이에 지금 가면 정말 너는 내버린 자식 취급을 받는다. 한
번 다시 생각해 봐라.’ 하지만 제가 그때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 뻥뻥 쳤어요. 그런데 코피가 나니까 그 당시 생각이 나는 거예요. ‘내가 코피
쏟는 모습을 어머니가 보시면 울겠네’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는 거예요. 하지만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갈 돈도 없고 지금 떠나면 집에서 다시는
받아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어머니 생각에 눈물만 흘렸죠. 58년 중 생활 동안 울어 본 것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하지만 고향이
그리웠던 거지 출가한 것에 대해 후회한 것은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스승을 바꾸다
혜인 스님의 스승인 일타 스님이 생전에 노트에 빼곡히 적어 놓은 법문. 일타 스님은 손가락 4개를 불태워 바치는 연비공양 후 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해 글을 썼다. 일타 스님이 열반한 후 혜인 스님은 이 노트를 유품으로 받았다. |
혜인 스님은 스스로 “인복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출가했을 때 혜인 스님에게 계(戒)를 준 스님은 제주에
관광을 온 스님이었다. 그 스님이 떠나 버린 후 그는 스승도 없는 중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제주에 다니러 온 어느 스님이 혜인 스님을 보고는
“얘는 누구 상좌냐” 하고 물었다. 다른 스님이 “얘는 임자도 없는 애니까 스님이 필요하면 데려가세요” 해서 그 스님을 따라서 간 곳이 강원도
백운사였던 것이다. 백운사에 가서 새로 계를 받았는데 그때 혜인 스님이 받은 법명은 청진이었다. 하지만 그 스승과의 인연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타 스님을 만나 혜인이라는 법명을 받고 나서야 그는 진짜 스승을 모시게 됐던 것이다.
혜인 스님은 일타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출가한 지 15년이 다 되어도 양말 한 켤레 사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할 당시 다른 스님들은 불자들이나 도반(道伴)이
책을 사 주기도 하는데 자신한테는 책 한 권 사 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먼저 출가한 누나를 찾아가 다른 비구니 스님들이 쓰던
책을 얻어서 공부해야만 했다.
혜인 스님은 스물한 살 때 부산 묘관음사 선원에 입방(入榜)하게 됐는데 마침 하안거 해제
기간이라 그 절에 머무르지 못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오라는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혜인 스님은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200원뿐.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신발점’을 치기로 했다. 신고 있는 고무신을 벗어던진 후 그 신발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보자는
것이었다. 신발이 강원도 방향을 가리켰다. 생각해 보니 옛날에 있던 백운사가 떠올랐다. 혜인 스님은 그 길로 15일 동안 걸식을 하면서 부산에서
강원도 백운사까지 걸어갔다. 하루 평균 100리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까까중’이라고 놀려대고 사람 많은 곳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5~6일 지나고 나니까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을 때는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경도 외우고 염불도 외웠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열심히 기도하다 보니까 신심(信心)도 깊어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타 스님을 어떻게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겁니까.
“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때 스승님을 바꾸게 됐어요.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것은 못 되지만 청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스승은 제가 스승으로서의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스승과
헤어지고 나서 일타 큰스님을 합천 해인사로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이전 스승과의 일을 설명하고 ‘스님을 제 스승으로 해야겠습니다’
했죠(웃음).”
—흔쾌히 받아 주시던가요.
“그 자리에 일타 큰스님 말고 다른 스님도 있었는데 그분이
‘청진이면 진실한 사람이니까 거짓말은 아닐 거다’ 하시면서 거들었죠. 그랬더니 일타 스님이 ‘스승까지 할 건 없고 내가 모르는 것 있으면 가르쳐
주고 우리 형제처럼 같이 지내면 된다, 그리 하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스님은 형제처럼 지내세요. 저는 오늘 여기 방문을
나서면서부터 나는 일타 스님 상좌요 하고 소문 내고 다닐 겁니다’ 했죠. 나중에 위에서 제가 일타 스님의 상좌인지를 확인하러 와서 ‘상좌로
승낙했느냐’고 물으니까 일타 스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저는 혜인이 된 거죠.”
일타 스님 이야기를 하던 혜인
스님은 갑자기 “내가 정말 아무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는 거 보여줄게” 하면서 일어섰다. 잠시 후 그는 노트 한 권을 들고 와 펼쳤다. 일타
스님은 오른쪽 손 12마디를 태워 부처님께 바치는 연비공양으로도 유명하다.
“이게 우리 일타 큰스님 글씨예요. 일타 큰스님은
손가락 4개를 불태웠기 때문에 이게 손가락 하나로 쓴 글씨예요. 손가락 하나로 썼는데 이 펜글씨 좀 봐요. 이게 예술이에요. 다섯 손가락이
멀쩡한 저보다도 더 잘 쓰셨잖아요. 나중에 제가 전시장에 전시하려고 합니다. 법문 같은 내용들이죠. 초서로 써 놔서 보통 사람들은 읽기
힘들어요. 저는 일타 스님 유품 아무것도 안 받고 이것만 받았어요.”
코피가 쏟아지고 무릎에 고름이 고이던 100만 배
혜인 스님이 자신의 법문을 적어 놓은 노트 사이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이 끼여 있었다. 혜인 스님은 종교는 다르지만 김수환 추기경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
—100만 배를 결심하게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제가 군대에 가기 전에 부처님이 너무 고마워서 20일 동안
5000배씩 10만 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 후에 ‘100만 배를 올리겠습니다’ 하고 부처님과 약속을 했죠. 코피도 쏟아지고 무릎에 고름이
고이기도 했지만 참고 또 참으며, 그 참는다는 것조차 잊어 가며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켰죠.”
—100만 배를 하고 난 후
뭐가 달라졌습니까.
“100만 배를 하기 전에는 제가 말을 잘 못했어요.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제가 있던 절에 낙성식을 할 때
큰스님도 오시고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오게 돼 있었어요. 인사말은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원근각처(遠近各處)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낙성식에서 인사말을 하는데 하도 떨려서 ‘에, 뭐냐 하면, 원근각처에서 많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원근각처에서, 에 그리고 원근각처…’ 말이 안 나오니까 자꾸 원근각처만 한 거죠. 제가 생각해도 원근각처 외에 다른 말은 생각이 안 나요.
그래서 제가 두 번 다시는 말을 안 할 작정을 하기도 했어요. 남이 강의하는 걸 보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떨지도 않고 잘하나. 사람
많은 데서 저렇게 말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나는 사람만 있으면 얼굴 벌게지고 덜덜 떨고. 절대로 인사말도 안 할 거다’ 하고 결심을
했어요. 그렇게 내가 말을 못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100만 배 후에 말문이 열렸다는 거죠?
“그렇죠. 법문이 열린 거죠. 그 후로 육군사관학교나 논산훈련소 같은 수백, 수천 명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 데에서도 하나도 떨리지 않는
거였어요. 게다가 문장력도 늘었어요. 상량문도 제가 짓고 비문도 제가 짓고 있어요.”
인터뷰 도중 혜인 스님의 노트에서 사진
한 장이 빠져 나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을 좋아하시나 보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죠. 종교는 비록 다르지만 마음으로 존경하고 흠모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분 글 가운데 ‘나는 바보다’ 하는
말씀이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 있어요. ‘야, 이 바보야.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나 걸렸다는 말이냐, 이 바보야!’ 하는
말씀이 참 좋은 말씀인 것 같아요. 누구든지 ‘사랑해야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슴에까지 와서 그 사랑을 건네줄 수 있는
그때가 돼야 진짜 사랑을 느끼고 줄 수가 있는 건데 생각만 하면 뭐 합니까. 그 말씀이 참 좋아요.”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만 존경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저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 내외도 참 존경합니다. 제가
살아온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넘어 이렇게 천지개벽되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 아닙니까. 국정을
부정 없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컨트롤한 분이 육 여사일 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 태어나서 자기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대통령이 맞아야 할
총알을 자기가 대신 맞고 돌아가셨으니까 자기 남편과 국가를 위해서 자기 몸까지 희생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분이 대통령 못지않게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현 대통령인 그분들의 따님에 대해서는요.
“제가 볼 때는 90점은 넘는
대통령이에요.”
—그 90점이 넘는 대통령을 퇴진하라는 종교인들도 있는데요.
“대통령 퇴진 운운은
종교인이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야당 정치인이라도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하물며 종교인이 그런 말을 해야 합니까. 아마 하느님이 계신다면
통곡하며 한탄하실 발언이지요. 저는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까지 모여서 이런 행동을 하며, 곳곳에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중요한 정책을 정해 놓고
공사를 진행 중인 곳에 들어가 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또한 일부 몰지각한 스님들까지 여기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면서
승복을 입고 다니기가 점점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이제 그만했으면 합니다. 물고기는 물 밖에 나오면 생기가 사라지는 법입니다. 종교가 교회나 사찰
밖으로 나와서 시위하는 모습은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제주 출신인데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제가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에 해군기지는 잘 알아요. 독도를 지키고 이어도를 지키려고 하면 해군이 분명히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스님 생각이 그렇다면 실천불교승가회 소속 스님들 야단 좀 치시죠.
“제가 야단쳐서
들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직 남아 있는
미움
대적광전으로 명명된 큰법당은 약천사의 중앙에 위치해 약천사를 대표하는 전각이다. 서귀포 앞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단일 법당으로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 약천사는 혜인 스님이 8년 6개월에 걸쳐 완공한 사찰이다. |
—스님에게도 미움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까.
“아직까지 수행이 잘 안 돼서인지 정치인이든 파렴치한 인생들을 보면
아직까지도 미운 사람이 깨끗하게 정리가 안 됐어요. 그것까지 정리가 돼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소화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스님은 경제권을 가지면 안 된다”면서 약천사 주지도 내려놓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건 신념이죠. 땅을 파고 건물을 지을 때 저는 포크레인 같은 존재예요. 포크레인은 땅을 파고 제 할 일을 다 했으면 다른 데 가서 일을
해야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흉물이 될 뿐이죠. 저는 자가용도 없어요.”
—큰스님으로서 덕담 한 번 해
주시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말씀하신 팔만대장경 중에 아주 간단한 생활법문이 있습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이지요. 사랑하되 네 편 내 편 나누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사랑이죠. 모든 사람을 내 친부모 형제
자식으로 여겨 눈물을 닦아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비요, 불공입니다.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면서 만나는 중생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고맙고 감사하고 편안한 느낌을 심을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하고요. 저 바닷물이 모두 술이요, 저 낙엽들이 모두 돈이고, 지구가 전부 내 땅이라고
해도 사람의 욕망을 채울 수는 없는 법이죠. 이만하면 만족하다는 생각으로 욕심의 불을 끄고,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보람은 돈과 명예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혜인 스님의 덕담은 아주 길게 이어졌는데 덕담을 주는 그의 얼굴은 세상을 초월한 듯 평온해
보였다. 초탈한 듯한 그의 생각을 이전투구의 세상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질문을 던졌다.
—스님! 혹시 장가들고 싶진
않았어요.
“장가를 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장가들라는 유혹은 두어 번 있었지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기 때문에 여자도 세상도
저는 잘 몰랐어요.”
—알았다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불교에 대한 신심이 아주 대단했어요. 지금
정도 같으면 그렇게 했을 거요. 늙어서 부질없다는 걸 아니까 이런 말도 하지. 저는팔자가 스님이었나 봐요, 허 허 허.”
스님의 방을 울리던 “허 허 허” 웃음소리. 그것은 공허한 웃음이 아니라 세속의 욕망을 이미 아주 멀리 넘고 넘어선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