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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문(全桂文)
전계문은 향제줄풍류를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한, 줄풍류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제적등본에 보면 전계문은 1872년 정읍군 태인면 태창리 49번지에서 태어나 1940년에 사망하였다. 본적에 무(巫)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계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세 오명창 중의 하나인 전도성의 수행 고수로 활동하였다.
최계월의 말에 따르면 전계문은 가곡,가사, 춤은 물론이요, 대금, 가야금, 거문고, 양금, 피리, 단소 등 모든 악기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는 말년을 주로 아양정에서 보내면서 풍류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기악 등 모든 음악을 도맡아 지도했다고 하니, 아양정의 실질적인 음악의 주체였던 셈이다. 최계월은 1937년부터 아양정에서 전계문에게 직접 가곡, 가사와 춤을 배웠으며, 정경태에게 양금을 배웠다 한다.
정경태가 만든 풍류계보에 보면 전계문의 스승은 허창이라 되어 있는데, 허창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전계문의 제자로는 단소의 명인인 전추산, 거문고의 대가인 김용근, 대금의 신달룡, 피리의 정형인, 가곡의 인간 문화재 전경태 등을 들 수 있다. 최계월은 신달룡을 당시에 젊은 사람으로 모든 악기에 능통하였지만 특히 대금을 잘 불었다고 회고한다.
전계문
(이 사진은 김기남의 손자 김대현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여럿이 찍은 사진을 조금 확대한 것이다. )
전추산(全秋山)
전추산은 전계문의 뒤를 이어 향제풍류를 더욱 발전시켜,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전추산(全秋山)의 본명은 용선(用先)이며, 추산(秋山)은 호이다. ‘추산’은 본래 정읍의 옛 지명의 이름인 초산(楚山)에서 따온 것인데, 후에 추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제적부에 의하면, 1890년(단기4223년) 정읍군 입암면 천원리 474번지에서 전희조(全希祚)의 장남으로 되어 있다. 1921년에 정주시 시기동 354번지로 이사를 하였으며, 1965년 11월 3일 전주시 태평동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실제 출생 시기와 제적부의 기록이 다른 것 같다. 정경태가 조사한 향제풍류 계보에 戊子년(1888년) 생으로 되어 있고, 예용해가 쓴 <인간문화제, 어문각, 1961.>에서는 73세 노인이라고 쓴 것을 보면 1888년생이 실제 나이인 것 같다. 당시에 출생 신고를 바로 하지 않아 나이가 다른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예용해는 추산이 녹두장군으로 이름난 정읍 고부 중농가 사형제 중의 셋째로 태어났으며, 단소를 처음 분 것은 17세 때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추산이 자기를 소개한 것이라 했다.
정읍문화원에서 발간한 「문화예술사」에 보면, 추산은 태인면 낙양리가 고향이며, 일부에서 고부가 고향이라고 한 것은, 추산이 한 때 고부면 백운리 곽승규 씨 집에서 요양을 하느라 오랫동안 산 적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말대로 한다면 추산은 태인에서 태어나서 입암으로 이사를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1948년 호적이 불에 타서 다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정경태 계보에 따르면 추산은 전계문에게 풍류를 배웠다. 단소, 대금, 양금, 해금, 가야금 풍류를 하였으며, 거문고는 배우지 않은 것 같다. '예용해'는 추산이 17세부터 단소에 빠져 서당 공부를 작파할 정도였다고 한다. 단소 솜씨가 신에 비유할 만큼 탁월하여 죽신(竹神)이라고 했다. 오늘날 추산을 신소(神簫), 소선(簫仙)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추산은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내고 그 가락을 끊임없이 갈고 다듬었다고 하는데, 아마 산조 음악을 짤 때 일인 것 같다. 한번은 산사에서 깊은 밤에 단소를 불고 있으니 인근의 중이 잠을 못 이루고 올라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고 칭찬을 하였다고 한다. 추산이 단소 산조를 짜서 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 산조보다는 풍류를 더 중시하고 즐겨 연주하였다고 한다.
"전주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 새 구례에 가 있고, 구례를 찾으면 진주로 갔다고 하고, 진주로 가보면 어느새 대구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여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고 예용해는 말한다. 이로 보면 추산은 천성이 한 곳에 머물기를 싫어하여 평생을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정읍에 살다가 6.25 후에는 전주 전매서에 다니는 아들을 따라와 전주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 때에 주로 구례, 진주, 대구 등지를 떠돌며 곳곳에 제자들을 두어 오늘날 추산의 풍류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전추산은 대부분 정읍에서 살았다. 그러나 정읍에 정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협률사와 공연을 하러 다닐 때 후포에서 편재준을 만나 제자로 거두었다고 한 때가 전추산이 30세쯤이다. 젊은 시절을 대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며 살았다. 추산이 아양정에서 활동한 것은 1931에 만들어진 아양계역원록에 전홍룡(全洪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양계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아양정에서 활동을 한 것 같다. 이때에 부안에도 자주 들러 음악을 가르쳤다. 전추산이 아양정에 머물러 있는 동안 정읍에 많은 인물들이 추산에게 풍류를 익혔다. 이것이 오늘날 정읍풍류의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추산은 말년에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어느날 목침을 높게 베고 누워 단소를 불다 쓰러져 죽었다고 하는데, 그 때의 단소 소리가 그렇게 슬펐다고 한다.
추산은 성격이 괴팍하여, 제자를 가르칠 때 한 번 연주를 해 주고 따라하지 못하면 가르치기를 그만 두었으며, 녹음하는 것도 아주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직접 연주한 음악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일하게 서울음반에서 낸 <신비의 가락 추산 전용선 단소>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국립국악원 국악진흥회에서 국악상을 받은 전추산(1963)
김용근(金容根)
김용근(金容根)은 1885년 이리에서 태어나서 주로 태인에서 살았으며, 1963년에 사망하였다. 금사(琴史)는 그의 호다. 호는 거문고를 중흥할 사람이라고 해서 대구의 서석재가 지어준 것이라 한다. 말년에는 주로 금은거사(琴隱居士)라는 호를 즐겨 썼다고 한다. 김용근은 조선조말 당대 최고의 거문고의 명인인 김경남에게 거문고를 배웠으며, 풍류와 가악에 통달하였다. 죽헌 김기수는 김용근을 한말 이래 최고의 거문고 대가라 평하고 있다. 정경태도 금사의 거문고가 아주 뛰었났다고 말하고 있다.(蒼岡生前 琴史先生 玄琴伴奏, 石菴이 執鼓 同時 南女唱 配伴으로 부를 때 洋琴歌曲을 全部 외워 쳤으며, 三人組 10年餘에 琴史彈法이 優越해졌음)
최계월의 말에 따르면 김용근은 아양정에서부터 풍류를 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1930년대부터 1950까지인 것 같다. 한국전쟁(6.25전쟁) 때, 아양정의 주인 김기남이 사망한 후 아양계가 해산되자, 김용근은 나용주와 함께 초산율계를 조직하였다. 초대 회장이 되어 정읍 풍류의 탄탄한 바탕을 만들었다. 김용근은 실로 정읍 풍류의 역사이며, 정읍풍류를 이끌어온 실제적인 주역이다. 김용근의 풍류는 정읍에서만 머물지 않고, 흥덕 아양계에도 참여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김용근은 정읍 풍류의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출생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정읍 신태인이라고 하는가 하면, 익산에서 태어나서 1920년에 신태인읍 또는 태인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기도 한다 <정읍문화예술사>. 본인이 조사를 한 바로는 익산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태인이나 신태인에 제적부가 없으며, 익산에 제적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최계월은 김용근이 신태인에서 '식도락'이라는 큰 유곽을 운영했다고 한다. 전경태 <국악보>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은 현재 신태인 우체국 근처에 유곽이 있었다고 한다.
남상숙 교수의에 따르면, '김용근이 거문고를 김경남에게 배우기 전에 전계문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그에게 배운 사실을 숨기고 김경남에게만 배운 것처럼 행세했기 때문에 전계문의 아들 전석동이 그를 멀리했다'고 한다.
김용근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남상숙 교수의 도움을 얻어, 서울에 살고 있다는 아들을 찾았다. 애석하게도 아들은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고 그 집에는 손녀가 살고 있었다. 손녀는 김용근의 둘째 아들 손자가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며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손자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자료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남상숙 교수가 다시 연락을 하여 신문 자료와 몇 점의 사진을 구하였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사랑채 토방 위에 즐비한 신발들, 창호지를 떨리며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항상 많은 사람들이 거문고를 배우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들 김인곤이 아버지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일간스포츠 1983 . 5 . 23)
금사 김용근
아버지의 거문고를 타고 있는 아들 김인곤 화백
남상숙 교수의 노력으로 어렵게 찾은 금사의 묘소, 묘에는 두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남상숙 교수가 보고 있는 비석에 계원들과 문인들의 이름이 있다.
김 윤 덕(金允德)
김윤덕(金允德)은 1918. 12. 21(음)에 정읍시 입암면 신면리 686번지에서 태어나, 1978년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전경태 계보도에는 丙辰(1916)으로 되어 있어 호적과 다른 것이 아닌가 하였으나 가족(김정숙,막내딸)에게 확인한 결과 정확하게 띠가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1918(戊午)년 생이 맞다. 호는 녹야(鹿野), 1930년에 천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에 정읍공립농업고등학교(현 정읍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에 정자선에게 양금풍류를 배웠으며, 오화동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1934에는 김광석에게 가야금풍류를 배웠으며, 1935년에 김용근에게 거문고를 배웠는데, 오늘날 김윤덕 풍류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1945년부터 대한국악원에 국극사로 활동을 하였으며, 1946년에는 정남희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48년부터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국악원 국악사 겸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국악예술학교에 재직하였다.
1968년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호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향제풍류에 대한 애착이 많아, 1970년대 중반 예술학교에 재직할 때에 이리 풍류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 이리 풍류를 문화재로 지정하게 하였다.
그외 유럽순회 공연등 을 비롯한 수차례의발표회를 하였고, 서울대학교 등 여러 학교를 출강하였다. 가야금과 거문고 풍류 악보와 산조 악보를 직접 정리하였다. 김정숙은 아버지께서 평생 악보를 고치고 정리하셨다고 말한다.
편재준(片在俊)
편재준은 정읍에서 활동한 사람은 아니나 정읍 풍류 논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 여기에 정리해 둔다. 편재준(片在俊)의 본명은 玉石이며, 在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在俊이 맞다. 제적부에 의하면 1914. 6. 14.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7번지에서 태어나서, 1979. 4. 12.에 사망하였다. 주로 흥덕에서 살았다. 조카를 양아들로 두었는데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현재 김소희 고택 뒷집에서 살았는데 집은 남아 있지 않다.
편재준은 맹인으로 퉁소를 잘 불었다. 편재준 이후 남한에서는 퉁소의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전추산이 사포에서 협률사 공연을 할 때, 맹인 아이 하나가 구경을 하는 것을 보고 “저런 아이가 단소를 불면 잘 불텐데.”하며 그 아이에게 단소를 하나 주고 갔다고 한다. 전추산과 편재준은 이렇게 인연이 맺어졌다. 다음 해 다시 와서 보니 제법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영선씨(재준의 동생 변산에 살고 있음)의 말에 따르면 이 때가 10여 세쯤 되었을 때라 한다. 이 때부터 전추산은 편재준에게 풍류를 가르쳤다. 5년 여의 풍류를 배우고 돌아온 뒤, 주로 흥덕에 살았다. 말년에는 주로 퉁소를 불었는데, 퉁소는 고창에 사는 유봉이라는 봉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편재준은 음악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대금, 북, 가야금, 양금에도 능했다. 맹인임에도 양금을 타는데 다른 줄을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편재준은 주로 퉁소를 불었는데, 특히 새타령을 잘 불었다. 멀리서 날아오는 새의 소리를 내는데, 진짜 새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서울에 대회를 나가, 결선까지 올라갔는데, 누가 퉁소의 청에 구멍을 뚫어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편재준은 말년에 아편 중독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아편에 중독된 국참봉 후처의 아편 심부름을 하면서 아편에 손을 댄 것이다. 오늘날 녹음된 음악이 하나도 전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김요성은 편재준에게 가야금을 배웠는데, 악보는 석암보와 같다.
보이는 집은 김소희 고택이다. 김소희 생가 뒤에 편재준의 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편재준이 불었다는 퉁소와 같은 퉁소(김문선 소장), 김환철이 제작한 것이다. 김환철이 편재준에게 퉁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김환철은 퉁소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관하고 있었다.
첫댓글 오늘 원장선생님 글을 접하면서 자신을 재충전 하는 다스리는 시간을 갖게합니다 .
이글 이대로 통문에 기사로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향제 줄풍류를 비롯한 전체적인 글들을 이렇듯 순서를 두고 김문선 선생님이 기고하신것으로 하고 한주에 하나씩 올리면 좋지 않을까요? 허락 하시면 제가 글은 바로 갖어 가겠습니다.^^
더 정리를 한 후에 하지요, 한 주에 하나씩 쓰기가 쉽지 않네요
전추산 선생의 출생년도 중에 1988년은 잘못 표기 된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1888년입니다.
좋은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