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풍차라는 뜻을 가진 전설 속의 클럽 [물랑루즈]는, 등이 굽었던 화가 로트렉의 그림과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신비의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말, 파리에 세워진 이 전설 속의 클럽은 아직도 그 간판을 걸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세기말의 암울한 불안과 비극적 정서가 팽배해 있던 1890년대의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그 광휘로운 휘광만으로도 방문객들을 충분히 압도한다.
이미 [댄싱 히어로][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영화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었던 바즈 루어만 감독은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 세워진 [물랑루즈]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완성한다. 호주에서 만들었던 [댄싱 히어로]는 바즈 루어만 감독의 출세작이다. [더티 댄싱]이나 [풋루즈]같은 할리우드 댄스 영화들과 분명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던 [댄싱 히어로]의 성공은 바즈 루어만 감독을 할리우드로 불러냈다. 다른 대륙의 명감독들을 불러서 할리우드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영화공장 할리우드의 생존전략은 항상 변화가 있는, 그러면서도 블록버스터의 상업성을 벗어나지 않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영화들을 양산해낸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으면서도 체제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할리우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기용해서 전혀 새로운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권총을 든 로미오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펑크적 감성과 미국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해주는 MTV 스타일의 속도감 있는 카메라 워크로 독창적인 영화미학을 창출했다. 그러나 기존 가치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위험성은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올해 칸느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물랑루즈]는 거대 제작비가 투입된 화려한 뮤지컬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이 제공할 수 있는 뮤지컬적 화려함 속에서 바즈 루어만 감독은 영생의 꿈을 꾼다. 그는 그 자본주의적 극단이 갖고 있는 틀 안에서 오르페우스 신화에 의지해 사랑의 불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난 신화에 기반을 둔 단순한 줄거리를 창조적이고 이국적인 또 다른 세계로 승화시키려는 작업을 계속 해왔다. 영화 [댄싱 히어로]에선 볼룸 댄싱이 그 배경이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슬픈 베로나 해변이, [물랑루즈]에서는 1900년 파리의 화류계가 각각 그 무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대개의 영화는 관객을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로 몰고 간다. 관객으로 하여금 열쇠구멍으로 현실을 구경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꿈꾸려는 관객을 계속 깨우는 극적 장치를 곳곳에 마련해둔다. 그 장치가 [댄싱 히어로]에선 춤이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400년전 세익스피어의 언어였다. [물랑루즈]에서는 음악, 혹은 노래가 그 장치이다]
이러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발언은, 허구적 이야기와 완벽한 동화를 통해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감정이입에 의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소위 브레히트적 서사효과처럼 이야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시선에 의한 객관적 분석을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 영화적 내러티브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영화 [물랑루즈] 속의 노래는감독의 말처럼 관객을 쉴새없이 깨어있게 하면서 영화 속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몽환적이고 도취적인 장치로 이용된다. 감독은 다른 할리우드의 마취성 강한 쾌락적이며 상업적 영화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할리우드 볼록버스터가 갖고 있는 본질적 속성, 관객의 감정이입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러티브를 전개시켜 가는 주요 대사가,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형식을 갖춘 뮤지컬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비대중적 장르에 속한다. 그러나 [물랑루즈]는 뮤지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일반 관객들에게도 친화력을 발휘하며 다가갈만큼 춤과 노래가 서사적 구성을 크게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핵심 공간인 19세기 말의 나이트 클럽 [물랑루즈]는 호주에 있는 20세기 폭스사의 방음 스튜디오에 셋트로 재창조되었다. 퇴폐적 화려함과 신비로움을 함께 갖춘 이 공간은 그 자체가 영화의 또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제작진들은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실증적 고증과 함께 작가적 상상력으로 클럽 물랑루즈를 만들었다. 당시의 현실 공간 그대로를 재현하기 보다는 감독의 작가적 상상력의 연장선상에서 예술적으로 과장된 화려한 볼거리를 지닌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곳은 수많은 무희들이 팔장을 끼고 다리를 머리 높이까지 번쩍 들어올리면서 팬티까지 그대로 노출되는 캉캉 춤으로 대표되는 곳이지만, 그곳을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영화 속에 묘사된 클럽 물랑루즈의 가장 볼만한 부분은, 3층짜리 코끼리집이다. 실제로 당시 코끼리 집에는 아랍풍의 신사클럽이 있었다고 하지만 영화 속에서 코끼리 집은 클럽 물랑루즈의 대표적 여가수인 사틴의 붉은 방이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로 이 방에서 사틴과 크리스티앙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갖는다.
물랑루즈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분리된 계급층을 만나게 한 가교 역할도 했었다. 돈 많은 귀족 계층과 가난한 예술가나 노동자들이, 모두 다 함께 젊고 아름다운 무희들의 캉캉춤을 보면서 즐기는 공간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천한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귀족 계급의 파트롱을 열망했던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여가수 사틴(니콜 키드만 분)은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남자는 단시 출세와 성공을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돈 많은 공작은 여전히 사틴을 유혹한다. 클럽 최고의 무희를 둘러싼 애욕의 삼각관계라는 소재 자체는 얼마나 대중적이며 말초적인가. 그들의 사랑이 외부에 노출되면 두 사람 모두 치명적 위험을 맞게 된다. 클럽 [물랑루즈]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공간이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금기였다. 금기에의 도전, 영화는 이 위험한 영역으로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는 젊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본질적으로 [물랑루즈]는 뮤지컬이다. 따라서 스토리 전개의 주요 부분은 노래 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노래는 단순히 음악적 장치가 아니라 극을 끌고 가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당연히 주연 배우들은 라이브로 노래를 수준급으로 부를 수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톰 크루즈와의 결별이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터져나왔던 니콜 키드먼은 창백한 매력을 최고도로 발산한다. 이 영화는 그녀를 위한 영화가 되었다. 호주 출신의 소외감을 극복하고, 그리고 남편이었던 톰 크루즈와의 이혼설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열연은 인상적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근원 회귀의 영웅 신화이다. 악을 제거하고 사랑의 빛을 가져다주는 영웅 역할이 영화 속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맡은 크리스티앙 역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는 이 영화를 위해 그래미상 수상 작곡가인 데이빗 포스터가 만든 사랑의 이중창 [come what way]를 함께 부르며 사랑의 감정을 서로에게 실어나른다. 영화 속에서 클럽의 무희인 니콜 키드먼은 [sparkling diamonds][one day i'll fly away] 등의 노래를 솔로로 불렀다. 오페라와 팝, 락,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뒤섞여 있지만 감독은 그것들을 훌륭하게 대사 전달의 중요한 창구로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