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자 사사카(佐板)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밖의 삼괴 지역으로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3월 30일의 발안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시위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3월 30일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장날시위는 삽시간에 8백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의 독립만세 물결로 퍼져 나갔다. 군중들이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자 일본 순사들은 위협사격을 가했고,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급기야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롤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가 칼에 맞아 순국하였고, 제암리·고주리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렇게 발안장날 시위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의 제휴를 기본축으로 하여, 폭력까지 수반하여 격렬하게 진행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더불어 제암리 감리교회의 지도자 홍원식(대한제국 군인 출신, 군대해산후 수원 일대에세 의병장으로 활약, 1914년 제암리로 이주하여 서재를 세우고 교육계몽운동 전개), 안종후(제암교회 설립자) 등과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 등이 종교의 차이를 떠나 거족적 차원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구국동지회'가 만세시위의 배후에 있었던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제가 자행한 보복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30일,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 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
진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토벌 작전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제암리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한 것이라든가, 순사 보를 통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고주리에 천도교 지도자들을 파악해 살해한 것 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현장을 확인하러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코필드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암리사건은 제암리·고주리사건이라 불러야 합당하다.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는 비록 면 단위는 달랐지만 경계를 맞대고 이웃해 있는 마을들로서 발안장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학살만행 또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선상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암리사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것이 외국인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의 관심이 제암교회에 대한 방화와 기독교인 학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흔히 제암리 기독교인들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암리의 경우만 해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천도교인이고 독립만세운동은 고주리의 경우 천도교 지도자 가족 6인으로 희생자 23명 가운데 11명이 천도교인으로 10명의 기독교인(종교미상 2명) 못지않은 수를 차지하였고, 고주리의 경우는 6명 모두가 천도교인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천도교인(17명)이 기독교인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제암리·고주리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제휴를 기본동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검거반이 편성·파견된 이유로는 첫째, 3월 28일 사강리에서 경찰관 주재소가 파괴되고 노구지(野口) 순사부장이 살해된 일, 두번째, 28일 오후 1시 오산에서 금융조합 및 일본일 가옥이 불타 2만 2천 여원의 손해를 보았고, 29일에는 800여 명의 한인이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일본인 가옥 들을 파괴하며 오산역을 습격한 일, 세번째, 3월 30일 발안장에서 1천명의 노상 연설 만세시위, 또 일본인 소학교 방화,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위 산상 80여 개소에서 봉화를 올려 일본인 가족 43명이 피난을 가게 된 일, 네번째, 3월 31일 밤 안성군 양성에서 약 2천명이 모여 경찰관 주재소·우편소 및 면사무소를 파괴·방화하는가 하면 전주(電柱)까지 쓰러뜨렸던 일, 다섯번째, 3월 31일 안성읍내에서 오후 5시에 약1천명이 모여 운동을 해서 군인까지 동원되어 가까스로 진압했던 일, 여섯번째, 4월 3일 약 1천명이 장안·우정면 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며 가와바다(川端豊太郞)순사를 살해한 일 등의 과격한 운동이 3월 28일 이후 계속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기도 경무부장이 검거반을 편성,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파견된 자가 경기도 경무부 경시(警視)이며 경성헌병대 부관 하세베(長谷部) 대위이다. 그는 4월 2일 헌병·순사 11명을 이끌고 먼저 안성군 양성방면에 출동해서, 원곡면을 지나 양성방면을 가는 길가에서 주동자들을 검거한 후, 안성에 4명의 부하를 남겨두고 4월4일 귀대하였다. 귀대 후 그는 수원서장으로부터 4월 3일의 화수리 방면의 시위와 4월 5일 장날을 기해서 발안장에 1만 2천여명의 운동원이 모일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4월 4일 오후 6시에 발안장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지키며 화수리 방면의 정황을 알아보는 한편, 6일 오전 1시에 헌병 경찰관 9명 및 보병 5명을 이끌고 수촌리로 가서 6명을 검거하고 수원을 거쳐 서울로 귀대하였다.
이 때 수촌리가 제일 먼저 보복을 당한 이유는 화수리 운동의 주동자 천도교 전교사 백낙렬,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이 수촌리에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수촌리 동민들은 깃대에다 '조선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는 글을 써가지고 나왔을 뿐 아니라 화수리 사건의 주동자 27인가운데 수촌리인들이 14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아침 수촌리는 많은 집들이 불탔고 그 가운데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회당도 함께 불탔다. 그리고 왜병의 총검에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다. 4월 15에도 또 한차례 보복을 당하였다. 이때 수촌리에는 4호만 남고 38호가 전소되었다. |
|
|
|
| |
|
4월 2일부터 6일까지의 1차 검거로도 만세시위가 진정이 되지 않자, 4월 9일 쓰무라(律村) 헌병특무조장 아래 하사 이하 6명과 경찰관 4명이 고옥(古屋) 경찰서장 이하 7명과 보병 15명의 협력을 얻어 3개반을 편성하여 오산·화수리 반도 및 사강 반도로 검거를 또 다시 나섰다. 우선 검거반을 4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산면 소재지에서 검거하고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그 부근 부락 8개리에서 검거를 했다. 또 다시 4월 10일 오전 4시에 오산에서 검거를 실시해서 주동자인 감리교회 목사 김광식 이하 63명을 검거하여 수원경찰서로 이송하고, 곧 바로 발안장으로 가서 그날 밤부터 11일 오후 5시까지 화수리를 중심한 그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204명을 검거하고 증거물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2일에는 남양으로 가서 13일 오전 3시부터 팔탄면 하저리 부근의 부락 4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5명을 검거하였다. 다음날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사강리를 중심한 그 부근 송산면·마도면·서신면의 부락 20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175명을 검거하고 증거품 여러점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1,202명을 방면하였다. 화성지방 검거 및 손해상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송산면 |
사강리 |
|
마산리 |
|
육일리 |
|
봉가리 |
|
삼존리 |
|
장문리 |
마도면 |
해문리 |
서신면 |
전곡리 |
|
상안리 | |
|
|
|
이상 175명 |
우정면 |
조암리 |
|
화산리 |
|
한각리 |
|
화수리 |
팔탄면 |
하저리 |
|
창곡리 |
|
기천리 |
|
고주리 |
|
노하리 |
|
가재리 | |
|
|
|
이상 204명 |
장안면 |
수촌리 |
|
석포리 |
|
독정리 |
|
장안리 |
|
어은리 |
|
사곡리 | |
|
|
|
|
|
28
|
23
|
5
2 |
이상 63명 |
계 |
329 |
46 |
22 |
442 | * 소밀(騷密), 弟745호號, 대정(大正) 8년 4월 23일, 조선헌법대사령관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고지마(兒嶋摠次郞)의 보고
이렇게 검거반이 활동할 때는 검거만이 아니라 많은 집들이 불탔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화성지방 10개면 63개리에서 329채가 불탔는데, 그들 자신도 화재의 원인은 야간에 있어서의 혼잡과 바람이 강하였기 때문에 실화(失火)한 것도 있을 것이나 검거반의 방화(放火)로 인한 것도 적지 않음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상 이를 인정함은 적당하지 않아 화재를 표면상 전부 실화로 인정하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서 불에 탄 집들은 거의 다 방화로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제 2차 검거반이 보복 만행을 하는 가운데 특기할 사실은 사찰 1개를 불지른 것이다. 이것은 화수리 앞산 솔밭에 있는 봉래사인데 그 때 주지 박금봉(朴錦峰)은 불길에 놀라 밖으로 나와 불을 끄다가 수비대에거 붙들려 고문 끝에 다리 뼈가 부러져 평생 불구자가 되었다. |
|
|
|
| |
|
제암리
2차 검거반이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삼괴반도(三槐半島) 및 사강반도를 휩쓸며 검거하고 있을 때, 4월 13일 보병 제79연대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발안장의 수비를 명령받고 도착하였다. 그들은 4월 15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 4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 운동자들을 해산시켰으나. 기독교인들이 또 다시 운동을 하였다. 그동안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이르는 발안의 3·1운동은 그 원인이 제암리의 천도교 및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것은 안 아리타(有田)는 또 다시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하 11명과 순사·순사보를 이끌고 당일 오후 3시경 제암리로 향했다.
이들은 주일날이 아니므로 특별이 훈시할 말이 있다 속여 40세 이상 된 남자는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하였으나 모이지 않자 15세 이상은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교회당으로 모일 때, 정문 앞에서 수비대는 오는 사람마다 키를 재어서 총길이 보다 작은 아이는 돌려보내고 큰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교회당에 모인 주민에게 훈계를 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동민들에게 기독교의 교지(敎旨)를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안(安)이라는 기독교인이 일어나 성서는 인간 상호간에 친밀하게 지낼 것과, 신을 경건하게 섬기고 받드는 것과, 신은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헌병 중위는 기독교도들의 행위을 그 교리에 어긋났다고 일갈하더니, 교회당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뭐라고 세번 날카로운 구령을 외쳤고, 그 구령에 맞추어 입구에 섰던 병사들이 교회당 내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 오르고 쓰러지는 수라장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김정헌(金正憲)·안경순(安慶淳)·홍원식(洪元植)·노경태 등은 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정헌·안경순·홍원식은 교회당 밖에서 일병에 의해서 타살되었고, 노경태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또 사랑하는 남편의 불행한 급보를 듣고 달려온 홍원식의 부인 김씨, 그리고 강태성의 부인 김씨도 일병에 의해 타살되었다. 이 때의 교회당 안팎에서 불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다름과 같다.
안정옥(安政玉)·안종린(安鍾麟)·안종악(安鍾樂)·안종환(安鍾煥)·안종후(安鍾厚)·안경순(安慶淳)·안무순(安武淳)·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안유순(安有淳)·안종엽(安鍾燁)·안필순(安弼淳)·안명순(安明淳)·안관순(安官淳)·안상용(安相鎔)·조경칠(趙敬七)·홍순진(洪淳晋)·김정헌(金正憲)·김덕용(金德用)·강태성·동 부인 김씨·홍원식·동 부인 김씨 이렇게 23인이 순국하였다. |
고주리
제암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병들은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이웃마을 고주리로 갔다. 이 마을은 일찍이 천도교가 들어와 전교실을 두고 고주리를 비롯한 제암리·가재리 등지의 천도교인들을 지도하였다. 방금 제암리 교회당을 불태운 군인들은 이제는 천도교 전교실을 불태우고 천도교 일가를 학살하기 위해 고주리로 갔다. 그들은 전 부락을 완전 포위하고 김흥열(金興烈)·김성열(金聖烈)·김세열(金世烈)·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 등 6명을 밧줄로 결박하여 뒷간으로 끌로 올라가서 칼로 차례차례 목을 베고 난도질을 하여 참혹하게 죽였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밖에 나와서 이 광경을 보려고 하면 사정없이 칼로 목을 쳐 죽인다고 위협하면서 못보게 하였다. 왜병들은 6명의 시체를 노적가리까지 끌고 가서 노적가리와 시체를 함께 불살라 버렸다. 이렇게 참혹하게 순국(殉國)한 이들은 한 집안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형제간들이며, 열렬한 천도교신자로서 동리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리고 평소 독립운동에 앞장 서 왔으며 또 왜경들의 무리한 요구나 박해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던 애국지사들이 일가로 지목되어 오던 터이라, 왜경들은 그러한 김씨 일가를 학살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씨 일가족의 남자들이 전멸하는 중에서도, 당년 9세인 김덕기는 어린 나이에 조부·부친·삼촌 등 6명이 전부 소살(燒殺)당하는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해! 같이 죽여라!'하며 왜병들의 서슬이 퍼런 총칼 속으로 뛰어 들며, '왜 우리 집 어른들을 모두 죽이느냐!'고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이때 무자비한 왜병 1명이 구두발로 걷아차서 울타리 밑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 김덕기는 몸을 일으켜 또 다시 덤벼들려 하는 것을 그의 형수되는 분이 김씨 일가의 남자라고 이 소년만이 유일한 생존자인 것을 깨닫고, 이 소년을 끌어 당겨 치마 폭에 감추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왜병들의 만행에 격분한 동민들은 산상에 봉화를 올리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한편, 왜병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역사적 의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