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새울,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 대부분이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명을 탄생 시켰습니다. 진천출신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를 합친 숫자입니다. 순교자 탄생 후 일시적으로 교우촌은 와해 되기만 하였지만 박해가 종식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복음의 새터전으로 닦아 나갔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까따꼼바이며 스스로 찾아 온 복음의 진리를 온 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순교자와 백색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의 거룩한 땅입니다.
최 신부는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와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일시: 2016년 6월 18일. 오전 06:30,
모이는 장소; 반포대교 남단 현대증권 앞
준비물: 미사준비(봉헌또는 예물),타우 십자가, 묵주, 기도서, 모자, 손수건, 선그라스, 생수, 커피 또는 녹차와 기타차, 참례와 걷기에 편한 복장과 신발, 행동식과 기호식, 스틱, 비상용 비옷(우산이나 비늴 비옷)
일정표
일 정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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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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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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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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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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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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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현대증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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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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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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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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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 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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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린다 자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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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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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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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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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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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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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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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박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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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와 기도(칼렌 강신부님, 피신처와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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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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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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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최양업신부, 사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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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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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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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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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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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으로 이동 미사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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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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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계곡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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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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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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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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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걸음여행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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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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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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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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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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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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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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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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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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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회차
기념 및 종신서약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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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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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막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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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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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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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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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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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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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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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자 명단
6월에 삼박골 순례로 정한 이유는 상주, 문경 등 안동교구권내 성지순례를 하면서 마원 성지와 한실성지를 순례 때 박상근 마티아와 칼렌강신부님과의 아름다운 우정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험난한 박해의 현장인 조선을 탈출하신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 중 카렐강신부님도 포힘되신다. 신부님께서는 병약해 지신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조선교회를 위한 기도내내 하시다 선종하신다. 박상근 마티아와 한실 삼거리부근에서 헤여진 후 박상근 마티아는 곧 체포되어 상주관아에서 순교로서 선종하지만, 강신부님은 연풍과 진천을 거쳐 삼박골에 은거한 후 배티 를 넘어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엽돈재를 거쳐 성거산 교우촌에서 숨어 계시다 다른 두 신부님과 함께 내포를 통해 서해를 건너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의 박해 실정을 주교에게 고한다. 컬레강신부님을 다시 한번 기억하려고 잡은 일정이다. 또한 6월 종신서약을 받는 형제들이 있어 축하의식을 산막에서 갖고자 이 곳으로 정한 것이다. 샬롬~
평이한 편이다.
녹음이 짙고 각종 야생화가 길 섶마다 피어 있어 걷는 이들을 반기고 숲 터널은 빛을 차단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묵상하며 걸을 수도 있고 정상에서 1시간 정도 더 걸으면 배티성지 야외 미사성전으로도 내려갈 수 있다.
정상 전망대에 올라 서서 서북방향을 조망하면 안성시 일대와 맑은날은 평택, 안중권역까지도 살필 수 있다. 전체적으로 2시간 정도 계획을 잡으면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 올 수 있지만 계획은 여유있게 잡아 두었다.
첫댓글 이향임 세실리아 신청합니다^^
이향임 세실리아 간만이네~
그동안 어머님 간호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지.^^
이제 함께 순례걸음 여행할 수 있어 반가워요.
서희정 마르티나, 박요한나.. 참석합니다
정영숙 안나 신청합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해요. 7월 중에는 꼭 참가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꾸벅, 7월에 뵙겠습니다.
이국희 모니카님 참석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보잡겠습니다. 꾸벅~~
동생 유글라라 (루피노 형제회 종신 회원)함께 신청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손님으로 잘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