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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왕방산 왕산사 지장전 주련 抱川 王訪山 王山寺 地藏殿 柱聯
왕산사 지장전
왕산사(王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5교구 본사 봉선사 말사입니다.
왕산사(王山寺)는 봉선사 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訪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무학 스님이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무르며 안정을 되찾고 가면서 부터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이 왕산사는 1572년 조선(朝鮮) 선조(宣祖) 5년에 청암(靑巖)과 백운(白雲) 두 스님이 고쳐 지었고 1627년 인조 7년에는 청산(靑山)과 무영(無影) 두 스님이 중창하고는 왕산사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본시 이동면에 소재한 흥용사에 전하는 백운산 내원사 사적기를 살피건대 1638년과 1648년에 백운ㆍ청암 두 스님이 흥용사의 본래의 이름인 내원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하였으니 이절은 그 보다 앞서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 합니다.
해방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제방으로 보임을 다니다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 터가 매우 수려함을 보고 들어오니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빈터에 천년석불(千年石佛)만이 지하에 묻혀있다는 현몽을 받고 백일기도를 봉행하여 마치는 날 미륵불이 현신하여 이 터에 인연이 있으니 잘 가꾸어 요익중생 즉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 하는 서상(瑞相) 을 나투었다 합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1947년에 초가삼간을 짓고 보덕사(普德寺)라 편액(扁額) 하고는 34년동안 수행과 포교에 힘쓰니 드나드는 불자 모두가 가피(加被)를 입어 명실 공히 이 지역의 기도처(祈禱處)로 자리매김 하였다고 합니다. 청매화상(靑梅和尙)의 뒤를 이어 화정화상(和靜和尙)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확고히 했으며, 지금의 주지 법해 스님은 포천 제일의 도량으로 가꾸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계십니다.
그 동안 이 지장전은 대웅전으로 활용하다가 지난 5월 16일 새로이 대웅전을 낙성함에 따라 지장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靈通廣大慧鑑明 영통광대혜감명 住在空中映無方 주재공중영무방 羅列碧天臨刹土 나열벽천임찰토 周天人世壽算長 주천인세수산장
영통하고 큰 지혜 거울처럼 밝으시고 허공에 계시면서 비추지 않음 없네. 벽천에 늘어서서 불국토에 임하시고 하늘에 두루하여 인간 수명 관장하네.
【註】
☞ 이 게송은 칠성청(七星請)에 나오는 칠성을 찬탄하는 게송입니다. 그런데 지장전에 걸려 있으니 격에 맞지 않습니다. 삼성각에 걸려야 마땅한 주련입니다. 시정되었으면 합니다.
삼성각(三聖閣):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모신 전각. 영통(靈通): 영묘(靈妙)하고 신통함. 찰토(刹土): 찰(刹)은 범어 Kṣetra의 와략(訛略)으로 차다라(差多羅)라 음역 함. 찰(刹)은 범어의 약(略)이며 토(土)는 그 번역으로 이것은 범어와 한 역을 같이 쓴 것임. 국토(國土)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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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들께서 실수를 하신 모양입니다. _()_
길상님께서 얼마 전 도봉산 산행을 할 적에 왕산사에 있는 대웅전 주련을 찍으셨다고 하시며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여 주시길래 기쁜 마음으로 보았는데 주련 내용이 대웅전에 어울리지 않아서 의아했었습니다. 그래서 준비실에 올려 주시면 올려 보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흘러 제가 왕산사에 가게 되었고 주련을 찍게 되었지요. 역시 그랬습니다. 누가 이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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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방사 주지스님께서 포천지역 포교를 위해 일심으로 힘쓰시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_()_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가 대단하십니다. 왕산사가 日新又日新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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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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