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 부용지이다.
부용지는 네모난 모양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두는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바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낳다는 조선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신선들이 논다는 삼신선산의 하나인 방장(方丈)이나 봉래(蓬萊) 또는 영주(瀛州)를 상징한 섬이다.
연못에는 서북쪽 계곡의 물이 용두로 된 석루조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동쪽 돌벽에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옛부터 집터를 마련할 때도 음. 양의 원리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산을 등지고 앞에는 물을 면하는 곳에다 정했다.
부용지역은 입지적으로 3면이 언덕으로 가려진 공간에다 제일 낮은 부분에 연못(부용지)을 조성하였다.
이곳 부용지의 특징은 땅위에서 흐르는 물이 고인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영화당에서 보면 오른쪽 모서리에 물이 흘러드는 곳이 있다.그것은 조경적인 의미와 연못의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는 형식적인 의미일뿐 그 물이 연못의 수량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창덕궁의 부용지는 굉장히 아름다운 연못이다.
부용정은 부용지 옆의 정자로 십자 모양을 하고 있고 두 다리는 연못에 담그고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한다. 살짝 치쳐 올라간 처마 끝 모습에서 연꽃의 모양이 연상된다.
그래서 부용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이 정자는 숙종 때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
정조 때 부용지로 고치면서 그 정자도 부용정으로 고쳤다고 한다.
부용정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십자형으로 생긴 정자 때문이다.보통 십자형으로 만드는 정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용정의 연못에 접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방보다 높게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왕의 자리로 정조가 낚시를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정조 임금이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마치고 돌아 온 후 이곳 부용지에서 낚시를 하며 만족해 했다고 한다.
정조는 자주 부용정을 찾아 풍류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정약용의 <부용정시연기>에 나오는 일화이다.
"부용정에 이르러 상(임금)께서는 물가의 난간에 임하여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연못 주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서 통 안에 넣었다가는모두 다시 놓아 주었다.
상께서는 또 여러 신하들에게 배를 띄우라고 명하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 데,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시키기로 하였다.몇 사람이 과연 섬가운데로 귀양갔는데 곧 풀어주었다.
또 음식을 올리게 하여 취하고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정조는 왕실가족과 신하들을 초청해 내원(內苑)잔치를 자주 베풀었다고 한다.
"내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래 이 직책에 있는 모든 자를 집안사람처럼 보았으니
오늘의 모임에도 마땅히 집안사람의 준례를 적용하겠다.각신 자제들의 참석도 허락한다."
정조가 원래 왕실 가족들만의 연회에 신하들에게도 개방하면서 규장각 각신들을 왕실 집안으로 여기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의 책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정조가 베플던 내원잔치의 모습을 옮겨본다.
이날 후원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데 한 마리를 잡힐 때마다 기(旗)를 들고 음악을 울렸다.
기분이 좋아진 정조는 자신이 기구(起句)와 결구(結句)를 지을테니 다른 신하들은 중간 두 구를 지어서 시를 완상하라고 말했다.
정조의 시구는 "내원에선 어조(魚藻)시를 노래하고/앞 연못엔 뛰어난 인재들 모여있네"라는 것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돈 후 정조는 부용정의 작은 누각으로 거동해 태액지(太液池)에서 낚싯대를 드리웠고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둘러서서 낚시를 하게 했다. 붉은 색 옷을 입은 신하들은 남쪽에서 초록 색 옷을 입은 신하들은 동쪽에서 낚싯대를 드리웠고 성균관 유생들은 북쪽에서 낚시했다. 정조는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는데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이 한 곡씩 연주되었고 끝나면 다시 못 속에 놓아주었다.정조는 배를 띄우고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짓지 못하자 귀양 보내겠다고 농(弄)했다.
실제 몇 신하가 짓지 못하자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귀양 보냈다가 곧 풀어주었다.
이날의 연회는 밤이 되어서야 끝났는데 정조는 어전(御前)에서 사용하는 홍사촉(紅紗燭)을내려 주어 밤길을 밝히게 하였다.

부용지 벽 돌위에 잉어가 새겨져 있다. 이 잉어는 물 위로 튀어오른 모습으로 배의 비늘이 위로 향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잉어가 거꾸로 물위에 떠 있다. 고개를 들어 돌에 새긴 잉어를 보지 말고 물 속에 비추어 지는 잉어를
편하게 내려다 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물에 비치어 지는 잉어는 등이 위로 한 정상적인 모습을 관람객에게
보이게 된다는 조경가의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이 잉어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로 비유해서 새겨넣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