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한 르호보암
역대하 11:13-17
13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14 이는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수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15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16 그러므로 삼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역대하 1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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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유대나라가 강성하게 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강성하게 된 비법이
나옵니다.
여호수아 1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는
형통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거는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으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책은
율법 책을 말씀합니다.
율법 책의 내용을 다 지켜 행하면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고
너는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이 까짓 것을 못 지켜?"
그런데 사람이 아무도 없이
혼자 조용히 있을 때는
율법 책을 펴며 기뻐할 수 있겠는데,
적들이 정면에서
무기와 화력과 발달된 기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공격 해오고 있는데
어떻게 율법 책만 붙들고
하나님 믿는다고
일이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나가서 잘못되었다고
고개를 숙이고 항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율법 책을 시시하게 여기면서
적들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겁을 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율법 책을 지키기 이전에
어떤 재물을 바치고
돈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들이닥치는 적들이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냐?
아니면 율법 책을 내 앞에 들이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의 관심이냐? 그걸 묻고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는 것은
앞에 눈에 보이는 환경과
난처한 처지보다도
오히려 하나님 말씀 듣기에 더
우선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없이 조용한 가운데서
말씀이나 지켜볼까 하는 담대함이 아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에게 굴복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있을 때,
네가 진짜 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겠느냐?
그것을 다그치시는 겁니다.
민수기 14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그를 쳐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는 모세의 말이
안 먹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 갈렙은
신기하고 놀랍게도
모세가 한 말을 수긍을 합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은 겁니다.
여러분, 누가 정상이며 비정상입니까?
우리의 상식 선에서는
모세와 갈렙이 비정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은 다 아시고
그 난처하고 황당한 상황 속에
우리를 던져 내버려두십니다.
그리고는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지목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담대하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13-14절에
레위지파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사장 선출 문제가 나옵니다.
여기서 레위지파가 나오는데
레위지파는 어느 지파 할 것 없이
온 이스라엘 땅인 남쪽과 북쪽 나라,
갈라진 나라 할 것 없이
다 거처했던 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원래 따로 모여 사는 지파가 아니라
각 지파마다 제사장들이 다
상주해 있어야합니다.
하나의 파견근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본부는 예루살렘이지만
지방마다 파견하기 때문에
흩어진 지파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레위지파가
갑자기 북쪽을 버리고
남쪽으로 우르르 몰려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북쪽을 점거하고 있는
여로보암 이라는 북쪽 왕이
레위지파를 모두 쫓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북쪽 나라는 비록 종교적인 형식은 있지만
여로보암의 정권 유지차원에서 만든
종교를 유지하고 있을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송아지 우상을
여로보암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조직 사회라할수 있는 겁니다. 조직사회에서는 교주말을 반대할 때,
교주 말고 여호와를 쳐다볼 때는
그 조직 사회에서는 추방되게 되어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회생활이라고
남의 돈 먹으려고 눈이 뻘건데
거기에다 빛과 소금이 되라것이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고작 눈에 보이는 죄짓지말고,
남들 많이 도와주라는 것이죠.
세상 모든사람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양심의 문을 열라!!는 정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냉철하게 인간을 지적했는데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다른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제자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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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거든 자기를 미워하라.
자기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어른은 하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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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3년 동안 강성케 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유다 나라를 강성케 했는데,
그것은 3년 동안 르호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 뭐냐 하면,
이게 제사장 때문에 나라가 강성했는데
제사장의 어떤 기능 때문에
나라가 강해진 겁니까?
여기 제사장의 특별한 기능이 뭐냐하면,
죄를 용서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나라가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은
어느 쪽이 죄 용서함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살아 계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용서가 나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서
용서받은 게 아니고
준비 되어있음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용서 해주심으로
우리는 용서된 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제대로 용서를 받게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세상에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의 담대함을
그 누가 당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강하고 담대하지 못합니까?
세상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안심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이 너를 용서했다.
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살아있는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다가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너 죄 용서함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
파도처럼 밀려와 지나가 버린단 말입니다.
용서에 휩싸여서
남은 여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용서받은 자의 특징은
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기에
내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용서함을 얻었지? 하고
주님 하신 일을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 안에 제사장이 존재했습니다.
그 제사장이 나의 죄를 대신 처리했기에
내가 이렇게 용서함을 받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 제사장만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삼겠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사장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제사장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출애굽기 28장에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었던 율법,
곧 율법의 중심인 제사장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16장에 보면
드디어 반란이 일어납니다.
같은 레위지파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너희들만 제사장을 하느냐
그것 때문에 시비를 걸고 온 겁니다.
그러니깐 민수기 16장 7절에서
여호와께서 향로를 담아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쪽 사람들 보기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아무런 의미 없이 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선택해서
예수님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지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된
구원의 장치에 대해서 용서받았다면
우리도 담대할 수밖에 없고
확신에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택 그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향로250개 가져 옵니다.
거기에서 불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되지 않는 사람이
선택의 흉내를 내는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자는 따로 있는데,
"너만 잘났어!" 하며
하나님의 고귀한 선택의 자리에
감히 도전하고 끼어 들다가
순식간에 향로에서 불이 나와
떨어져 죽게 된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순간에
그들의 밑에 땅이 갈라지면서
그들의 모든 가족과 모든 사람을
산채로 함몰시켜 버렸습니다.
남은 자는 모세와 아론만 남았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선택 해 주심에
흔들림이 생길 때,
그 때는 엄청난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늘 레위지파가 곁에 있으니까
시시하게 본 겁니다.
북쪽나라 와 남쪽 나라의 제사 드리는 모습은
남들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하나님 믿고 다같이 섬기는 건 똑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그 장치에 의해서
흔들림이 없이 담대한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본문은 반대로 제사장과 더불어서
제사장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높일 때,
하나님께서는 남쪽나라를
북쪽나라보다 3년 동안이나 강성케 했습니다.
강성케 해줬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 교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로 오는 그 기쁨 때문에
모든 것에 행복을 느끼고,
하나님께 고마워하면서
두려움 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보면
갑자기 난처한 일을 당하고
갑자기 적이 나타나고,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나고,
나의 꿈꾸던 것이 모두 깨어질 때,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죄 용서고, 레위지파고, 제사장이고, 다 없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고개 숙이면서
인간적인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용서의 자리에서 이탈되며
저주의 자리이고 심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용서, 아니면 심판.
이 둘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한 자리 밖에 없습니다.
밝은 빛과 어두움 둘 중에 하나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
중간에 걸쳐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비록 초라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아무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그윽한 성전,
지금도 대제사장이 되셔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용서의 엄숙한 장치에 대해서
엄숙하게 반응하면서
마음으로 받아드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