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덕에 후궁이 된 수빈 박씨
정조는 효의왕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뒤이어 간택된 선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도 어린나이에 세상을 뜨자 후사가 없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준 정조의 고모부 박명원은 이런 정조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간청했지만 정조는 내가 아직 건강한데 무엇이 그리 급하냐며 느긋했다. 박명원은 사사로운 고모부의 입장에서 더는 미룰 일이 아니라 며칠동안 정조에게 아뢰었다. 정조는 마지못해 “그럼 좋은 규수를 찾아 주십시오. 신료들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그런 사람으로 말이오.” 박명원은 기뻐하며 말했다. “전하, 실은 소신의 질녀중에 재색을 두루 갖춘 규수가 한명 있사옵니다.” 박명원은 그날로 사촌의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기뻐 날뛸 줄 알았던 사촌은 “형님 그 무슨 말씀이오? 대궐의 후궁자리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인데다 설령 왕자를 생산한다해도 시기와 암투가 끊이지 않는 호랑이 굴인데 내 어찌 귀한 딸을 그런 곳에 보낸단 말이오?”한마디로 거절한 탓에 박명원은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누워버렸다. 정조대왕에게 말을 꺼내 놓긴 했는데 규수가 없으니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여름 장마는 하늘이 구멍이 난 듯 비를 쏟아 부었다. 그때 박명원의 먼 친척뻘 되는 박생원이 찾아왔다. 박생원은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서생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웬일이시오?” “대감. 실은 이번 장마에 전답은 물론 집까지 떠내려가 당장 오갈 데가 없어서 무작정 오긴 했는데 헛간이라도 좋으니 장마 끝날 때 까지라도 거처하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인척은 몰라고 대감께서는 우리를 무정하게 내치지 않을 것 같아서.......“ 박생원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그럼. 식솔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남문 근처에 기다리라고 했는데 다 큰 딸자식을 길가에 두고 와서 여간 불안하지 않습니다.” 박명원은 귀가 번쩍 뜨였다. “딸이라구요? 딸아이가 올해 몇 살입니까.” “민망합니다. 열아홉이나 되었는데 정황이 없어 아직 혼처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박명원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가마를 보내 식솔들을 어서 데려오도록 하인들을 재촉했다. 박생원의 딸을 본 박명원은 기뻐 놀랐다. 어느 양갓집 규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모와 품격이 풍겨나왔다. 다음 날 빗속을 뚫고 박명원은 입궐하여 정조를 알현하였다. “전하, 마침 규수의 집에서 승낙을 받았사옵니다. ” “신료들이 반대할 사람은 아니겠지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한가지 가세가 곤궁하다는 것 뿐이옵니다.” “가세가 곤궁하다구요? 허허 그거 참 잘 되었습니다. 처가가 가난하니 세도를 부릴 염려가 없을 것이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정조는 박명원이 중매를 선 박생원의 딸을 흔쾌히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장마통에 재산을 몽땅 잃은 박생원은 장마 덕에 하루아침에 후궁의 아버지가 되었고 딸은 정조의 셋째 부인이 되어 그녀가 낳은 왕자는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 23대 왕인 순조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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