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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갈항사(葛項寺)와 승전법사(勝詮法師).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을 경계를 한 높이 976m 바위산이다. 금오산 정상에는 신라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약사암(藥師庵)이 있고, 동쪽 구미 남통에는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해운사(海雲寺)가 있고, 서북쪽 김천 개령에는 신라 승전법사가 창건한 갈항사(葛項寺)가 있고, 남쪽 북삼에는 고려 천태종 시조 대각국사가 수도한 선봉사(僊鳳寺)가 있어 이곳이 영남의 명산 신라불교의 시원지(始原祉) 임을 알 수 있다.
<갈항사와 승전법사>.
갈항사(葛項寺)는 금오산(金烏山) 서북쪽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있는데, 신라 효소왕1년 서기692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창건한 절이다.
갈항사에는 불국사 석가탑에 버금가는 비례미(比例美) 아름다운 동-서 삼층석탑(국보제99호)이 있었는데, 이 탑은 서기 758년(戊戌年) 경덕왕(天寶)17년에 신라 황실과 남매 사이였던 영묘사(靈妙寺;경주 소제)의 언적법사(言寂法師)와 그의 손위누이 '소문황태후(昭文皇太后;원성왕 어머나)'와 손아래누이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이모' 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탑신아래 이두문자(吏讀文字)와 함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일연의『삼국유사』에서도 “효소왕 1년(서기692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승전(勝詮)이 상주(尙州) 개령군(開寧郡;금릉군)에 절을 짓고 돌해골(石髑髏) 앞에서『화엄경』을 강론했는데, 그 후 돌해골 80기들이 자못 영험했다.” 는 기록이 있다.
세월이 천년을 흐르는 동안 갈항사는 언제 어느 때 어떤 원인으로 폐허가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고 지금은 황량한 밭으로 변해 있다. 밭 한 모퉁이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이 보물 제245호로 지정되어 작은 전각에 모서져 있고, 머리를 잃어버려 다른 머리를 단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철창 속에 갇혀 있고, 동-서 삼층석탑이 장엄하게 서 있던 그 자리에는 표지석만 찬바람에 힘겹게 버티고 있다.
이 탑은 1916년 일본인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한 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사진1) 갈항사 절터 전경과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 245호) 봉안 전각.
(사진2) 갈항사 3층석탑(국보제99호)의 표지석.
승전(勝詮)은 당(唐)나라 현수국사(賢首國師)의 제자가 되어『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 현수(賢首)가 의상(義湘)을 생각하는 편지와 함께『화엄소초(華嚴疏抄)』등 많은 책을 보냈는데, 이를 귀국길에 의상(義湘)에게 전달하고, 금오산 서북쪽 개령에 갈항사를 짓고 돌해골(石髑髏)무리 80여기 앞에서『화엄경』을 강론하였다. 그 돌해골(石髑髏)들이 후에 영험함을 보여 나라에서 유명해 졌다. 승전(勝詮)이 의상(義湘)에게 전해 준 당나라 현수(賢首)의 편지는 이러하다.
“승전(勝詮)이『탐현기(探玄記)』20권 중 두 권은 아직 미완성이고,『교분기(敎分記)』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1권,『화엄범어(華嚴梵語)』1권,『기신소(起信疏)』2권,『십이문소(十二門疏)』1권,『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1권을 간추려 베껴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지난번 신라 승려 효충(孝忠)이 금9근을 저에게 주면서 스님(義湘)께서 보내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서역국의 물병과 대야 한 개를 부쳐드리니, 이것으로 작은 정성을 표하려고 하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
(“釋勝詮 未詳其所自也 常附舶指中國 詣賢首國師講下 領受玄言 硏微積慮 惠鑒超穎 探賾索隱 妙盡隅奧 思欲赴感有緣 當還國里 始賢首與義湘同學 俱稟儼和尙慈訓 首就於師說 演述義科 因詮法師還鄕寄示 湘仍寓書[云云] 別幅云 探玄記二十卷 兩卷未成 敎分記三卷 玄義章等雜義一卷 華嚴梵語一卷 起信疏兩卷 十二門疏一卷 法界無差別論疏一卷 竝因勝詮法師抄寫還鄕 頃新羅僧孝忠遺金九分 云是上人所寄 雖不得書 頂荷無盡 今附西國軍持澡罐一口 用表微誠 幸願檢領 謹宣”)
살펴보면, 신라 불교가 널리 꽃을 피운 것은 이 많은 책들을 배겨온 승전법사의 공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신라의 승려 가귀(可歸)가 매우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법통을 이어서『심원장(心源章)』을 편찬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은 이러하다.
“스승님이 환향하여 돌무더기를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하였으니,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를 지금도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매우 신령스럽고 신기한 점이 있다. 그 밖의 다른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비문은『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에 있는 것과 같다.
이 갈항사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그 때도 건제하여 있었다. 또한 1486년 증산(增刪)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갈항사가 소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온존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1592년 선조25년 왜의 침입으로 발생한 ‘임진왜란’ 때, 금오산성을 쌓은 사명대사 유정(惟政:1544∼1610)의 승군들과 ‘금오산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이 때 금오산 주위에 위치한 사찰들 모두가 전소했는데, 갈항사도 이때 소실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밭으로 변한 절터에서는 먹은 기와조각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을 보면 치열했던 전쟁으로 웅장했던 갈항사가 소실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갈항사는 적의 공격으로 소실되고 없어졌지만, 불타고 남은 수많은 유물들은 세인들의 눈에서 멀어지고 뿔뿔이 흩어졌다.
1914년 경 동쪽 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귀중한 금석문과 이두문자가 세상에 알려진 그 2년 뒤 1916년02월12일 밤 유물을 탐낸 일본인 도굴꾼들이 탑은 무너뜨리고 유물들을 도적질 해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와중에 탑들은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두 탑이 있던 그 자리는 표지석만 꽂아 두도 갈항사지의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99호)>.
경복궁 민속박물관 입구에 서 있던 이 탑은 우리 석탑역사 속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이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 양식인 경주 석가탑 모양이 지방으로 어떻게 파급, 확산되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탑이기 때문이다.
(사진3) 국보 제99호,
갈항사 삼층석탑(동탑). 갈항사 삼층석탑 (서탑).
(사진4) 갈항사 (동)삼층석탑에 새겨진 신라 이두문자.
이 석탑들은 건립연대와 건립자 등이 밝혀진 신라석탑이라는 점과, 신라석탑으로는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기단부에 남아 있다는 점과, 신라석탑의 완성품 불국사 삼층석탑 석가탑(서기751년 경덕왕10년에 창건추정, 국보 제21호)의 전형적인 양식이 경주를 벗어나 지방으로 파급되었다는 점, 또한 그 우수한 조형미에서 줄곧 이 방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갈항사 동-서 두 삼층석탑의 건립연대는 동탑 상층기단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서기 758년 경덕왕17년으로 밝혀졌다. 이때는 신라가 통일 이후 문화의 꽃을 피우던 시기로서 불국사와 석굴암, 다보탑과 석가탑 등의 석조물들이 한창 조성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석공예 장인들의 솜씨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금오산까지 미쳤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탑에는 ‘신라 이두문자’가 문장의 말미에 4줄로 차례로 들어 있어 더욱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탑 기단부에 새겨진 문장을 해독하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戊戌)년 중에 세웠으며 오라비와 자매(3남매)의 힘으로 이루었는데, 오라비(娚)는 영묘사의 ‘언적법사(言寂法師)’이시며, 손위누이(姉)는 ‘소문황태후(昭文皇太后)’이시며, 손아래누이(妹)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유모(妳)’ 이시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 妹者敬信太王妳在也)”
이 탑의 건립에 시주한 사람들이 신라 황실의 3남매였다는 것을 보면 이 탑이 서 있던 갈항사에는 얼마나 많은 황실사람들과 그 심부름꾼들이 당시 드나들었을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탑에는 풍경이 달리는 지붕돌 네 귀퉁이 말고도 몸돌에 못 구멍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정연하게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 절터 석탑이나 경주박물관 뒤뜰에 서 있는 고선사 절터 석탑에서 보이는 신라석탑의 특이한 점이다. 이 탑 몸돌의 작은 구멍들은 밀교종파가 행하던 문두루비밀지법(文豆婁秘密之法)에 필요한 사천왕상, 보살상, 신장상들과 천의를 휘날리는 천녀들이 새겨진 금동 금속판을 고정시켰던 흔적으로 보인다. 성주사석탑, 고선사석탑, 갈항사석탑 세 곳 모두가 신라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황실의 편안과 번성을 빌던 황실사찰이 아니었겠는가?
갈항사 동-서 두 삼층석탑은 쌍을 이룬 쌍둥이 탑이다. 지금 동탑은 3층 몸돌까지만 남아 있어 높이가 4m이고, 서탑도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 높이가 4.3m 밖에 되지 않는다. 얼핏 봐도 신라 삼층석탑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중의 기단, 상, 하층 기단에 각각 두 개씩 도드라진 탱주와 우주,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다섯씩인 점, 지붕돌의 추녀선이 직선을 이루고 낙수면과 전각의 반전이 심하지 않고 은은한 점 등등이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하층기단의 지대석, 면석, 갑석이 한 돌로 이루어져 조각양식이 얼마간 편화(便化)됨을 보이는 정도일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아담한 크기에 적절한 비례, 소박하고 건실한 미감이 돋보이는 석탑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석가탑 이후 가장 풍치 있고 아담한 탑”으로 꼽기도 하고, 아담하지만 균형 잡힌 몸매나 아름다운 조화로 미루어 신라 전성기 어느 명공의 회심의 역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기도 한다.
고유섭(高裕燮,1905~1944) 선생은 이 두 탑을 “단려(端麗)하고도 아순(雅淳), 가장 문아(文雅)한 탑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갈항사 동-서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04호)>
이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1916년에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을 경복궁으로 이전하기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되었다. 탑을 건립하던 당시 사리장엄구기 함께 봉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리장엄구는 동탑과 서탑 모두 동제항아리 안에 금동병(金銅甁)이 넣어진 상태로 기단 아래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중 서탑에서 발견된 동제사리호는 뚜껑의 꼭지와 몸통의 두 귀를 청동 끈으로 연결하여 묶은 사리호로 9세기 이후 뼈 항아리로 많이 사용된 연결고리 유개호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진5)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출토, 금동사리호와 사리병(보물 제1904호).
두 탑의 사리병은 나팔형으로 벌어진 길고 아름다운 목과 균형 잡힌 타원형의 몸통을 가졌는데, 이러한 병의 형태는 8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병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동탑의 사리병은 죽절형의 목과 꽃잎형의 굽을 달아내어 신라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도 엿볼 수 있다. 이 사리기는 통일신라 감은사 식의 전각형 사리기와 달리 호형의 외함 안에 정병과 유사한 금속제 병을 사리병으로 봉안한 독특한 형식의 사리기이다. 최근의 보존처리를 하면서 작은 크기의 금속제 병에서 준제진언(准提眞言) 다라니 1매가 발견되어 당시의 불교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동탑 상층기단에 기록된 건립연대를 통해 사리기의 제작연대와 조성주체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사리기 연구의 절대 기준 자료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가치가 크다.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
신라 황궁의 사찰이었던 갈항사 절터에 높이 1.22m의 석조석가여래좌상이 현존하고 있다.
갈항사 절터에는 이 좌상 외에도 석조비로자나석불좌상(石造毘盧遮那石佛坐像) 1구와 신장상(神將像) 조각이 남아 있다.
(사진6) 갈항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
이 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보호각은 옛 금당지(金堂址)로 추정되는 곳이다. 등신대(等身大)의 불상으로, 불신(佛身)과 위쪽으로 향한 연꽃잎(仰蓮)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 있고, 광배석과 하대석은 유실되고 없다.
석가여래좌상은 무릎 부분과 손가락 일부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나머지 부분은 상태가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좌상의 머리카락은 소라머리(螺髮) 모양으로 작고 또렷한 연주문(連珠文)으로 이루어졌는데 연주문에는 소라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얕고 둥근 육계(肉髻)와 더불어 아담한 머리 윤곽은 경주 석굴암 석굴본존불이나 경주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형태와 유사하게 우수한 작품이다. 얼굴은 동근 편으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九黃洞金製如來坐像, 국보 제79호)의 얼굴을 닮아서면서도 좀 더 양감이 줄어든 덧 하다. 작은 입과 아담한 코, 반쯤 뜬 가는 눈, 둥그런 턱 등 전체적인 인상은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의 북면부조보살상(北面浮彫菩薩像)이나 석굴암 석굴의 감실보살상(龕室菩薩像) 등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신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선으로 처리되었으나 위축되거나 가냘픈 편은 아니다. 비교적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은 골격이 뚜렷하면서도 양감이 있으며, 팔의 근육도 잘 묘사되었다. 반면에 허리는 잘록하여 신체의 굴곡이 잘 표현된 육감적인 조각 수법을 보인다. 이런 특징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본존불이나 약수계 석불상, 석굴암 석굴의 본존불상 등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들보다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것은 8세기 중엽의 불상이 가지는 독특한 개성미라 하겠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신체에 비하여 넓고 중량감이 있는 두 무릎은 이 불상의 자세를 보다 안정감 있게 만든다. 길상좌(吉祥坐: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은 다음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놓은 모습)의 두 다리 근육이 탄력 있고 긴장감 있게 표현된 것 또한 이 불상의 사실성을 보여준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는데, 석굴암이나 칠불암의 본존 등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의 본존처럼 왼손을 거의 오른발 위에 올려놓은 것이 특색이다.
불의(佛衣)는 8세기 중엽에 성행하던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옷깃에 일단 한 번 뒤집은 반전 수법은 인도 굽타(Gupta)기 조각에서 보이는 통견(通肩)의 목 깃 반전 형식이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옷은 얇아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며 옷 주름은 유려한 것이 당시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대좌는 팔각대좌로, 연꽃이 짧고 뚜렷하며 양감이 풍부하다는 점에서도 시대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불상 뒤에는 광배를 꽂았던 구멍 자리가 남아 있다.
<갈항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갈항사 절터에 현존하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가운데 손가락을 쥐고 있는 손 모양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분명한 석불좌상이다. 이 석불은 자신의 본래 머리는 잃어버리고 새로운 머리를 어울리지 않게 얹고 비바람을 모두 맞으며 답답하게 철창 안에 갇혀 있다.
(사진7) 갈항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갈항사 신장상(神將像)>
갈항사 절터 출토 석조물 몇 점이 남면사무소 뜰에 보관되어 있는 소문을 듣고 찾았다.
갈항사 절터에서 또 다른 탑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팔부중상이 조각된 석탑 기단부의 부재로 보이는 석물 네 점이 어떻게 남면사무소 뜰에 한갓 장식물처럼 주저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보아하니 아수라상이 새겨진 석조물이다.
갈항사 발굴 당시 발굴이 갑자기 중단되고 일꾼들에게 품삯이 지불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는데, 그사이 이 석조물들을 트럭에 싫고 가다가 불심검문 덕분에 되찾게 되었다는 게 마을사람의 말이다. 그 후 아직도 밭 속에는 그때 잠시 햇빛을 보았던 다른 석물들이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한다.
옛 절터에는 층을 이루며 무더기로 파묻힌 기와더미가 밭을 일구는 농부의 삽날에 부서져 흩어지고 있다. 이렇게 사방으로 흩어진 유물들을 생각하며 신라 황실 사찰 갈항사를 지키고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에게 절을 올리고 물러난다.
(사진8) 갈항사 아수라상.
<갈항사 우물>
갈항사 절터에는 물이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터로 들어서는 길 왼쪽 밭둑 아래에
커다란 독을 묻은 모양으로 생긴 우물이 숨어 있다. 바닥까지 4~5m 깊이가 될 듯, 가운데 배가 부르게 막돌로 쌓아 올리다가 차츰 아귀를 좁혀 항아리 같은 솜씨로 만들어져 있다. 물이 맑아 당장 두레박을 던져 달게 마셔도 좋을 만한 물이 늘 적당한 깊이로 고여 있다니 신기하다. 이 우물은 지금도 해마다 논밭에 물을 대는 역할을 톡톡히 한단다. 이 물을 길어 차(茶)를 달여 마시던 신라 황실 스님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길을 걷는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승용차를 이용해서 찾아갈 때는, 김천시내에서 왜관-대구 방면으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 김천교를 건너 약 11.5㎞쯤 가면 길 왼쪽에 쌍용정유 송곡주유소가 나타난다.
주유소를 지나면 곧 바로 길 왼쪽으로 오봉리로 가는 비포장 8번 시도로가 나온다. 이 길은 좁고 고개가 가팔라서 대형버스는 다니기 곤란하다. 이 길을 따라 1.7㎞쯤 가면 삼가마을 앞 사거리에 닿는다. 사거리에서 오른쪽 마을길을 따라 1.7㎞쯤 가면 갈항마을이 나오고 마을 앞에서 왼쪽 시멘트 길을 따라 0.6㎞ 가면 갈항사 절터에 이른다.
(사진9) 갈항사 가는 길
승용차는 갈항사 절터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갈항마을 앞에 주차해야 한다.
김천시내에서 오봉리까지는 하루 3회 버스가 다닌다. 버스를 타서 오봉리에 가면 갈항사 절터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또 김천시내에서 약 30분 간격으로 왜관으로 다니는 버스를 이용하면, 송곡리에서 내려 걸어갈 수도 있다.
갈항사 절터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갈항사 절터 석조여래좌상은 전각의 열쇠는 갈항마을의 김정기씨 댁에서 관리한다.
남면사무소 뜰에 있는 팔부중상이 있는 석물을 보려면, 김천 시내버스가 남면소제지까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