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에서 간식용으로 지급된 초코파이를 먹지않고 아꼇다 몰래 집에 가져가 아이들에게 준다는 얘기 를 듣고 우리들의 어려웠던 시절이 새삼 생각 났다.
70년 대 초 내 나이 30대 초반 5 ,6 년 지방 근무를 마치고 나서 배치된 곳 이 회사의 핵심 부서인 기획실 ... 나에게 떨어진 프로잭트는 요업 관련 타일 사업이었다. 1년여에 걸쳐 거의 혼자서 사업 계획서를 만드는 중에도 짬짬이 평소 읽고 싶던 책 들 을 볼수 있는 시간도 충분했었다. 부내 바둑 찬구 6, 7명이 거의 1 년여에 걸쳐 리그 전 을 벌여 우승 하기도 했었고.
사업계획서를 마무리 해 위에 올리고 긴가민가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어느날 갑자기 GO SIGN 이 떨어졋다.
우선 입지가 당시 취약 지구엿던 김포 검단지역으로 정해졋고 공장 부지 매입이개시됬다.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새마을 공장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번듯한 공장 이라곤 없는 면 소재지에 400ㅡ500 명 고용이 가능하고 제품은 수출할수 있는 업종이었다.
회사 이름을 김포 타일로 정하고 총무 경리 요원 외에는 기술 영업직 모두를 외부에서 데려 와야했다. 공장 상세 설계가 완성되어
내자 외자 예산이 확정 되었다.
시간이 걸리는 외자를 우선 발주 하기휘해 주거래 은행인 한일은행에를 당시 마땅한 사람없어 직접 뛰어드니 ,..일이 되느라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성근 군이 담당관으로 떡 버티고 있지 않은가!!! U$120만 짜리 신용장 개설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건
不問可知.
마침 plaza 호텔 건축에 맞추어 설립된 건설 자회사가 공장 부지 조성과 건축에 착수하였고...착공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plaza 호텔 외벽에 붙일 타일 이 당초 일제에서 국산 으로대체 된것 또한당연 한 일이었다,
독일로 수출되는 제품을 더 고급화하기 위한 기술도입 계약은당시 EPB 의 담당관 이었던 김영태동문이 있어 누어 떡먹기로 통과되어 의기 양양 했던 기억이 난다.그당시 막중한 임무를 수행 하던 그들에게 지금까지도 고마움을 잊지않는것으로 대신해도될런지?!!!
얼마후 공장가동 현황을 살펴 보기위해 방문해서 마당 건너 공장쪽을 보고 있는데 마침 12시 점심 휴식종이 울렸다. 그런데 채 5분 도 지나지 않아 상당수 의 여직원 들( 제품 마무리 공정에 많은 인근 주부들이 투입되었다) 공장 외벽 양지 바른 곳에 나와 죽
둘러 앉는것이 아닌가?
옆에있던 직원에게 참! 빨리도 식사를 하는군! 했더니, 아님니다. 저 들은 도시락을 못싸온 사람들이라
물 한모금 마시고 나와 앉아 있는 것이라고!!!
그 어려운 전란중에도 부모덕에 별로 굶어 본적이 없는 이 K.S. 출신에게는 충격이었다...굶고 일을 해야 하다니!!!
긴급 대책 회의 끝에 여유있는 창고를 식당 으로 개조하기로 하고 우선 삼립 빵을 납품 받아 제공 키로 했다. 그 아주머니들이 그걸 아껴 집에 있는 자식 들에게 갖다 주었는지 확인 하지 못햇지만 아마 그런이도 틀림없이 있었을것이다.
한국이 밞아온 길을 북측도 어서 따라와 한반도가 굶는이 없는 평화로운 곳 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후기; 지금 그곳은 검단 신도시가 들어 앉아 그야말로 桑田碧海 를 실감케 한다.
다.
첫댓글 소중한 회상, 아주 잘 풀어 쓴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글 자주 올리시길! 산에만 가지 말고....
뒷메의 격려 힘이 됩니다.!!!
우리들의 애쓰던 .. 그러나 젊었던 ..
참 _ 감동 되는 글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옛날엔 그렇게 살았는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