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랜 숙원이 신공황후가 모셔진 향추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필코 신라를 정벌하리라 (···) 올해 신라를 침공해 반드시 승리하리라."
762년 일본은 신라를 침공할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죠.
우리가 배운 일본의 침공은 임진왜란 정유재, 일제강점기 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신라도 침공하려 했습니다. 발해의 반대로 실패하긴 했지만요.
지금부터 베일을 벗겨 봅시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90여 년이 지난 762년, 일본은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해가 일본의 신라 침공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 일본, 발해 세 나라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일본의 '이토성'이란 곳에서 중요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제철 유적.
현장 곳곳에는 고대에 철을 만들던 흔적들이 확인된다.
이 것이 바로 신라를 침공하기 위해 무기를 만들던 제철 공장인 것 이다.
이토성과 제철공장이 세워진 8세기는 일본의 나라시대(710~785)다.
나라시대 정통 역사서인 『속일본기』에서 이상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761년 정월, 일본은 갑자기 정부 차원에서 미노와 무사시 지역의 소년들을 선발해 신라어를 가르친다. 그보다 2년 전인 759년에는 전국에 500척의 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지역마다 구체적인 수까지 할당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7개도 가운데 호리쿠도에 89척, 산인도에 145척, 산요우도에 161척, 난카이도에 105척씩, 4개도에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꾸준히 난카이도에 105척씩, 4개도에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꾸준히 만들라고 했다. 또 배의 완성시기는 3년 안이라고 못박고 있다. 759년부터 3년 뒤면 762년이다.
일본은 762년에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을까?
『속일본기』에는 그 무렵 일본이 전쟁 세부계획안까지 만들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 목적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쓰여있다.
756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 계획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일본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모든 침공 준비는 762년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은 왜 신라를 침공하려고 했나?
『속일본기』의 759년 기록 가운데 "향추묘에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아뢰다"는 내용이 있다.
향추묘가 무엇이길래 정벌 계획을 미리 알렸을까?
향푸묘라 부르는 곳은 후쿠오카에 남아 있는 오래된 신사 향추궁을 가리킨다.
이곳은 3세기 전설의 영웅이었던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다. 고대 일본은 신라와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길 때마다 향추궁에 와서 일일이 보고하고 신라에 대한 처벌을 기원했다. 남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공황후의 전설을 역사의 진실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금강 하구의 백촌강은 663년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한 백제가 일본과 마지막 재기를 도모한 곳이다. 백촌강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모두 2만 7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만 품고 돌아왔다.
백제와 정말로 가깝게 지냈던 일본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증오하게 되었고, 그 뒤 신라와 외교 마찰이 빚어져 양국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고대 일본의 한시문집인 『경국집』에는 신라에 대한 당신 일본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요즘 신라가 버릇이 없다. 날뛰는 고래와 멧돼지를 잡듯이 신라를 잡으려고 하는데, 싸우지 않고 신라를 굴복시킬 방법을 논하라."
앞서말한 신공황후의 전설이 내려올 만큼 신라 정벌에 대한 오랜 염원을 가져온 일본은 백촌강 전투와 외교 마찰을 겪으며 762년, 마침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운다.
아직도 상당수 일본인들이 신공황후의 전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백촌강 전투와 외교 마찰이 바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 기본적인 명분이다.
★신라는 일본의 침공 계획을 모르고 있었나?
신라가 3년 동안이나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만드는 사이에 신라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 사실은 『속일본기』가 보여준다.
일본측에서 "당신네 나라에서 온 백성들이, '우리 신라에서 병사를 모아 경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국이 와서 죄를 물을까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신라 사신이 "당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해적이 날뛰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병사를 내서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실제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다보면 두 도시의 경계 지역인 모화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산 능선을 따라 만든 신라의 옛 산성이 하나 있다. 722년 10월에 쌓은 길이 12km 가량의 석성이다. 경주를 방어하며, 울산으로 들어오는 왜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 산성은 현재 훼손되지 않은 하부만 남겨두고 원형과 똑같이 성벽을 복원해 놓았다.
모화리의 옛 이름을 따서 모벌군성이라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모벌군성에 수천명의 신라군들이 이곳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벌군성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신라 침공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신라를 침공하기 직전, 일본은 전쟁에 동원할 선박과 선원, 군사의 수를 모두 점검했다. 최종적으로 보고된 수는 백촌강 전투에 동원된 군사력의 2배 수준이었다.
배는 모두 394척, 군사는 총 4만여 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군사력으로 신라를 침공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예상해본 전투 결과
일본 고대 군사학의 최고 권위자인 사사야마 교수는 일본은 섬나라기 때문에 대륙국가 처럼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없어 4만의 병사들이 신라땅에 왔다 하더라도 병법에 어두워 신라와 제대로 싸울 수 없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신라군에 의해 크게 패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본, 발해에 협공 제안
일본도 신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발해에 사신을 보낸다.
목적은 협공을 하자는 것.
그 당시 발해 왕이었던 문왕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현재 발해에 관한 역사서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사신은 신라 침공 직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한다.
그걸로 보아 문왕은 거절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온 사신은 간곡히 요청했을 것이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적대관계 였다.(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
발해도 신라의 멸망을 바랬을 것이다.
★발해의 거절
발해 역사서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발해가 승낙했는지 거절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발해가 거절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사신은 모두 장군직을 맡은 무관들이었다.
그런데 발해의 대답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신은 문관이었다.
왜 갑자기 기존 관례를 버리고 문관이 갔을까?
그것이 바로 발해와 손 잡을 수 없음을 밝히는 발해의 뜻으로 추측된다.
발해의 거절 의사를 전하러간 사신이 일본에 온 이후, 『속일본기』에는 신라 침공 준비에 대한 기록이 단 한줄도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신라 침공의 주모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반란을 일으키다 관군에게 처형되고 마다.
그의 몰락과 함께 신라 침공 계획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발해가 거절하자, 일본은 신라 침공 계획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주모자 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여기서 발해가 거절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발해의 거절 이유
그렇다면 발해는 왜 일본의 신라 협공 제안을 거절했을까?
발해 건국 초기에 신라와 발해는 적대관계였다.
그러나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사이가 약간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가 국경선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다.
이것은 발해와 신라가 대립적이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발해와 신라 사이에 아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진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것이었다.
경덕왕때 발해와 신라는 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고 서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의 야심찬 신라 계획은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발해와 신라가 계속 대립관계 였다면 아마도 발해는 일본의 제안을 승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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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입니다.
발해와 신라가 서로 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깨달아서.
발해가 한 민족임을 무시하고 계속 신라에 앙심을 품었다면, 1천년동안 꽃피운 신라의 역사가 잊혀졌을 겁니다.
우리의 세계 유산 불국사, 석굴암도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같은 민족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발해!
제 생각으론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로 착한 나라는 발해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