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바꿔 놓은 '21세기 전쟁판' 척후병·무인 잠수함-고속정 22종 약 1만2000대 맹활약 "동료가 쓰러져도 개의치않고 인간보다 5배 빨리 임무완수"
흙더미 위로 폭발명령 신호를 받는 휴대전화 안테나를 봤을 땐 너무 늦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병사'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아프간)에서 3000여명의 미군을 희생시킨 '급조폭발물(IED)' 공격이다. 희생된 병사의 이름은 '팩봇(PackBot)'. 폭발물 처리 로봇이다. 대당 15만달러(약 1억7000만원)짜리지만, 인간 병사의 희생을 막았으니 아깝지 않은 대가다.
로봇이 전쟁판을 바꾸고 있다. 참새 크기 로봇이 척후병 노릇을 하고, 무인 비행기는 거대한 날개를 펴고 지상에 미사일을 퍼붓는다.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 로봇이 보병 분대의 맨 앞에 서고, 바다엔 무인 잠수함과 로봇 고속정이 적의 뒤를 쫓는다. 피터 싱어(Singer)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지난달 26일 펴낸 책 '와이어드 포 워(Wired for War) : 로봇 혁명과 21세기 분쟁'에서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과 이에 따른 정치·윤리적 문제를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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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라크전 개전 당시 미군은 '전쟁 로봇'이 단 한 대도 없었다. 하지만 2008년 말엔 22종 약 1만2000대로 늘었다. 로켓포를 달고 캐터필러로 움직이는 로봇 병사 '탤런(TALON)'은 보병 전투에서 맹활약한다. 장난감 트럭을 닮은 '마크봇(MARCBot)'은 폭발물을 수색하거나 클레이모어를 적진에 '배달'한다. 영화 스타워즈 속 로봇을 닮아 'R2-D2'라는 별명이 붙은 '크램(CRAM)'은 고속 대응사격으로 로켓·박격포 공격을 70% 이상 막아낸다. 미 합참 관계자는 "로봇은 명령을 잊지도 않고 동료가 쓰러져도 개의치 않으며 인간보다 5배 빨리, 더 정확하게 임무를 완수한다"고 했다.
무인전투기는 21세기 전쟁 로봇 중에서도 핵심이다.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활약 중인 프레데터 한 대 값은 450만달러. 최신형 F-35 전투기 한 대 값으로 20대를 살 수 있다. 미군은 현재 다양한 크기와 목적의 무인기 5300여대를 갖고 있다. 프레데터는 조종사가 중력 가속도에 혼절할 일도 없고, 격추됐다고 전사자 가정에 편지를 보낼 일도 없다. 프레데터 조종사들은 아프간에서 1만㎞ 이상 떨어진 본토 네바다의 공군기지로 출퇴근하며 전쟁을 수행한다.
미군은 또 2015년부터 상당수 실전 부대를 '미래전투시스템(FCS) 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FCS 계획에는 한국 정부 1년 예산과 맞먹는 2300억달러가 투입됐다.
전쟁 로봇은 전사자와 전쟁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크다. 하지만 로봇에 의한 무고한 인명 살상 등 복잡한 윤리문제가 뒤따른다. 1988년 걸프 해역에선 미군 함정의 공격에 이란 여객기가 격추돼 민간인 290명이 숨졌다. 자동 공격 시스템이 이란 공군 F-14 전투기로 오인한 것이다. 지휘관은 병사보다 로봇의 판단을 믿었고, 비극을 막을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병사 대신 로봇이 쓰러진다면, 국민과 의회는 전쟁에 무관심해진다. 정치 지도자는 자국 기술과 전력(戰力)에 대한 과신(過信)에 빠져 고속도로 통행료를 올리듯 손쉽게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