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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남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크은뫼
“도심포교 최고 명당, 광주불교 1번지” | ||||||||||||||||||||||||||||||||||||||||||||||||||||
[남도 사찰을 찾아서] ① 광주 무각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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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네, 명당(明堂)이야 명당” 수년전, 종단의 원로스님 한 분이 광주를 지나던 길에 무각사(無覺寺)를 참배한 적이 있다. 노스님은 도량을 찬찬히 둘러보시면서 연신 “명당이야, 명당”을 되뇌었다. 흔히 명당이라면 깊은 산속에 바람 잘 통하고, 햇빛 잘 드는 길지로만 생각했건만 도심 한복판에서 명당이라니 의아했다. 그런데 명당이 별건가, 사전에서 말하기를 ‘일을 하는데 있어 썩 좋은 자리’라고 하듯이 수행정진 잘하고 포교 잘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사찰명당일 것이다. 노스님이 떠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광주 최대 번화가인 상무지구 여의산에 자리한 무각사 만한 수행, 포교터가 없어 보인다.
대형 건물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상무지구는 그대로가 시멘트 예술의 전형이다. 밤이면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상무지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개발에 따른 부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곤 한다. 다행히, 군부대가 상주했을 때부터 장병들의 휴식터였던 자그마한 산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는 ‘여의산(如意山)’이다. 5.18공원으로 조성된 여의산은 광구 서구가 2007년 11월 서구팔경(八景)으로 지정했다. 여의산이 광주의 보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의산마저 개발로 사라졌다면 광주의 중심이자 호남의 중심은 어찌되었을까? 상상만해도 끔찍할 뿐이다.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광주 포교당 무각사는 바로 여의산에 자리해 있다. 여의산이 광주의 새로운 허파 구실을 하듯, 무각사는 광주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또한 무각사에 자리한 불교회관에는 광주불교사암연합회, 광주전남포교사단, 호남불교문화원, 불교문인협회, 카일라스 등 불교관련 신행단체가 입주해 광주불교를 이끌고 있다. 이처럼 무각사는 현대판 명당자리임을 증명이나 하듯 지역불교를 이끌고 있다.
무각사의 시작
여의산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기 이전부터 극락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자리해 있었다고 한다. 상무대(전투병과 교육사령부)가 들어서면서 민간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통제구역이 되었다. 그 후 송광사 전 방장 구산스님은 지역불자들과 함께 군 장병들의 신행과 정서함양을 위해 상무대에 사찰건립을 발원하고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시절인연이 성숙되었는지 1971년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 송호림 장군이 구산스님과 함께 무각사 창건 원을 세우고, 이듬해 국민총화단결, 남북통일의 기원을 담아 민, 관, 군 정신교육의 장으로 창건했다.
또한 유재홍(국방부장관), 김재식(전남지사), 남상주(광주시장), 김재호(여수시장), 이후락(전국불교신도회장) 씨 등 정재계 인사와 지역 기관장도 시주에 참여했다. 무각사는 건립 취지문에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올바른 국민정신의 확립에 있다는 생각에서 호국정신의 교육도량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전남 및 광주지역의 기관장 및 유지와 800만 전 불교도가 동참하여 국민의 총화 단결과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한 민,관,군의 호국정신 도량으로 무각사를 창건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무각사는 민, 관, 군과 전국의 불자가 함께 동참하여 건립됐다. 건립 당시 무각사는 5000여 평의 대지에 대웅전과 요사채 등 전각 10여 동, 종각, 10층 석탑 등이 자리했다. 대웅전은 300여 명이 한꺼번에 법회를 볼 수 있는 광주 최대의 법당이다. 경내에는 광주권 사찰로는 드물게 일주문과 사천왕이 여법하게 갖춰져 있어 대가람으로 손색이 없다. 일주문에서 해탈문,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가람형태는 군부대 사찰답게 질서정연하다. 이처럼 전통가람의 형태를 갖춘 무각사는 20여 년 간 상무대 장병들의 사랑을 받았다. 상무대를 거쳐간 수많은 장병들이 무각사 법당에서 재가오계를 수지하고 불자가 되었다. 이들은 군을 제대한 이후에도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자로써 당당히 제몫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도시개발로 상무대가 장성으로 옮겨지고 무각사도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군당국은 1996년 여의산 일대 10만여 평을 광주시에 무상양도하면서 무각사를 보존하고 여의산을 시민공원으로 개발하도록 했다.
이후 무각사는 전남지역 4대본사와 광주사암연합회 등 불교계의 동의를 얻어 1997년 조계총림 송광사 포교당으로 등록,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에서 민간으로 이관된 무각사는 초창기 일반신도가 없었다. 더구나 군부대가 이전하는 과정에서 관리가 소홀해 포교당으로 제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무각사 대중스님들과 신도들은 어려움 속에서 가람을 일구고 지역포교를 시작했다. 교육관, 문화관, 불교회관 등을 건립하고, 산사음악회, 청소년페스티발, 템플스테이 등을 펼치며 포교당으로 제 몫을 다해나갔다. 또한 신행회가 주관되어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합창단, 불교대학이 들어섰다. 이제 어엿하게 호남을 대표하는 도심포교당뿐 아니라 광주불교 1번지로 우뚝 서게 됐다.
무각사의 오늘 무각사는 지난해 8월, 초대 광민스님에 이어 청학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청학스님은 주지 취임과 함께 100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입재가 취임법회였던 것이다. 스님은 일체 바깥출입을 금하고 조석예불은 물론, 사시기도 등 사분정근을 손수 이끌었다. 100일기도를 회향하던 날, 스님은 곧바로 ‘천수다라니 100일기도’를 입재했다. 회향이 곧 또다른 기도의 입재가 되었다.
20여년 넘게 종단의 주요사찰과 총무원에서 실무를 맡아온 스님은 “기도를 통해 수행자로서 초발심을 추슬렀고, 나아가 한국불교가 나가야할 길을 엿보게 됐다”고 강조한다. 청학스님은 기도뿐 아니라 도량정비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스님이 취임한 때는 전국체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였다. 스님은 도심한복판에 자리한 무각사가 전국 선수단과 임원들이 쉽게 찾을 곳으로 생각했다. 이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경내에서 숲이 잘 조성된 곳에 쉼터를 만들었다. 음료 자판기와 무료 생수대를 설치했다. 이 쉼터는 무더운 여름날 무각사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무각사 문화원도 개원했다. 개원을 겸해 ‘이철수 판화전’을 열었다. 의외로 불자들보다 문화자부심이 강한 지역민의 호응이 컸다. 문화를 매개로 더이상 사찰은 불자들만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함께하는 공간임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무각사 문화원은 오는 4월부터 사찰음식, 다도, 요가 등 다양한 강좌를 운영할 예정이다. 그동안 상무지구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전통다원을 전면보수하고 ‘사랑채’란 이름으로 다시 개장했다. 우리 차와 다구들을 감상하며 편히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 주위도 정비했다. 난잡하게 자리한 정원수를 옮기고 현대인의 최대 적인 스트레스를 날리도록 곳곳에 대나무를 이식했다.
또 해탈문 주위에 낮은 돌담을 쌓아 수행공간과 휴식공간을 구분해 누구나 편히 쉬면서 수행하는 도량이 되도록 했다. 그렇다고 불자들의 수행을 챙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문화원에 시민선방을 개설하고 대중스님을 지도법사로 임명해, 입선 때면 스님이 직접 죽비를 치고 있다. 현재 30여 명의 재가선객이 입방을 신청하고 자유롭게 화두를 잡고 있다.
또한 신도회를 기능에 따라 재편해 법회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무각사 일주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문화관 위에 쓰여진 글귀가 눈에 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때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라.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하야 / 불수호란행 (不須胡亂行)이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이라. -청허휴정 (淸虛休靜)”
이제 변화하는 무각사는 단순히 무각사로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무각사는 광주불교, 나아가 한국불교를 재는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이준엽 (호남불교문화원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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