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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완의 영화칼럼]<아마데우스>교회의 ‘살리에리적 오해’
▲영화 <아메데우스>에서 모짜르트를 시기하는 살리에리 |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가하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영화 속 성공한 궁정음악가 살리에리는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음악을
사용하여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그가 왕의 음악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이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차르트를 사용하신 하나님
그런 살리에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습니다. 모짜르트는 기막힌 음악, 천상의 음악을 만들고 있었지만 전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천박하였고 음란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자신보다 우월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같은 모차르트의 음악, 그것에 비하면 자신의 음악은
비참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음악은 노력없이 나오는 것같은 음악이었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리에리 안에 분노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살리에리의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하나님과 원수되는 길로 들어서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파멸시키는 계획으로 발전합니다.
살리에리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차르트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해서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차르트에게 준 능력이 조건적인 것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살리에리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댓가로 능력을 주신 것이거나 많은 능력과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매우 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음악은 술집에서 창부들과 희희낙락거리면서도 흘러나왔고,
하숙집을 운영하였던 장모의 날카로운 목소리속에서도 기막힌 선율을 찾아냈습니다. 그 음악들은 천상의 소리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어떤 조건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라고 찬송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꾸짖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 주님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돌들의 찬송도
받을 수 있는 매우 당연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결하고 깨끗해보이는 사람의 영광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때 비참해보이고 정결해보이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들은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서 목회를 금방 시작했던 시절 저는 매우 문제있고
답답한 목회자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미자립 시골교회에서 낮은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더욱이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겪어오면서 만났던 열등감과 죄책감이 나를 깊이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아마데우스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마데우스, 하나님은 나에게 매우 선명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영화를 통해 나에게 속삭이셨습니다. 스스로 살리에리처럼
부요하지도 성공하지도 않았기에 낮은 자존감에 있던 내 앞에서 문란하고 천박한 모차르트를 사용하시는 그 모습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거룩과 죄된 모습에 관계없이 너의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을 지지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로 성장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살리에리적 오해
우린 지금 왜곡된 교회의 가르침에 상처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비참하고 한심한 존재로 평가하고 하나님은 저기 부요하고 힘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더욱 많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오해에 빠져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기독교는 부요해졌고 그 부요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위험에 처 해있게
되었습니다. 창녀, 거지, 고아, 과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장애를 가졌던 이들과 즐겨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복음을
왜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요해진 자만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은 자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매우 근사하게 보이고 힘을 가진 왕궁제사장 아마샤를
쓰기보다 뽕나무를 치던 평범한 목자 아모스를 사용하셨습니다. 노예였던 요셉, 80세의 힘없는 노인 모세를 출애굽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보잘것없어보이는 어부, 세리등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나가는 사람만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살리에리적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돌들로도 영광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어서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대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충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모습을 감사하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칼럼니스트 하정완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영화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읽고 묵상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는
하정완은 꿈이있는교회(www.dreamchurch.com)의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