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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의 펀치볼, 대암산, 용늪 여행...
비무장지대(DMZ)는 민족의 아픔을 간직한 땅. 이곳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분단 이후 50년이 넘도록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탓에 오히려 더 아름다운 가을 비경을 뽐내고 있다. 파란 하늘을 빨갛게 수놓은 단풍은 그 옛날 격전지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강원도 양구는 일반 관광객들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안으로 들어가 비무장지대(DMZ)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민통선에 있는 “두타연”은 청정 자연에만 서식하는 희귀 동.식물들의 보고다. 또 을지전망대에 오르면 북녘땅에 붉게 물든 단풍을 감상할 수 있으며 “펀치볼”이라 불리는 해안면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는 비무장지대(DMZ)의 특별한 가을 속으로 초대한다.
손때를 타지 않은 생명의 땅...
양구군 방산면 건솔리 두타현으로 가는 31번 국도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이곳 단풍은 “물든다”는 표현 대신 “핀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답답했던 가슴도 활짝 열린다. 그동안 어떻게 찌든 도심속에서 살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시원하다.
양구 읍내를 떠난지 20분만에 민통선 지역을 통과하는 고방산 초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만 더 올라가면 북녘땅이다. 초소에서 비포장 흙길을 1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두타연으로 지난 2003년06월01일부터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곳이다. 두타연으로 가는 길은 북한의 내금강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입천 주위의 단풍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가는 길목마다 “지뢰”라고 쓰인 표지판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생물들이 반겼다. 지뢰가 자연의 파수꾼 역할을 한 셈이다.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은 예산이 없어 포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마지막 흙길로 남겨놓겠다.”는 주민들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흙길에 사방 배수로를 깔아 포장도로에 비해 관리비용도 더 든다고 한다.
차를 세운 뒤 길을 내려가자 두타연 폭포가 시원스레 물길을 가른다. 푸른 두타연 바위마다 붉은 단풍과 물이끼가 파랗게 수를 놓았고 연못에는 멸종위기에 있는 열목어가 대량 서식하고 있다.
두타연은 고려 18대 왕인 의종 4년(1850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기도를 하던 희정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찾아 내려와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두타연에서는 희정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는 보덕굴을 볼 수 있다.
이름은 인근에 있던 두타사라는 사찰과 두레소(용소)라는 옛이름이 합쳐져 두타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두타사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6·25전쟁 등으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두타연 폭포 위로 올라가면 수입천을 빨갛게 물들인 단풍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어 비무장지대(DMZ)를 따라 차를 타고 10여분 거슬러 올라가니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 나온다. 금강산 장안사가 이곳에서 30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과거에는 양구 주민들이 걸어서 장안사를 다녀왔다고 한다. 지금은 북한 땅인 문등리는 양구에서 가장 번화했던 면소재지의 하나로 매년 큰 장이 서던 곳이어서 주민들이 이 길을 따라 걸어 갔다고 전해진다. 수입천을 가로지르는 하야교 앞에서 보면 멀리 대우산의 가을 전경이 일품이다.
여기에서 10분쯤 올라가면 나오는 비득재 고개는 6·25 전쟁에서 아군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앞으로는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을 감상하기 좋다. 이 일대는 두밀령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주인공 진태(장동건 역)가 죽은 곳이라고 한다. 멸종 위기에 있는 산양과 하늘다람쥐 등 천연기념물과 쇠딱다구리, 백로를 볼 수 있다. 겨울에는 방산면 현리 선안지역에 천연기념물 243호인 독수리떼가 매년 겨울에 날아와 월동하고 있다.
두타연은 군사지역에 있어 관광에는 다소 제약이 따른다. 2∼3일전 미리 화천군청(033-480-2251)에 신청한 뒤 문화해설사를 동반해 들어갈 수 있다. 전화나 팩스, 이메일 등으로 군청에 신청하면 된다. 신청자는 당일 오전 09시까지 양구군 특산품 전시관인 “명품관”에 모여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두타연과 금강산 가는 길목등을 돌아본 뒤 낮 12쯤 돌아 나온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 초등학생은 1,300원.
●“펀치볼”의 붉은 가을...
양구읍에서 산령을 굽이굽이 돌아 넘어가면 “펀치볼”이라는 이색적인 마을이 나타난다. 해안면 일대 6개의 마을이 가칠봉에서 바라보면 마치 화채그릇처럼 움푹 파인 지형 안에 형성돼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亥.돼지 해,安.편안할 안)이라는 이름은 과거 물이 빠지면서 생겨난 뱀들이 주민들을 괴롭혔고 이를 돼지가 잡아먹어 주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지형 형성 원인으로는 이 일대가 차별 침식으로 생겼다는 설과 운석이 충돌해 파였다는 설 등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해안 분지는 해발 400∼500m 지대에 형성돼 있고, 주위를 둘러싼 산들도 대부분 해발 1,000m를 넘는다. 도솔산 고개를 넘어 분지로 내려가거나 을지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면 펀치볼의 가을을 느낄 수 있다. 펀치볼에서는 북녘땅의 가을을 바라보기 좋다.
가칠봉 능선에 자리잡은 “을지전망대”는 1,049m에 위치해 쾌청한 날이면 북쪽으로 금강산 비로봉 등을 볼 수 있다. 휴전선 인근에 있는 23개 전망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망대에서는 멀리 농사를 짓는 북한 군인과 예쁜 선녀폭포를 볼 수 있다. 선녀폭포 아래 성내천은 과거 북한이 심리전을 쓰기 위해 북한 여군들을 발가벗겨 목욕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해안면 일대는 “평화·통일 관광지”. 부근에 제 4땅굴과 을지전망대, 전쟁기념관 등이 있는데 군통제소에 신고한 뒤 차로 올라가 둘러볼 수 있다. 입장료는 모두를 둘러보는 데 성인 2,500원, 초등학생 1,300원이다.
제4땅굴은 지금까지 발견된 4개의 땅굴 중 유일하게 전동차가 설치돼 있어 편하게 땅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양구는 역사.문화관광지로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양구는 화가 박수근의 고향으로 지난 2002년 박수근 미술관이 완공돼 문화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박수근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작품 중 “강변에서 빨래하는 여인”이 미국 소더비 경매장에서 31만달러(약 3억1,000만원)에 팔려 주목을 받았다. 미술관에는 선생의 스케치와 드로잉과 같은 습작과 판화, 유화 등 유작 진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양구 선사박물관은 파로호에 위치한 국내 최초의 선사박물관이다. 무문토기와 찌르게 등 650여점의 출토 유물과 고인돌 공원, 석기제작체험관, 움집 등을 볼 수 있다.
향토사료관에서는 양구지역 농기구와 세시풍속자료 등 600여점의 생활민속자료를 볼 수 있으며, 방산 백자 가마터는 고려말부터 백자를 만들어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자 가마터로 금강산에서 발견된 이성계 발원문 백자발을 만들어낸 곳으로 유명하다.
겨울철 건강식 시래기...
양구는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청정지역이다. 특히 펀치볼에서 생산되는 “청정 시래기”는 구수하고 맛이 좋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곳 시래기는 “가을무”를 늦게 심어 무뿌리가 자라기 전에 잎을 채취, 무청이 가늘고 연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 시래기는 다른 지역보다 섬유질과 비타민이 더욱 풍부해 겨울철 건강식으로 제격이다. 지역 농민들을 중심으로 4∼5년전부터 통일고랭지채소 영농조합법인(033-481-8850)을 구성, 매년 20∼30t의 시래기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수도권 지역 농협 하나로 마트에만 판매하는데 “대암농협 시래기”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조춘자(62) 공장장은 “시래기 잎을 채취한 뒤 45∼60일을 말려야 하기 때문에 12월 중순 이후부터 시래기를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값은 건조된 것은 1㎏당 8,000원이고, 삶은 것은 1㎏당 3,000원이다.
■ 미리 알고 가세요...
어디서 먹고, 묵을까 양구는 1개읍 4개면, 인구 23,000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군이지만 깨끗하고 숙박업소가 많다. 특히 지난해 개장한 “양구 KCP호텔”(033-482-7700)은 50개의 객실을 갖춘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과 딜럭스룸, 트윈베드룸, 온돌 등이 있으며, 한식당과 양식당을 갖추고 있다. 호텔 2층에는 모던바 “칼라”가 있으며, 사우나와 주점이 있다. 주말에는 128,000원이지만 평일(월∼금)에는 64,000원으로 50%할인해 준다. 한식당 수련에서는 이 지역 청정 송이버섯으로 만든 송이전골(1인분 18,000원)과 송이덮밥(12,000원)이 맛있다. 식당은 양구읍내 풍년집(033-481-6050)의 시래기 해장국(4,000원)이 일품이다.
여행상품 쉽게 양구 여행을 다녀오려면 DMZ관광(02-706-4851)의 여행상품을 이용하면 편하다.1박 2일 일정으로 두타연 트레킹(14㎞) 걷기를 포함해 펀치볼, 제 4땅굴, 을지전망대, 박수근 미술관 등을 돌아본다. 성인 65,000원. 오전 8시30분에 한국관광 공사앞에서 출발한다.
가는길 서울에서 45번 국도를 따라 춘천을 경유하거나 6번 국도를 타고 홍천으로 들어와 44번 국도를 따라 양구로 들어오면 된다. 서울에서 3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는 동서울에서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7시10분까지 하루 11차례 운행하며, 춘천에서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5차례 운행한다.
양구시외버스터미널 033)481-3456
파로호...
파로호는 1941년 북한강 상류에 완공된 화천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 호수이다. 원래는 “화천 저수지”였으나 1950년대 초 국군이 중공군을 물리친 것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란 뜻의 “파로호”로 바꿨다. 이 일대는 오늘날까지 때 묻지 않은 자연미를 자랑하고 있다.
유역의 상당 부분이 민간인 출입 통제선이나 DMZ(비무장 지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양구군은 청정 지역과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 가칠봉, 도솔산, 피의 능선, 펀치볼 등 한국 전쟁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전투의 현장도 많다. 가칠봉 능선의 을지전망대(해발 1,049m)에 서면 금강산이 또렷이 보인다.
문의는 양구 군청 033)480-2251
대암산(강원도 양구군 동면)...
양구군 동면 팔랑리와 해안면 만대리, 인제군의 서화면 서흥리와 경계하고 있는 해발 1,316m의 이 산은 정상부근의 고층습원으로 알려진 명산으로 1759년(영조 35년) 기묘장적에는 “대암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25때 국군 용사들과 북한 괴뢰군 제2사단이 평화롭던 이 강산을 피로써 물들이게 한 격전지로 백전백승의 사기에 넘친 국군에 의해 점령 수복된 명산이다.
대암산 산정에서 밑으로 약간 내려가면 정상부근에 있는 분지 형으로 된 큰 용늪과 작은 용늪은 이 지역의 기후에 의한 것이 아닌 제2의 요인에 의한 것이어서 위고층습원이라는 것이 있다. 습원의 크기는 동서 약 150m 남북 약 100m 내외의 부정형으로 서북에서 동남으로 느린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경사각도는 5˚~10˚내외이고 습원은 비교적 평탄하게 동남단에 1~2m 높이로 뚝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이 늪은 학술적인 가치뿐 아니라 조름나물을 비롯하여 비로용담, 칼잎용담, 끈끈이주걱, 물이끼, 북통발등 특산식물의 자생지는 물론 총 163종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어 큰 의의를 지닌 곳이다. 또 곤충분야에서도 채집하기 힘든 벼메뚜기, 참밀드리 메뚜기, 애소금쟁이, 홍도리침노린재 발견의 특이함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휴전선 155마일에 이르는 이 지역은 동식물이 자연 상태 그대로 서식하고 있는 그들의 낙원, 휴전 후 41년간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아 각종의 희귀생물과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암산에 분포한 식물의 종류는 총 59과 123종으로 그 중 고층습원의 특유종이 19종 미 기록 종 15종이 알려져 있어 생물보고이며 1973년07월10일 인근의 대우산과 함께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주변 관광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 청량사, 해인사, 홍류동계곡
교통
승용차 : 홍천→철정검문소→산남(남면)→삼거리(좌회전)→44번 국도 이용 팔랑리→민통선 검문소→대암산 통문(453번 도로 이용)
춘천소양강댐 방면→오봉산→양구선착장 양구 외곽도로→하리 검문소→한전리(해안마을 방향)
펀치볼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해안면)...
이곳은 전형적인 침식분지이다. “펀치볼”은 6.25전쟁 당시 미군 정찰병들이 과일화채를 담는데 쓰이는 “Punch Bowl”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별명처럼 붙여준 이름이다.
해발고도 약 450m로 모양이 마치 접시와 같으며 대암산 (1.304m) 줄기인 가칠봉(1,242m), 대우산(1,179m) 및 도솔산(1,148m)을 연결하는 남북방향의 분수령이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방사상의 작은 하천이 분지바닥에서 모여 인제군 북면방향의 소양강으로 유입된다.
이와 같이 희귀한 지형을 이루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 운석과의 충돌설과 차별침식설이 있는데 분지에 운석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고, 분지바닥이 주변에 비하여 무르다는 이유에 따라 차별침식설이 더 신뢰를 받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는 6개리 470여 가구 1,7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민간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해 있으며 지정학적인 면에서도 많은 특이점을 갖고 있다.
양구군 동면과 해안면 사이의 돌산령에서 바라본 구름에 닿은 듯한 펀치볼 지면의 모습은 매우 볼 만한 것이다. 제4땅굴, 을지전망대, 전적비, 북한관, 전쟁기념관 등 안보전적관광지로 주목 받고 있다.
개장시간 : 야간(일몰후 ∼ 일출전까지) 통제
교통 :
버스 이용시 : 양구읍-동면-무학초소-돌산령-해안면
파로호 :
일제시대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6.25당시 국군이 중공군의 대공세를 무찌른 것을 기념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라는 친필휘호를 내린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이승만 대통령이 별장을 짓고 다녀갔을 정도로 주변경관이 수려하다. 종 담수어가 풍부하여 낚시객들로 성황을 이루며, 특히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빙어를 낚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교통 :
승용차 :
양구읍→공수리→월명리(13km,20분)→죽곡리→고대리→공수리(12km, 20분)
시외버스 :
동서울터미널→양구읍(176km,11회,3시간 30분) 상 봉터미널→양구읍(171km,12회,3시간30분) 양구읍→공수리→월명리(13km,3회,30분)→죽곡리→고대리→공수리(12km,4회,30분)
주변 연계 관광지 :
파로호→선사박물관→후곡약수→팔랑민속관→펀치볼안보전적지
파로호→선사박물관→직연폭포→수입천→천미계곡→평화의댐
문의처 : 양구군청 관광문화과 : 033)480-2251
펀치볼 :
화채그릇을 닮았다고 “펀치볼”...
“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제인러셀 고지”...
전방을 다니다 보면 처절한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름들이 남아 있다. 바로 각양각색의 고지 이름이다. 그 가운데는 투쟁심을 고취시키거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리는 진저리나는 이름도 있지만 개중에는 전쟁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여배우의 가슴을 딴 재미있는 것도 있다.
화채그릇을 닮았다해서 붙은 이름인 펀치볼. 을지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김일성고지(924고지)와 모택동고지(1,026고지)가 보인다. 국군해병 1연대가 철옹성 같은 1,026고지와 924고지를 반드시 탈취하겠다는 뜻으로 김일성과 모택동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해안분지를 둘러싼 도솔산, 가칠봉, 대우산 등은 한국전쟁 때 대표적인 쟁탈의 요소였다.
양구(방산면)에서 또 하나의 유명한 고지는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다. 종군기자들은 피로 얼룩진 능선이라 해서 938고지를 이렇게 붙였다. 이 전투는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를 장식하기도 했다. 북한군(일명 깃발부대)과 국군의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고지군은 “단장(Heartbreak)의 능선”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종군기자들이 “심장이 찢어질 듯한 참상”이라 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이 이 고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다.
양구는 아니지만 오성산과 김화 사이 험한 산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두고 격전을 벌인 곳을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 했다. 적진과의 거리가 가까워 저격 당하기 십상이었다 한다. 오성산(1,062고지)은 김일성이 “육사 군번 세 도라꾸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저격능선 서쪽에 있는 두개의 봉우리는 “제인러셀고지”라 했다. 미국의 육체파 여배우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해서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이 제인러셀 고지는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더듬어왔듯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수많은 과거의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에 대한 보전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시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문화유산과 함께 아픈 현대사의 상징인 전쟁·분단 유적들도 보전해야 할 시점에 왔다. 다시는 이런 전쟁과 분단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도...
화채그릇 같다 해서 펀치볼이란 이름이 붙은 해안분지. 산간벽지인 이곳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장구한 세월동안 사람들이 살았음이 확인됐다.
“김선생, 해안중학교에서 근무해보지 않을래요?”
1986년초. 춘천여고에서 근무중이던 김동구 교사는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해안중(亥安中) 발령을 통보받았다.
“그 지역의 자연생태계와 역사문화유적을 조사해야 하는데 선생님이 해줘야겠어요.”
해안중이라. 양구군 해안면이라면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가 아닌가. 아마 편치볼이라 하면 귀에 확 들어올 것이다. 해안면은 1956년04월 이른바 “정책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민통선 이북에 있는 유일한 면단위 마을이다. 휴전선이 지척이고, 민북지역이다 보니 학술조사가 어려웠다. 마침 도교육청이 역사.생태부문 전공자인 교사 5명을 뽑아 해안중학교에 발령을 낸 것이다.
# 중학교 교사가 찾아낸 선사유적 ;
“중책을 맡고” 부임했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막막했다. 역사를 공부했다지만 학술조사에는 경험이 없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05월 어느 날이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집 마당에서 꼬마가 무슨 돌 같은 것을 갖고 노는 걸 보았다. 유심히 살펴보니 돌로 깎은 무슨 도구가 분명했다. 아니 이것은 돌로 만든 창이었다.
“꼬마야. 이거 어디서 주웠니?”
“저기 학교 앞 밭에서요.”
김동구 교사는 곧바로 꼬마가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꼬마의 말이 맞았다. 김교사는 잠깐의 노력으로 민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를 갈던 숫돌 조각 등 선사시대 유물들을 대거 수습했다. 김교사는 그때부터 신바람을 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비군 훈련을 위해 조성된 참호였다.
“참호의 벽을 봤는데요. 깎인 흙, 문화층에 청동기편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2005년 정년퇴임한 김동구씨(65)는 기억의 편린을 짜맞춘 회고담을 기자에게 풀어헤쳤다.
“그때부터 유물이 많이 나온 밭 10,00여평에 대한 표본발굴에 들어갔어요.”
발굴 전문가도 아닌 그는 2m×1.5m 정도의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혼자 파셨어요?”
“아니, 우리 학생 2명이 붙었죠. 어휴, 지금 그 놈들 이름이 생각 안나네.”
# 중학생 발굴단 :
그러니까 중학교 선생님이 발굴단장이었고, 까까머리 중학생 2명이 발굴단원이었던 셈이다.
“애들을 데리고 1년 반 동안 발굴했어요. 방학 때를 주로 이용했는데, 유물이 다치지 않게 얼마나 조심스럽게 했는지...”
“해안중학교 발굴단”의 성과는 대단했다. 발굴구덩이 밑바닥(1m20㎝ 깊이)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편을 비롯해 수많은 석기, 토기 조각들을 수습한 것이다.
“우리는 토기편, 석기편들을 하나하나 맞추었어요. 1년반이 지난 뒤 정리해보니까 유물이 라면상자로 2상자가 되더군요. 그래 어떻게 해요. 학교에다 (유물을 진열할) 책장 좀 사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해안중학교에 “중학교 발굴단”이 조사한 유물이 전시되었다. 전시실의 이름은 해안중 향토사료관. 이 유적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은 정식 학술조사가 시작된 1987년부터. 강원일보가 기획한 민통선 북방지역 생태문화계 조사단의 일원으로 해안면을 방문한 최복규 강원대 교수의 말...
“해안중학교에서 김동구 선생이 모아놓은 유물을 실견하고 해안면 지역을 쭉 조사했는데 아, 거기서 20여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어요. 소양강 상류로 유입되는 성황천과 해안천가에 고인돌 무덤이 흩어져 있었지요.”
당시 문화공보국에서도 민통선 학술조사를 벌였는데 그때 조사단에 참여했던 김병모 한양대 교수도 김동구 교사에게 “대단한 유적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 일이 있고나서 해안중학교가 문화공보부에 의해 ‘문화재보호학교’로 지정되었어요.”
해안의 지형단면도 :
아직 지표조사만 이뤄졌을 뿐인데 이 지역에선 10만년 전으로 편년될 수 있는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시대 대표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표지유물인 고인돌떼와 점토대기(덧띠무늬) 토기, 그리고 철도자(쇠손칼)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 물론 김동구 교사가 확인한 빗살무늬 토기편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고배형토기, 쇠뿔모양 손잡이, 홈자귀, 간돌도끼, 숫돌, 갈판, 돌끌, 보습, 가락바퀴 등 청동기시대 덧띠토기 주거유적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유물 조합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학계가 놀랄 만했다. 이 첩첩산중에 구석기인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점,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물러간 다음에도 신석기인, 청동기인, 초기 철기시대인들이 단절없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유적을 조사했던 차재동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는 “신석기의 경우 빗살무늬 토기가 북한강 최북단 내륙지역에서 나왔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 피안의 세계 :
최복규 강원대 교수는 특히 청동기 유물상에 주목한다.
“이런 산중 분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심산유곡에 1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죠. 그리고 덧띠토기인들의 경우 지표 채집만으로도 주거유적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유물 갖춤새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요.”
최교수는 “하나의 부족집단이 이 해안면을 거점으로 해서 둥지를 틀고 살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청동기 주거지만 보면 BC 3세기대 대규모 취락지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왕성한 이동력을 기반으로 사냥.채집 생활을 한 구석기인들이야 이런 첩첩산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정착생활로 나름대로는 편안한 생계기반을 갖고 있던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왜 이 오지에 둥지를 틀었을까.
“처음 조사하러 올 때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이 들어와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어가는 입구가 얼마나 가팔랐는지….”
최복규 교수는 87년 당시 해안면 답사를 떠날 때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한번 추정해 보자. 옛 사람들은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가 최상류 지류인 인북천에 닿았을 것이다. 그런 뒤 해안분지 동쪽지역인 당물골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들은 별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첩첩산중, 그 험난한 물길과 계곡을 아슬아슬 통과해서 닿은 땅.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광활한 초원... 그것은 피안의 세계였을 것이다.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세상사, 괴롭고 힘겨운 세상사 모두 잊고 살았을 것이다. 8월 어느 날 기자는 ‘왜’라는 궁금증을 안고 해안분지에 닿았다. 수속을 밟고 군인이 지키는 초소를 지나 가파른 외길을 10여분 달려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을지전망대. 비무장지대 철책 위에 선 해발 1,049m의 전망대에 섰다. 그리고...
-수천년 터전... 무릉도원의 꿈... 그러나 갈등의 땅-
최전방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야. 정말 대단하네.”
그야말로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가 터졌다.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구름 사이로 환한 햇빛이 펀치볼(해안분지)을 비추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왜 구름은 저토록 초록의 분지만을 피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아니면 환한 조명 아래 야간경기를 벌이는 축구장을 관중석 맨 꼭대기에서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해안(亥安)에 들어온 선사인들도 이곳(을지전망대)에 올랐겠지. 신이 내린 듯한 저 찬란한 땅을 바라보고 경외감을 느꼈겠지. 그리곤 마음의 본향으로 삼았겠지. 해안분지, 즉 펀치볼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이 빚은 경이로운 땅이다. 해발 1,000m 고봉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쌌다. 서쪽은 가칠봉(1,242m), 대우산(1,179m), 도솔산(1,148m), 대암산(1,304m) 준령이 막았다. 동쪽엔 달산령(807.4m), 먼멧재(730m)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북쪽엔 휴전선 너머 저편에 보이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 자연현상의 조화 :
분지의 남북 방향은 11.95㎞, 동서 길이는 6.6㎞이다. 분지의 단면은 U자형인데, 맨 밑바닥의 고도가 400~500m이니, 주변 산지보다 400~800m 낮은 셈이다. 대체 무슨 조화인가. 왜 이 첩첩산중에 이런 엄청난 분지가 생겼을까. 어떤 이들은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지금과 같은 거대한 분지가 조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엔 이른바 “차별침식”이라는 전문용어로 설명하는 게 대세다. 즉, 분지 중심부는 중생대 쥐라기(1억8,000년~1억3,500년 전)에 지각을 뚫고 올라온 화강암이다. 분지 바깥쪽은 선캠브리아기(5억4,000만년 전까지)의 변성퇴적암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분지 중심부의 화강암은 고온습윤한 기후 때문에 주변 산지의 변성퇴적암보다 훨씬 빠르게 침식됐다. 원래 지표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강암은 일단 지표상에 노출되면 심한 풍화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중심부의 화강암은 빗물과 바람 같은 환경에 쉽게 깎여 주변의 퇴적암 지대보다 낮은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안분지,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곳, 천혜의 터전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무릉도원 주민들이 했다는 말이 이랬던가. “우리 조상들은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온 이후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밖은) 어떤 세상입니까?”(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북한강 계곡, 심산유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선사인들 앞에 별안간 나타난 확 트인 세상... 그들은 이곳에 짐을 풀고 터전을 잡고 부족을 이루면서 오순도순 살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골백번 바뀌었을 지금... 하지만 해안분지로 가는 길은 유비쿼터스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지금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 무릉도원의 꿈 :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군대얘기”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이야기. 일행은 바로 그 인제·원통을 거쳐 해안분지로 들어갔다. 민간인은 드물었고, 최전방 군인들의 모습만이 눈에 띄는 여정. 간간이 마주치는 헌헌장부 사병들의 군기 바짝 든 새까만 모습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기자가 가는 이 길은 선사인들이 그들만의 “무릉도원”을 찾아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해안분지의 서쪽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물은 비교적 낮은 동쪽의 당물골로 합류하는데, 합류한 물은 해안분지를 빠져나와 인제 방면으로 흐른다.
그러나 이 길은 20세기 들어 무릉도원이 아닌, 분단·냉전의 한많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1956년04월25일.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그 “별천지”에 150가구 965명의 “개척민”이 이주했다.
해방 이후 북한땅이었던 이 해안분지는 한국전쟁 후 “수복”되었다. 1954년 유엔군 사령부는 이른바 “수복지구”의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넘겼다. 정부는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고, 국토의 효과적인 이용을 위해 민북지역에 대한 정책이주를 추진했다. 바로 해안면에 도착한 개척민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닿은 해안면은 면 전체가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 특수한 곳에 온 사람들 역시 그 옛날 선사인들처럼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불발탄과 지뢰가 지천에 깔린 땅을 일구었을 것이다.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해안분지엔 510가구 1,426명이 살고 있다. 주로 감자, 무, 배추 등 고랭지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다. 해방 이전에 살았던 원주민의 수는 5%선이며, 주민 가운데 70%가 정책이주해 왔던 사람들이다.
휴전선 바로 밑 마을엔 2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주민들의 농사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채로운 풍경이다. 이들 역시 이역만리 먼 곳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곳을 찾았을 테지...
# 분쟁의 땅으로 :
21세기에 접어든 이때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그랬듯 유토피아의 꿈을 일궜을까. 물론 주민들의 삶은 다른 지역 농가보다는 넉넉하다. 주민 이호균씨(해안면 오유2리)는 “다른 지역보다는 1.5배 정도 소득이 높은 편”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해안분지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린 “삶의 궤적”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함광복 GTB DMZ연구소장은 “현대사의 흐름에서 보면 해안분지는 전쟁.분쟁의 땅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는 한 뙈기의 땅이라도 빼앗기 위해 남북간에 처절한 전투를 벌였잖아요. 그리고 그 후에는 정책이주민과 토지 원소유주 간 치열한 토지분쟁이 펼쳐지기도 했죠. 지금도 다툼은 끝나지 않았어요. 정부를 상대로 국유지를 불하받기 위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지요.”
특히 1980년대 일어난 해안면 토지분쟁은 민북지역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고 한다. 1956년 정책이주 때의 정부방침은 “주인 없는 땅을 마음껏 개간해서 먹고 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떠났던 땅주인들이 돌아오자 토지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은 결국 토지 원소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피땀을 흘린 개척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책이주자들이 일군 땅(1,980만㎡)이 속속 국유화되기 시작했다. 개척자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국유화한 땅을 다시 경작자에게 불하하겠다는 방침이지만 1만㎡ 이상은 불허한다는 방침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10,000㎡(3,000평)는 너무 작은 땅. 그러니 정부를 상대로 또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는 무릉도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이곳에 둥지를 튼 선사인들도 맨손으로 이 땅을 개척했을 터. 노동, 갈등, 타협과 같은 지난한 과정 끝에 수 천년의 터전을 꾸몄을 것이다.
해발1,280m의 습지 “용늪” :
대암산(1,304m)을 넘어가는 길에 안개비가 무섭게 내린다. 험하고 먼 굽이굽이 길이다.
천혜의 고층 습원인 용늪...
그런데 대암산 정상 바로 밑 북 사면, 해발 1,280m나 되는 곳에 엄청난 습지가 있다니 상상이나 할 일인가. 용늪이다. 용늪은 둘레 1045m, 면적 3.15ha에 달하는 고층습원이다.
이런 고원에 왜 습지가 생겼냐면 기온차가 크고 연중 5개월 이상 영하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 때문에 안개일수도 170일 이상 된다. 이런 혹독한 기후 때문에 식물이 분해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퇴적됐다. 5,000년 동안 1.4m가량의 이탄층이 시대별로 켜켜이 쌓인 것이다. 용늪은 1966년 비무장지대(DMZ) 조사단에 의해 발견됐는데, 현재는 람사협약에 의한 습지(1997년)로 지정됐다. 가히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금강초롱, 개불알꽃, 진퍼리새, 꼬리조팝나무, 왕삿갓사초, 솔잎사초 등 각종 식물 190여종, 곤충 220여종이 보고된 바 있다.
지금 용늪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 군부대 주둔지역이기도 하고, 늪의 육화현상이 빠르게 진행된 탓이다.
도로사면에서 토사가 계속 유입되고, 이에 따라 용늪으로 들어오는 물길이 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요즘에는 원주지방환경청과 국립환경과학원, 관할 군부대 등이 주체가 되어 용늪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김기용 원주지방환경청 생태관리팀장은 “군부대와 생태 전문가 등으로 용늪 보전클러스터를 만들어 늪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보전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한때는 육화의 책임을 두고 논쟁이 빚어졌다고 한다. 1970년대말 군부대가 스케이트장을 만들려고 용늪에 둑을 쌓았다는 둥, 지나친 학술조사로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 육화가 가속화되었다는 둥...
군부대 주둔이 용늪의 상황을 악화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보면 군부대가 사람들의 무분별한 접근을 막아 그나마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나올 수 있겠다. 어찌됐든 사람이 문제다.
5,000년간 보존된 자연생태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 역시 사람인 것을. 그런데 요즘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심상치 않은 한반도의 기후 변화가 그것이다. 기후 변화가 용늪, 아니 우리의 자연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