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에게 해 주변의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서부 및 크레타 섬에서 일찍이 청동기 문명이 발생하였으며 강력한 왕의 지배하에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명이 꽃을 피웠는데 이를 크레타 문명이라고 하였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20세기경 그리스 인의 일파가 세운 문명으로 그리스 본토인 미케네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여성적인 성격을 띤 고대 문명이었다.
그리스의 원주민은 아케아 인 이오니아 인, 에올리아 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일찍이 그리스 북쪽으로부터 도리아인들의 남침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와해된 원주민들은 재산을 버린 채 가족을 거느리고 에게 해에 있는 섬이나 터키 남서부인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소아시아로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터키 남서부 지방에 여러 도시국가가 들어서더니 12개 도시국가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2개 도시국가 가운데 에페수스가 가장 번영을 누리는 도시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인들이 에게 해의 여러 섬들을 경유하여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던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이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여기다가 그리스 식 의회 민주 정치가 일찍부터 발달하여 시민들의 권익이 점점 개선되어 나갔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인한 휴머니즘적 세계시민주의 사상이 인권을 중시하려는 경향도 한 목 하였을 것으로 사려 되었다.
이오니아 지방은 에게 해와 면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서부 지역을 일컫는 말로 에페수스를 비롯하여 밀레투스 등 고대 도시국가들이 번영하였던 곳을 말한다.
통일 국가가 아니었던 이오니아는 이오니아 부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그들은 그리스 본토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일찍 진출하여 에게 해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과 교역을 하면서 차츰 이 지역을 식민화 하여 나갔으며 본래는 그리스 원주민이었던 이오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이오니아 지방이라고 불리어 그리스어의 사용과 함께 그리스 전통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였다.
이오니아 지방은 포카이아의 헤르무스 강어귀(현재 게디즈)에서 매안더 강의 어귀 근처의 남쪽 밀레투스에 이르는 좁은 해안지대와 키오스와 사모스 섬으로 구성된다.
이오니아 지방은 북쪽으로는 에올리아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리디아, 남쪽으로는 리키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은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의 경계 지역에 있었던 도시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정체성은 모호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리스 언어를 사용하고 풍습을 계승하는 등 거의 그리스의 일부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오니아 동맹은 12개 도시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밀레투스와 에페수스가 가장 선도적 구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중 이오니아 반란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도시국가는 밀레투스였다.
이오니아 동맹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전제왕권 때문에 12개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제국에 한때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실제 이오니아 12개 도시국가들은 그리스의 민주정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던 만큼 페르시아의 전제왕권을 쉽게 수용하지 않으려 하였을 것이다.
밀레투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있었던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 이름으로 현재는 터키에 속하는 지역이라고는 하나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 원주민인 이오니아 인들이 건너가 정착하면서 도시를 세웠던 곳 이었다
당시 밀레투스는 그리스 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나중에 리디아와 경쟁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리디아에 굴복한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페르시아에 복속되었으나 기원전 502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만하여도 반란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중심 도시이기도 하였다.
페르시아가 무자비하게 반란 세력을 진압하자 그리스인들은 모두 밀레투스의 함락을 슬퍼하였으나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이후 밀레투스는 한때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 속해 있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밀레투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상업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이며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고 하였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걸출한 철학자들을 배출하기도 한 곳이었다.
당시 이오니아 지방에 그리스적 도시국가들이 형성되었고 민주정치가 발달하였던 것은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았고 페르시아보다는 그리스에 더 결속된 성향을 띄었던 것은 그리스와 같은 이오니아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사려 되기도 하였다.
이즈미르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에페수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에페수수는 로마시대 여신을 모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성 바오로가 전교하였던 원형극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가장 관심을 갖는 곳 중의 한 곳이기도 하여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내내 에페수스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창밖에서 한시도 눈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에페수스로 가는 도중에 멘데레스 강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강물은 공장에서 배출되는 폐수가 흘러가서인지 탁하게 보였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인간들에 의해서 훼손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고니마음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환경이 오염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것은 가죽이나 섬유 따위를 물들이는 염료공장에서 사용하고 버려진 폐수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옷감을 물들이는 염료공장의 경우에는 공정과정에서 독극물인 화학염료가 첨가되어 공업용수를 오염시키는 등 공정과정에서 버려진 공장폐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독성 물질들이 들어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주변에 염료공장이 있어서 환경오염과 토지오염이 심각한 상태의 수준이라는 말을 듣고 강을 바라보니 검붉은 폐수가 강 하류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으며 환경을 위협하는 듯 안타깝긴 하였으나 조물주가 만들어 주신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도 정부의 신속한 조치가 뒤따랐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의 지휘 하에 그리스의 이주자들이 아나톨리아반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 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다고 하였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 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 도시로 이끌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가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는데 이와 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수스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적 이야기가 유래하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수스는 오리엔트를 멘 처음 통일하였던 앗 시리아가 멸망한 후 메디아왕국, 리디아왕국, 신바빌로니아왕국, 이집트의 4국으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리디아군주 크로이소스의 지배를 한때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하여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혼이 빠진 나머지 이곳을 정복하면서 에페수스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리시마쿠스는 피온 산과 코레쏘스 산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하였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들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88년, 에페수스 인들은 폰터스와 연합하여 로마인들에게 대항하려하였으나 로마의 세력팽창이 엄청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에페수스 인들은 곧 로마 편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로써 에페수스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상주인구만도 25만이 넘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아시아 최대 무역항로의 종착지이기도 하였으나 이와 같은 번영도 서기 17년에 일어났던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교회사에서 에페수스는 예수의 모친 성모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이기도 하여 이번 여행 기회에 사도 요한교회를 관람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에페수스는 사도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였고 이곳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을 완성하기도 하였으며 사후에 묻힌 곳이기도 하였다.
에페수스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수스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이후 교황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곳은 가톨릭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고도 하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하여도 에페수스와 그리스도교와의 연관성을 가진 역사성을 부각하여보려 하였으나 초기 7대교회의 위치를 확인하여보려는 나의 욕심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여행목적이 가톨릭교 성인들의 발자취와 활동상황 등을 조사하여 보려는 순례단의 여행과는 달리 일반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성인이나 교회의 활동을 조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 나는 실망이 앞을 가려서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여행에 대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체념하고 말았다.
에페수스를 여행하게 된 것은 가톨릭교에 대한 관심과 성 바오로의 전도 사역에 대한 역경을 조사하고 사도 요한의 활동상황을 알아보려는 데 목적을 두었었는데 고대 도시의 흥망사를 관람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물론 고대도시였던 에페수스를 관람하고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을 향유하였던 로마시대 귀족들이나 상인들의 부유한 생활들과 유적지에 산재한 건물들의 특징을 살펴보고 어느 정도의 사치스럽고 풍요로운 도시였는가는 대략 유추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한 다음 보병 2만 명과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수도 펠라를 떠나 동방원정에 나섰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당시는 헬레스폰토스)을 건너 그라니쿠스강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승전고를 울리더니 페르가몬왕국을 무너뜨리고 사르데스를 점령한 다음 에페수스와 밀레투스를 해방하여 이오니아 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호와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버스가 어느덧 이즈미르 주 셀주크 시내로 진입하자 나는 버스 안에서 벌떡 일어나 시내 이곳저곳의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살펴보기도 하였고 고대도시 에페수스의 옛 정서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호기심 때문에 정신없이 시내를 바라보았으나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곳이 없다”라고 하는 말처럼 옛 모습 또한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으며 상상 속에서 꿈으로 설계하였던 에페수스에 관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셀주크 시내 원형 교차로에 이르러 9시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직진하다가 유턴하여 우측 도로가에 정차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니 지중해성 나무들로 조성된 가로수가 아름답게 보였고 고대도시 에페수스 인근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며 100m 전방에 한글로 써진 에페소라는 식당의 간판을 바라보니 한글이 마치 국제적 언어나 된 듯 여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강조하였던 한국 식당이라는 말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반가움과 동족으로서의 끈끈한 민족애를 느낄 수 있었으며 점심식사 시간대를 맞추기 위하여 모든 한국인 관광객 차량들이 일시에 “에페소”식당으로 집결하는 바람에 도매 급의 헐값으로 넘어가는 신세로 전락하기는 하였으나 모두들 반가워하며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기만 하였다.
점심 메뉴는 비빔밥이라고 하여 한국에서 먹었던 비빔밥에 어느 정도의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 되기도 하였다.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식당 내부를 들러보았다.
벽에 붙여진 메뉴판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면은 물론 돼지 삼겹살도 있었고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도 있었다.
한국의 어느 한식 식당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깔끔하고 주변이 청결하렸다.
잠시 후에 식당 보조가 먼저 반찬을 가지고 왔는데 김치와 까두기가 먹을 만하게 보였다.
오랜만에 대하는 비빔밥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기대감이 충족되는 듯 주의 깊게 식단을 살펴보았다.
식단의 모양은 한국의 어는 음식점의 식단과도 비슷하였으나 기대만큼 한국적인 맛이 있을 런지가 궁금하였다.
한국에서처럼 부드러운 나물과 버섯이 들어있는 대접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부어 밥과 비빈 다음 그동안 한국 음식에 굶주렸던 식도락가의 식욕을 만족시켜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한 숟갈의 비빈 밥을 입에 털어 넣어 허기를 달래보려 하였으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약간은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김치는 양배추로 대신하여 부드러운 감이 떨어졌으며 신선한 것도 아닌 듯 그냥 투박하게 썰어 놓은 김치와 깍두기 접시에 젓가락이 쉽사리 가지 않았고 참기름으로는 그들의 상술인지는 몰라도 건강에 좋다는 지중해 근해에서 흔히 생산된 올리브유가 테이블위에 올려져있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었지만 올리브유는 아닌 듯싶었다.
역시 비빔밥에는 한국 고유의 구수한 맛을 돋우게 하는 참기름이 제격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올리브유를 밥에 부어넣어 고추장과 함께 비벼보았으나 화합이 잘 되지 않았으며 한국에서의 구수한 비빔밥을 연상하였던 행복한 생각은 사치에 불과하였다.
여행자들 개인의 입맛에 맞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식당은 비빔밥을 급조하였으리라 생각되었지만 비빔밥 고유의 구수한 한국적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행자로서 한가하게 한국적 비빔밥을 기대하여보았던 나는 비빔밥을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옆 사람들을 바라보고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없어졌다.
옆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니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신속하게 식사를 해치워 가려는 듯 보여서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놀림을 늘려 보았지만 마음처럼 몸이 뒤따라 주지를 않아서 그들을 따라 식사를 빨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식탁에서 일어나 재빨리 공립학교(돈을 지불하지 않는 화장실)로 향하였다.
패키지여행에서의 공동체 운명 정신은 필수적이어서 자신의 신체적 장애는 자신 스스로 제거하여야만 장거리 여행에서 만족할 만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마친 나는 에페수스 유적지를 돌아보기 위하여 버스에 승차하려 하였으나 관광버스 기사의 얼굴은 전과 같지 않은 표정으로 버스 시동을 걸거나 끄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상하여 물어보니 버스 상태의 조짐이 정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버스의 밧데리가 나갔거나 다른 전기적 결함이 생겨서인지 기사는 백방으로 핸드폰을 눌러대고 있었다.
식당에서 에페수수까지는 3km정도여서 걸어서 갈 수도 있는 거리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가이드는 재빨리 다른 한국인 관광버스의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입석으로 에페수스까지 갈 수 있도록 차편을 마련해 줌으로서 우리는 다른 한국인 관광버스에 승차하여 에페수스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에페수스의 남문에 도착한 나는 산재해있는 여러 곳의 유물들을 바라보고 마치 꿈을 꾸는 듯 느껴졌고 고대 도시국가라고하여 조그마한 건물터와 유적지의 잔해들만을 생각하였으나 로마시대 정치 아고라(State Agora)터에 있는 시청사 건물의 기둥이나 하드리아누스 신전, 헤라클레스 문, 오데온(반원형극장), 셀주크 도서관 등 화려하였던 전성기시대 유물들의 잔해들을 바라보고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치를 논의하였던 정치 아고라(State Agora)의 시청사 건물은 대리석 기둥들만 남아있어서 을씨년스러웠기는 하였지만 예전의 화려하였던 전성기시대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가로와 세로가 각각 110m에 이르는 정사각형 모양의 시청 청사는 고대 에페수스 시의 중심지인 듯 생각이 들었고 언덕 위에 있는 시청사에서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시가지와 입출항하는 항구가 한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에페수스 시청사가 있는 정치 아고라(State Agora) 언덕에 서서 항구 쪽을 바라보니 일부 건물들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파손되어 잔해들로만 흩어져 있었다.
모래에 섞인 돌을 체로 걸러내 듯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곳이라서 건물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일부 기둥들은 본래의 위치에 그대로 서서 세월의 흔적들을 소지한 채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는 너무 오랜 시차를 가진 고대 로마시대 도시국가 에페수스에 서있었음에도 마치 그당시 에페수스 도심에 서있는 것 마냥 생각이 들어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사치스럽고 풍요로웠던 시기였는가를 직감할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바닥을 장식한 거리를 따라 언덕 아래로 조금 내려가니 로마시대 5현재 중 한사람이었던 하드리아누스를 형상화한 신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옆을 돌아 작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더니 수많은 귀족들이 드나들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중 화장실도 나타났다.
화장실 중앙은 청동 동상이 부조되어 있었고 사면 모서리는 대리석 기둥이 서있었으며 벽을 따라 변기가 놓여져 있었는데 대략 50여개는 넘을 될 듯싶었다.
대리석으로 홈을 파서 만든 변기는 상류계층인 귀족들이 사립학교처럼 드나들면서 유료 화장실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어져서 현대 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장실을 연상케 하였다.
물론 당시에 고가인 종이를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경제적 문제에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 어려움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대체할 수 있었던 대안으로 변기 앞에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그들의 지적인 혜안에 그저 감탄하고 환호성을 지를 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헤라클레스 문은 로마를 상징하는 개선문처럼 세계를 아우르는 권력과 힘을 구현하고 있었으며 정치아고라(State Agora) 거리의 끝에 사자와의 싸움을 기둥에 형상화한 조각은 당시의 화려하였던 시대를 반영하고 있었다.
기둥 위에는 니케 여신상이 있는 부조물이 얹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헤라클레스 문을 중심으로 그 위쪽은 상류층 귀족들의 정치활동 및 생활 주거지인 듯 보였으며 아래쪽은 일반 시민들의 거처로 여겨졌다.
헤라클레스 문이 좁게 만들어진 것은 마차들을 드나들 수 없도록 하여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가운데 정치를 논의하고 정무를 관장하려 하려는 것도 있었겠지만 일반 시민들이나 도둑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은연중에 내포되어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빈부의 격차는 사람들까지도 편을 가르는 수단이 되었던 듯 씁쓸하여 지기도 하였다.
기둥에 조각된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네미아 숲의 사자를 죽여 그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있었으며 용맹한 헤라클레스를 조각한 기둥위에는 니케 여신상이 사뿐히 내려앉아있었을 것으로 생가해볼 때 니케 여신으로부터 신탁을 위임 받은 듯 여겨지기도 하였다.
헤라클레스 문을 넘어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있는 크레테스 거리로 내려왔다.
조선시대 한양 종루거리 양옆에는 정부로부터 임대받은 상점인 시전이 있었다.
시전은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상인들이 임대료를 납부하고 물건을 판매하였던 점포였다.
이러한 상점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을 시전상인이라 하였으며 육의전이나 경강상인들도 모두 시전상인에 해당하는 관허 상인들이었다.
물론 시전 앞에서는 난전상인이라고 하는 잡상인들이 땅바닥에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팔기도 있었다.
다만 금난전권이라고 하여 시전상인 집에서 팔던 상품과 같은 종류는 난전상인들의 좌판에서는 팔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는 규정이 있었다.
조선시대 종루거리의 시전처럼 크레테스 왼쪽 거리에는 각종 상품을 진열해 놓고 물건을 팔았던 점포가 있었다.
이들도 우리나라 조선시대 상인들처럼 시에 세금을 납부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던 어용상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왠지 조선시대 종루, 이현, 칠패 등지에서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였던 육의전이나 밤늦게까지 일손을 놓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어지는 어용상인들이 생각나서 한동안 크레테스 거리에 조성되어있는 점포들을 지켜보다가 에페수스 항구를 통하여서 각종 상품들이 이들에 입수되는 과정을 상상하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던 에페수스는 토사가 쌓여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번화하였던 예전의 모습을 전혀 느낄 수는 없었다.
로마제국 당시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물류 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항구에서 정치 아고라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만이 옛날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을 뿐 향수를 달랠 수 는 없었다.
로마나 그리스, 시리아나 이스라엘, 이집트나 북아프리카 등지로부터 각국의 상인들이 배를 타고 에페수스 항에 들어오거나 육로로 도착한 상인들은 에페수스 항구 부두의 시장에서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팔기위하여 땅바닥에 좌판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실크로드를 오가던 카라반상인들은 물론 아시아에서 찾아온 중국의 비단상인이나 우리나라의 상인들까지도 얼굴을 내밀고 금은 세공품이나 인삼을 팔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에페수스 시장에서 상품을 구경하며 물건을 흥정하였던 것처럼 우리나라 상인들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간혹 흥정하는 우리나라 상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사치품은 에페수스 항구가 아닌 크레테스 거리에 형성된 점포에서 고가에 팔렸을 것이다.
점포 앞에서 워그적거리며 물건을 사려한 귀족들이 조금이라도 값을 깎아보려는 듯 흥정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아른 거리기도 하였고, 예전의 북적거리고 번화한 거리를 조금이나마 걸어보려 하였으나 옛 전성기시대의 번영을 누렸던 영광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번화했던 거리는 관광객들로만 가득하였다.
번영 속에 영화를 누렸던 당시 귀족이나 시민들은 에페수스 도시에서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도시 밖으로 잠깐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니 시민들과 노예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올리브와 포도나무 아래서 잡초를 메고 있는 풍경처럼 에페수스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전원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당시 에페수스 시민이나 된 듯 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과 바리우스(Varius) 공중목욕탕을 거쳐 학문의 전당인 셀수스 도서관을 바라보며 내려가고 있었다.
셀수스 도서관은 135년 쥴리어스 아퀼라가 아시아 주 총독으로 에페수스에 부임했다가 죽은 그의 부친 셀수스를 위해 지은 것으로 아고라시장 앞에 2층 건물로 세워졌으며 1만2천여 권의 양피지나 파피루스로 된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셀수스 도서관을 바라보니 알렉산더대왕의 지원 하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하여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연상케 하였다.
습기나 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를 하였다는 셀수스 도서관은 사울 바오로가 2년 동안 제자들을 교육하고 강론하며 복음을 전파한 곳이었다고 하여 더욱 관심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초라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신전을 찾아갔다.
신전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하기도 하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직에 오르기 전부터 로마에서 대권 장악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아버지가 팔레스티나에서 돌아와 황제로 추대되면서 제 2인자 자리로 밀리더니 형인 티투스가 개선하여 로마로 들어오자 후계자 자리마저도 양보해야 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 형인 티투스를 없애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으나 당시 인기 절정에 올랐던 형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티투스의 통치가 짧게 끝나자 도미티아누스는 대권을 이어받았다.
권좌에 오른 그는 민심을 사로잡기 위하여 먼저 선임자들에 대한 경의를 정중하게 표하고 자기 고향집을 성전으로 만들어 플라비우스 가문에 바치고 형 티투스의 개선문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 의원들과 자주 충돌하기도 하였고, 유다 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유다와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어갔다.
한 때 터키에서 박해를 받아 잡혀온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황제는 사도 요한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감옥의 깊숙한 우리에 수감하여 놓고 한사람씩 처형시켜 나갔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기 위한 행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피 흘리며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을 구경하기 위하여 로마 시민들은 이러한 행사를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였다.
원형 경기장 좌석은 무료였지만 사람들은 경기에 돈을 걸고 내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많은 돈을 쓰곤 하였다.
동물들의 싸움도 자주 있었는데 주로 곰과 황소의 싸움이나 코끼리와 코뿔소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검투사들이 황소, 사자, 표범, 호랑이 등 사나운 맹수들과도 싸우기도 하였으나 가장 잔인하였던 경기는 역시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었다.
검투사들끼리의 격투는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싸워야 하였기 때문에 정신적인 파로감은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항상 정신적인 불안과 싸워야하는 검투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대우를 받기는 하였으나 신변의 불안은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거나 탈출하는 길 외에는 현실적으로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검투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하거나 탈출하려 하였을 것이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이라 하여 검투사 78명이 로마 남쪽 카푸아 검투사 양성기관을 탈옥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비추어보건 데 검투사들은 대체로 직업적인 싸움꾼이거나 노예나 사형수 또는 높은 보수 때문에 나온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자 감금되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원형극장으로 밀려 나왔다.
겁에 질린 그리스도인들은 한데 뭉쳐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기도로써 자신의 영혼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평안을 빌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곧이어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들이 엄금엄금 기어 나왔다.
사자 한 마리가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그리스도교 신자 한사람에게 다가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며 옆구리를 강타하였다.
옆구리를 강타당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흔적도 없이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 선혈이 난무하였다.
피의 남새를 맡은 나머지 사자들이 날아가듯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덮치니 한곳에 모여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비명소리에 한명이 사라져 갔고, 살려달라는 아우성 소리와 함께 두 명 세 명이 사라져 갔다.
이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감행하였던 그리스도교 신자 학살의 만행이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바라보니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한사람에 의하여 역사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를 공부하였던 사람으로서 수없이 가슴에 새겨왔었지만 개인의 탐욕과 영달을 위하여 진행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상적 박해는 영원히 역사적 기록에서 지워질 수 없을 것이다.
착하고 선한 시민들이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지 않고, 로마적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자의 우리에 던졌을 때부터 로마는 국론 통합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세계적 경찰국가로서의 지위는 하향곡선을 그렸을 것이다.
원로원들과도 마찰을 일으킨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최측근까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근위 대장과 결탁한 왕비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독단적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시대적 말기에 가까운 군주였다고 생각이 들어 비애감과 환멸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려야 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임종하기 직전에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와 요한을 바라보고 먼저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을 하였고,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라고 말하여,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이때부터 요한은 임종 때까지 성모 마리아를 곁에서 모시고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예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뒤따라오는 베드로를 기다려서 그가 먼저 들어가게 하였다.
그제야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차례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에서야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으며 티베리아 호수 가에서 부활한 예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묵시록을 저술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독살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면 받아 에페수스로 귀환하여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하였다.
셀수스 도서관 앞에서 마블거리를 가다보면 오른편 피온산 기슭의 언덕에 원형 대극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극장은 로마시대 전형적인 원형극장의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것으로 제 4대 클라우디우스시대부터 시공하여 극장의 2,3층은 제 5대 네로 황제와 세베루스 왕조 1대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로마식 극장이라고 하였다.
산기슭의 경사와 높이를 잘 활용하여 반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경사가 급하여 소리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며 관람석의 계단은 3단 구조로 되어있었다.
관람석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총 높이가 18m였다.
관람객들을 위한 대리석 좌석은 반원형 모양의 66열로 배열되어 있었는데 2만 명 이상을 수용하였다고 하였다.
극장의 정면 무대는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처럼 정교한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음향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고 하였다.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건축 초기에는 연극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어진 듯 보였지만 나중에는 검투사가 등장하여 맹수와의 결투가 벌어지기도 하여 극적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연극이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사도 바오로가 등단하여 연설하기도 하고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기도 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 외쳐보아도 메아리만 돌아올 뿐 흥청거렸던 극장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았다.
쓸쓸한 감정을 간직한 채 원형 극장에서 에페수스 항구까지 뻗어 있는 아카디우스 길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아카디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고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리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들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 길은 아카디우스 황제시대에 복구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하여 걸어보고 싶어졌다.
총 길이 530m, 폭 11m에 달하는 이 길을 따라 값비싼 물건을 파는 상점들과 화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흔적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도로 입구에 이 도로를 설명하는 안내판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 도로는 항구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항구도로"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로마 제국 당시 배를 이용하여 에페수스로 들어오는 황제나 귀족 총독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고도 하는데 오늘은 인적도 보기 드물어 산사처럼 고즈넉하고 쓸쓸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