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가을의 어느날 명보극장 앞 광장에서는 영화사에 기록될만한 일대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1968년 개봉 직전 검열에 걸려 상영금지 조치를 받고 무려 20년 동안이나 창고에 버려져 있던 <잘돼갑니다>가 비로소 해금되어 대중과의 첫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로 변해버린 <잘돼갑니다>의 스탭과 캐스트들은 그 사이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젊은 관객을 기다렸으나 극장 앞 매표소는 썰렁할 만큼 한산했다. 서글픈 풍경이었다. “잘돼갑니다.” 영화 속에서 이승만이 선거진행상황을 묻자 이기붕이 대답한 말이다. <잘돼갑니다>는 자유당의 부패-조병옥의 급서-3·15부정선거-4·19혁명-이승만 하야로 이어지는 격변의 한국현대사를 곧이곧대로 증언하는 정치영화다. 박정희 정권이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한 것은 당연(!)하다. 이 영화를 해금시킨 것은 1987년의 6월항쟁이다. 이제야 모든 것은 잘돼가는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시대를 놓쳐버린 영화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분노의 세월을 견뎌온 영화인들의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비운의 영화 <잘돼갑니다>의 작가 한운사는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다음 경기고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했다. 한때 서울대 불문학과에 적을 두었으나 곧 대학을 중퇴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한국전쟁을 겪은 뒤 언론계로 투신했다. 그가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50년대 중반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시나리오 이외에도 영화평론·방송극·희곡 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는데, 특히 초창기 라디오드라마 분야에서는 최고의 인기작가로 꼽혀 그의 대표작들 중 상당수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1960년대 초반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그 이름을 잊으리> <현해탄은 알고 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 마후라>의 원작자가 한운사였던 것이다. 이중 <아낌없이 주련다>는 1989년에 김지미와 이영하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한국전쟁중 부상당한 남편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는 아내를 그린 <이 생명 다하도록>. 한국전쟁을 주요한 사건 혹은 배경으로 다룬 한운사의 작품들로는 이 밖에도 <남과 북> <어느 하늘 아래서>가 있는데,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내면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선악의 구도가 뚜렷한 여느 전쟁영화들과는 격조를 달리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과 북>에서 맞대결을 펼치는 것은 이념도 선악도 아닌 사랑이다. 아내를 찾아 혈혈단신으로 삼팔선을 넘어 귀순한 북한군 소좌, 그를 넘겨받아 취조하는 남한군 중대장, 그리고 한때는 북한군 소좌의 아내였으나 지금은 남한군 중대장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 이 세 사람이 펼쳐보이는 암담한 삼각관계는 곧 분단과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고통스럽게 드러낸다. 개봉 당시 극장 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이 작품은 1984년에 김기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는데, 오리지널에서 엄앵란이 맡았던 역을 물려받은 배우는 원미경이었다.
멜로 분야의 수작은 재일동포 청년과 일본인 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서울이여 안녕>. 영화만큼이나 애절한 이미자의 주제가가 널리 사랑받았던 작품이다. 후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족보>는 한때 한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일본의 저명한 스파이소설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 총독부의 하급공무원으로 일하는 일본인이 작품의 화자로 등장하여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는 한 한국인 가정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인이 족보에 대하여 품고 있는 그 넘볼 수 없는 위엄과 가치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갖은 회유와 탄압 끝에 결국 가족 모두를 창씨개명시키지만 정작 자신은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아버지 역을 맡은 주선태의 연기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족보>는 10편 남짓한 과작만으로도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한운사의 실질적인 은퇴작이기도 하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0년 신상옥의 <이 생명 다하도록>
1965년 김기덕의 <남과 북> ⓥ ★
전응주의 <가슴을 펴라>
1966년 김기덕의 <오늘은 왕>
1969년 장일호의 <서울이여 안녕>, 최무룡의 <어느 하늘 아래서>
1975년 이경태의 <욕망>
1978년 최훈의 <꿈나무>, 임권택의 <족보> ⓥ ★
1988년 조긍하의 <잘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