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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첨단 문화 상품으로 소문이 자자한, ‘태양의 서커스(Cirque de Soleil)’극단의 <퀴담(Quidam)>을 다녀왔다. 그날 저녁은 검은 먹구름이 서커스 천막 가까이까지 몰려와 봄비가 내릴 듯 말 듯 잔뜩 긴장한 하늘조차 내가 기대했던 서커스의 우울한 정취를 돋우어 주기에 충분했다. 서커스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몰려드는 기시감(旣知感)때문인지, 나는 오래 전 보았던 ‘서커스’가 있었던 영화 속으로, 혹은 내 머릿속에 자리 잡힌 아스라한 몽환의 세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서커스 휘장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현실감각은 완전히 잊혀져 버린다. 그리고 미지의 호기심과 불안감, 아슬아슬한 곡예의 긴장과 쾌감, 슬픈 피에로들의 자기희생적 웃음, 숨죽인 찰나적 공감과 덧없는 관능미 등등, 이 모든 공존하기 힘든 이율배반적 감정이 뒤섞여버린다. 이유 없는 즐거움과 원인 모를 서글픔이야 말로 서커스의 본령이랄까, 아무렴, 서커스는 착한 마약과 같다.
서커스의 태생적 우울을 보여주는 영화로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감독의 <길,La Strada, 1954>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앤터니 퀸,Anthony Quinn)에게 만 리라에 팔려간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Gulieta Masina)는 지능이 조금 모자란 여인이다. 잠파노는 자신의 조수로서 젤소미나를 마음대로 부리고 심지어 욕정을 채우는 도구로까지 이용하며 도시에서 도시로 방랑을 한다. 그러던 중 둘은 로마에서 서커스단에 들어가 일은 하게 되는데, 광대 마토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잠파노는 틈만 나면 자신을 놀리는 마토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데, 마토는 젤소미나에게 트럼펫을 가르쳐준다. 이 역시 못 마땅하게 생각한 잠파노는 칼을 들고 마토를 쫓다 경찰에 체포된다. 로마의 서커스단에서 쫓겨난 잠파노를 따라나선 젤소미나는 다시 방랑길을 떠나고, 둘은 우연히 길에서 마토를 만나게 된다. 예전 일로 화가 덜 풀린 잠파노가 마토를 두들겨 패는데, 운이 나빴는지 마토가 죽자 시신을 유기하고, 젤소미나를 끌고 도망친다. 이 일로 크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젤소미나는 미쳐버리고, 잠파노는 결국 젤소미나가 잠든 사이, 그녀를 버리고 떠난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잠파노는 바닷가의 어느 마을에서 공연을 마치고 마을을 거닐던 중에, 귀에 익은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그 노랫소리는 젤소미나가 마토에게 배워 트럼펫으로 연주하던 곡조였다. 잠파노는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던 여인에게서 몇 년 전에 그 마을에 흘러들어온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트럼펫으로 연주하던 노래라며, 그 여자는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영화는 잠파노가 밤 바닷가에서 회환에 젖어 통곡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음 부칠 곳 없이 방랑하는 유랑의 신세들이 모여 보잘 것 없지만 볼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곡예를 펼치는 서커스는 발생 자체가 우울하다. 한 끼 밥과 현실의 곤궁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값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서커스 단원에게 내일은 언제나 우울하다. 그들의 광대 짓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몸짓이다. “난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요.”라고 말하는 젤소미나의 마지못한 웃음과 그녀의 불행을 상기시키는 트럼펫 곡조는 서커스를 연상할 때 가장 먼저 날아들어 마음 언저리를 위태롭게 빗겨간다.
빗겨나간 상상은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서커스의 장면에서 딱 꽂힌다. 삶의 끄트머리까지 몰려 자살을 시도하던 한 여인을 과녁으로 칼을 던지는 남자가 나왔던 영화인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걸 온 더 브릿지, La Fille sur le pont,1999> 역시 불안과 긴장 속에서 순간 순간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서커스와 관련된 빼어난 영화이다. 영화 첫 장면은 세느강의 난간에 매달린 아델(바네사 파라디)을 붙자는 칼잡이 가보(다니엘 오테이유)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서커스에 불려온 인연들은 이렇듯 삶의 끝 언저리에 매달린 처절한 목숨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향한 믿음에 의탁하여 과녁과 칼이 되지만, 칼끝(가보)이 과녁(아델)을 빗겨나가는 운명을 기도하는 간절함으로 서커스를 진행한다. 커튼으로 가린 여인의 윤곽을 따라 차례대로 칼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칼끝의 팽팽한 긴장감이 날아드는 공포 속에서 아델은 ‘세느강을 투신했다면’하며 자신이 포기했던 자살 순간의 아찔한 느낌 속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녀의 몸을 빗겨 지나가는 칼끝이 섬뜩한 소리로 널빤지에 꽂힐 때마다 그녀는 희열을 느끼는 듯하다. 죽음을 아슬하게 빗겨갔다는 위안감일까? 이처럼 서커스는 복잡하고 첨예한 감정들과 얽혀있기에, 밧줄 하나에 생명을 건 묘기와 불을 품는 기예에 사람들은 넋을 놓고 빠져드는 것 같다.
서커스 본연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힘에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매혹적인 디자인과 영감 넘치는 라이브 음악이 어우러진다면 어떨까? 그 해답이 ‘퀴담(Quidam)’에 있었다. 라틴어로 ‘익명의 행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퀴담’은 현대 사회의 익명성과 소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어린이를 조명한 탄탄한 각본을 갖춘 서커스이다. 무대의 조명이 밝아오면 무대는 거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들 사이로 맴도는 어린 소녀, 죠(Zoe)가 등장한다. 소녀는 간절히 소통을 바라지만, 어른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 때 거실의 문이 열리고 머리 없는 한 사내가 우산을 쓴 채 등장하여 손에 들고 있던 중절모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사라져 버린다. 죠는 조심스럽게 모자를 쓴다. 그 순간, 무대는 소용돌이치며 꿈틀대며, 판타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무대는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현란한 묘기와 뮤지컬과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바뀌어진다.
무대 위에 매달린 훌라후프 고리를 중심으로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허공을 돌며 기기묘묘한 묘기를 서보이는 에어리얼 후프(aerial hoops), 공중에 매달린 붉은 실을 몸에 감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육체의 아름다움과 정적인 미를 선보이는 에어리얼 컨토션 인 실크(aerial contortion in silk), 강인한 근육과 민첩성으로 일치된 동작을 통해 인간 피라미드를 만든 뱅퀸(banquine), 커다란 바퀴를 돌리며, 방향을 틀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구의 중력에 도저하는 공중제비를 보여준 저먼 휠(german wheel), 중국식 요요를 나무 막대가 달린 줄로 튕기며 장난스런 장기를 보여주는 디아볼로스(diabolos), 강건한 남성의 육체와 유연한 여성의 육체가 서로 접촉을 끊는 일 없이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완벽한 균형감각을 보여주는 곡예인 비스 버사(vis versa) 등등이 잘 짜진 각본에 따라서 화려한 의상과 안무에 뒤섞여 펼쳐졌다.
‘퀴담’은 고전적인 서커스를 본격적으로 상업화한 작품이다. ‘퀴담’이란 작품은 900명의 예?桓? 비롯해 3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공연기업인 ‘태양의 서커스(Cirque de Soleil)’사의 작품 중 하나로서 21세기의 공연 패러다임을 창조한 블루오션의 성공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는 예술 작품이다. 따라서 극적 완성도를 위해 전문 발레리나까지 등장하고 전문 무대 디자이너, 의상 디자어너, 음향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및 안무가와 음악 감독이 있는 종합 예술로, 유사 이래 서커스에 없었던 자본의 미덕이 돋보이는 서커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테크놀로지와 거대 자본이 투입되어도, 서커스 본령인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우울함, 위태로운 묘기 속에 흐르는 쓸쓸한 욕망이 다행스럽게도 느껴지니 단원들과 관중 사이에서 형성된 교감이야말로 우리가 서커스에서 기대하는 그 무엇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 소리가 사라지고 무대가 암전되자, 아쉬웠다. 서커스 휘장 밖의 각박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텅 빈 휘장 안에 남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휘장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어둑한 하늘에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동행했던 친구가 사준 ‘퀴담’ DVD를 또 보았다.
“서커스가 왔습니다.”의 설렘과 “서커스가 떠나갑니다.”의 아쉬움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는 영국이 자랑하는 현대 그림책 작가 3인 중 하나이다. 이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며 1960년대 이후에 활동한 그림책 작가들로 제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전세계에 고정팬들을 갖고 있다. 찰스 키핑 역시 ‘서커스’를 소재로 한 그림책을 내놓았는데, 그가 다룬 서커스는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 그림책 보다 더 우울하기 때문에 조금 망설여졌다. 한편 미국 현대 그림책 작가 이언 포크너 역시 ‘서커스’를 소재로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그의 그림책 역시 나로 하여금 망설이도록 했다.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서커스’의 매력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부언은 군더더기가 될 터이므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와일드스미스의 현란하리만치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의 서커스를 함께 살펴볼까 한다.
그의 그림책 ??서커스??에서 글은 두 줄이 나온다. “서커스가 왔습니다.”, “서커스가 떠나갑니다.”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두 줄의 문자 메시지만으로도 충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요즘에도 아주 가끔 겨우 빗방울을 가릴 만한 허름한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이 있기는 하다. 즐길거리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이들 가난한 유랑극단의 서커스는 촌스러운 잠깐의 눈요깃거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한 옛 시절 어쩌다 마을에 들러 천막을 치고 볼거리를 제공했던 유랑극단은 이제 연로한 노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랑극단이 마을에 나타나는 것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이 변화라곤 없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축제였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며 서커스를 기다리고, 아이들은 부모를 졸라 쌈짓돈을 얻어 서커스를 보러 갔다. 따라서 와일드스미스가 그림책 서두에 “서커스가 왔습니다.”라고 말할 때, 단 한 마디 속에는 엄청난 설레임이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서커스는 색채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그답게 알록달록한 색깔로 웅성거리는 관중석과 현란한 서커스의 묘기를 묘사해낸다.
과장된 원근법 덕분에 서커스가 벌어지는 무대는 더욱 가까이 크게 보이고, 공중 자전거의 묘기는 더욱 아슬아슬해 보인다. 흥분한 관중과 달뜬 분위기는 건장한 남자들이 인간탑을 쌓은 묘기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화려한 색깔들이 만들어내는 신비감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한 층 한 층 인간탑이 올라갈 때 숨을 참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의 입장에서 완성된 거대한 탑을 바라보며 휘파람과 박수로 갈채를 보내는 입장이 되어 본다. 말 없는 그림책이지만, 설명이 따르는 그 어떤 그림책 보다 음성 언어로 가득한 느낌이 강렬한 것은 음성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 요란한 색감 때문이다. 가끔은 그 색체가 너무 현란해서 마치 파레트나 색채표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만화경 속으로 빠져든 둔감해진 시신경이 “서커스단이 떠나갑니다.”라는 문자 언어를 만나는 마지막 장에서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코끼리의 커다란 엉덩이가 쓸쓸한 잔상을 남겨준다. 달뜬 며칠간의 축제가 끝나고 마을을 후끈하게 데운 낭만을 거두듯 서커스가 섰던 동네 공터에는 바람에 서커스의 잔재들만이 나부대고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남는 것은 공허감이다. 마냥 지속될 것만 같았던 황홀한 묘기들이 사라지고 서커스 단원들은 관중들의 박수 소리에 답하기 위해 몇 차례 답례 인사차 무대에 올랐던 단원들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불 꺼진 무대를 확인하고 서커스 휘장 밖으로 나올 때 느꼈던 아쉬움처럼 그림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아리다. 고작 그림책으로 서커스를 본 것뿐인데도, 찬란한 순간들이 두 환영이 되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다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 같은 내일의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당위 앞에서, 버티다 결국 갈 곳 없음에 체념하게 되는 그런 허무가 몰려든다. 그리고 책장 안에는 여전히 서커스가 벌어지는 소리로 바글거리는 것은 환청이 들려온다.
서커스가 문화 상품이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음악
‘곡마단’이나 ‘놀이패’에게 음악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얼마 전에 많은 관객 동원을 했던 우리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가 음악이었다. 그만큼 음악은 마당 혹은 무대가 있는 예술에 있어서는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한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놀 거리’였던 서커스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표현 양식은 다를지 몰라도 인간의 육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단순히 기예를 펼쳐 보이는 데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완결성을 갖춘 극예술로서 승화되기 위해서는 서커스에도 그 안에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보편감정에 호소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서커스 성공의 가장 우선 조건은 분명 ‘시각적 효과’이겠지만, 시각적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는 요소는 ‘음악적 효과’일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볼륨을 줄여놓고 공포 영화를 본 경험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의 감정에 직접적 자극이 되는 요소로서 시각 못지않게 청각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퀴담(Quidam)>을 보러 갔을 때, 나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기에 음악에 대한 아무런 기대심도 없었다. 국내 공연의 관객 중 20%가 기업들의 간부급 직원들이었다는 뉴스를 들은 바 있기에, 도대체 ‘태양의 서커스’가 뭐가 대단해서 ‘메세나 운동’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티켓을 구매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하지만 철저한 기획과 예산을 들여 만들어진 한 편의 서커스가 일궈낸 성취를 숫자로 환산한 결과를 보고는 아연실색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성취가 결코 마케팅의 과장된 홍보가 아님도 인정하게 되었는데, 음악 하나만을 놓고 이야기해도 성공은 대강 예상된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겠다. 베누아 쥐트라(Benoit Jutras)라는 음악 감독 겸 작곡가는 <퀴담>의 분위기와 주제에 맞는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는 1996년에 몬테카를로 국제 서커스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서커스 작곡가로 지명된 바 있다고 한다. 그런 국제적 명성을 차치하고라도, 각각의 음악들은 단원들이 꾸며가는 무대 위의 행위에 딱 떨어지는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효과를 달성하는 완성도 높은 곡들이었다. 게다가 뮤지컬과 같이 배우들이 직접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라이브(live)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인터미션 때에는 현장에서 CD를 구매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무대가 열리고 어린 소녀 조(Zoe)가 대답 없는 부모님 앞에서 부르는 솔로곡으로 시작된 'Atmadja'는 남녀혼성의 합창으로 웅장한 울림을 주는데, 이 곡의 주제부는 신디자이저를 이용한 대편성의 합창곡인 ‘Quidam'에서도 이어져 전체적으로 구성적 통일감을 갖추는데 기여한다. 아라비아풍의 신나는 춤곡인 ’Incantation'은 무대 후반에서 펼쳐지는 남성무와 앞쪽에서 구르는 저만 휠스(german wheels)의 율동과 기가 막힐 정도로 어우러져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이 밖에도 러시아의 전통 춤곡 분위기가 느껴지는 ‘Zydeko'라든가, 호주 원주민들의 전통 악기인 디제리두와 비슷한 소리로 시작되는 원시성이 짙은 ’Rivage' 같은 곡들은 월드뮤직의 범주에 속하는 음반으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가장 몽환적인 서커스의 느낌을 착실하게 전달해주는 노래인 ‘Marelle'이 좋다. 소녀 Zoe는 1분 27초의 짧은 노래를 통해 곧 깨어져 버릴 것 같은 행복한 도취에 대한 아쉬움을 차분하게 고백하고 있다. 간간히 들리는 벨소리와 아코디언 소리는, 이유 없는 즐거움과 원인 모를 서글픔이라는 서커스의 본령을 깨워준다. ’세계적인 서커스면 서커스지, 음악까지는 뭐......‘하며 코웃음을 쳤던 내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어졌다. 과연 세계적인 것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때 인간보편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답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답대로 구현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이미지: ‘태양의 서커스 홈페이지’ http://www.cirquedusoleil.co 외, '퀴담(Quidam)' DVD에서 가져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