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초기 고대 문명의 발생을 언급
할때면 대개들 4대문명을 꼽는다.
1. 메소포타미아 문명
ㅡ 유프라데스강 티그리스강
2. 에집트 문명
ㅡ 나일강
3. 인더스 문명
ㅡ 갠지스강
4. 황하 문명
ㅡ 황하강
이와같이 고대 농경 문명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이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소로리 볍씨가 중시되고 재야사학
에서는 홍산문명을 언급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농경은 피지배층
하층민들의 문명이다.
참고로 여기서 문명이라 함은
종이. 활자. 화약문명 이상으로
인류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활문명 농경문명 이라 하는 것이다.
활은 일만년 신석기 문명의 총아이며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활문명 사회는 수렵채집 문화로 시작된다.
농경에서의 활의 쓰임새는 적다.
초기 농경문화를 상상해보자.
아직 치수법이 발달하지 않은때에
하천변이나 강가는 홍수위험에 항상
노출되어있다.
따라서 경작지는 산자락이다.
그런 장소의 숲을 불사르고 화전을
일구는 것이 인류의 초기농법이다.
마야문명. 잉카문명등은 늦게까지
신석기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산정에 석조 도시를 건설했고
산비탈을 경작했었다.
하지만 대규모의 화전경작은 환경을
파괴했으며 가뭄 홍수 전염병등의
자연재해를 초래하였다.
그때문에 엄청난 노력으로 건설한
산정도시를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석조 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사회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뉘어 있었고
재앙을 당하게 되었을때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초기에는 하층민들이 노동력을 제공
하는 댓가로 지배자들은 그들의 경험
과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며 공생한다.
그러다가...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이 잦아지면?
지배층들은 천것들의 죄업때문이란
프레임을 씌워 인신공양등 강압적인
공포정치를 시행하여 전율케한다.
하층민들 입장에서는 일도 안하면서
권위나 세우고 소출이나 수탈해가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집단이다.
가뭄. 홍수. 전염병등이 겹치면...
하층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지배층을
축출해 버리지만 그런다고 재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결국은
하층민들도 대부분 떠나게 된다.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수렵채집 문화를 지닌 지배층들은
대규모 화전경작을 혐오하게 된다.
가축은 수렵채집 문화의 산물이다.
생포한 금수들을 살려두고 잡아먹다
보니 알도낳고 새끼도치고 사람을 잘
따르기도 하여 가축화 되는것이다.
즉. 가축문화가 농경문화보다 선행된다.
가축문화는 광활한 들판에서의 방목
문화로 발전한다.
들판에서의 방목은 화전만큼 산림에
치명적이지 않았기에 용인된다.
기독교 구약에도 이러한 정서가
내포되어 있다.
1. 실 낙원.
아담과 이브의 죄는 나무 열매를
딱먹은 것이였다.
선악과 생명과 먹을수 있음에도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대규모 화전경작을 죄악시 하는
풍속으로 볼수있다.
2. 출 애굽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들이다.
에집트인들은 농경민이 주를 이룬다.
모세가 예언했던 재앙들....
메뚜기떼 병충해 강물이 붉게 오염
맏아들이 죽어나가는 전염병...
환경 생태계 파괴로 인한 자연재해
인 것이다.
유목생활 민족과 농경민족간의 정서적
갈등이라 볼수있다.
3. 카인과 아벨.
이 경우는 형제간의 갈등으로 묘사된다.
카인은 경작을 하였고 아벨은 목축을했다.
각자의 수확물로 번제를 드렸을때...
야훼는 아벨의 축산물만 기쁘게 열람
하시고 카인의 농산물은 열람치 않으셨다.
대규모 경작금지 내지는 화전혐오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경작혐오 내지 농경죄악 이라는
관념은 우리의 부도지 라는 책에도 있다.
뭐.... 실낙원을 모방한듯 싶기도 하지만.
어쨋거나... 지유만을 먹고 살아가다가
인구증가로 지유가 부족해지자 포도를
따먹은 탓으로 마고성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서술되어있다.
고구려 사료에 등장하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일화에도
고구려 기득권 세력의 농경질시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치수농법이 많이
발달하였다. 즉 지배층의 상당수는 지주
들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사일은 정치 전면에 부각되고
고구려와 상대적으로 폭팔적인 인구증가
에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중원과의 전쟁에서 연승을
거두었지만 농민계층은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하던 분위기였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실패로 엄청난
병사들이 죽어갔지만 불과 이삽십년
정도면 또다시 바글바글 몰려온다.
춘추전국 시대에 만개한 치수농법
때문에 인구폭팔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왕실은 농자 천하지 대본야
라는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북방의
유목민 출신들에게 농투성이들은
천박한 하층민들이고 속칭 좃밥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가을 추수시기면 달려들어가 탈탈털어
오기가 누워서 떡먹기 보다 쉬웠을테니
그렇게 생각할밖에 없을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왕은 공주를 비밀리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뒤를밀어
장군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바야흐로...
농경민수장이 정계 전면에 등장하는
큰 그림이였다. 그래서 주어진 밋션이
한강유역 아차산 전투의 승리였다.
성공하게 된다면 고구려도...
농업을 장려할수 있고 한강에 배를띄워
무역도 활성화 할수 있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들의 견제와 질시로
인하여 온달은 전사해버린다.
농경민들로서는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다.
장수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는것은 영광이고
그렇게 분하거나 억울할것도 없다. 그래서
승패는 병가지 상사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달의 시신은 꼼짝을 않한다. 왜?
농경민들이 반발한것이다.
'왕실의 약속' 은 어찌되는 것이냐는 거다.
그래서 평강공주가 등장하여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속치마로 관을 감싸며...
고구려 공주는 영원히 온달의 아내로
남겠다는 것을 천명한 후에야 장사를
치를수 있었다.
이후로 고구려 왕실과 기득권 세력과의
안력다툼은 연개소문에 이를어 극단적
으로 표면화된다.
아예... 왕을 갈아치워 버린것이다.
그와함께 온달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그렇게 고구려가 망한것이다.
발해의 대조영 역시도 가축문화 내지
북방 유목문화 색체를 띠었을것이다.
즉. 농경민들을 홀대했을 것이다.
농자 천하지 대본야가 정치 전면에
들어나지 않는이상 오래 버티기 어렵다.
여진의 금나라 경우는 어떤가?
유목 문화란게 낙후되어 있는것이다.
왜냐하면? 인구밀도가 낮기때문에
하루종일 말을타고 가야만 이웃을
만날수 있던게 유목문화인데 무슨
사회문화가 발달 하겠는가?
그래서 여진은 한(漢)나라 문화에
동화 되었으며 한족들과의 혼인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몽골도 인구가 적기는 마찬가지라
몽골 병영에서는 초야권을 행사 하기도
하였다. 한인(漢人)들이 결혼하려면
신부를 먼저 몽골 군영에 보내어 초야를
치루도록 하는 '국가강요 성폭행법'이다.
이에 반발한 한인(漢人)들은 첫아들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를었었다.
이상으로....
고대 문명에 있어서 농경은 하층민
천것들이나 하는 짓이란 혐오감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즉. 농경 이전에 활문명이 있었고 거기서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많은 고대 문자(文字)들은 활문명과 관련
되는 것이다.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 그리고
'모든 고대 문자는 활문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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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은 문명이다.
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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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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