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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공납제도의 개편. 대동법
농민의 입장에서는 농사를 지어 곡물을 바치는 것은 견딜 만했으나, 공물을 바쳐야 하는 공납은 너무 부담스러운 조세였습니다. 16세기 이래로 방납(防納)이란 관행이 생기긴 했지만, 농민의 부담만 가중되었다는 것은 기억하시죠? 농민들은 차라리 삶의 터전인 농토를 떠나 유망의 길을 택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그럴수록 정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위정자들도 되도록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개혁론을 마련했습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오랜 논의 끝에 마련한 공납 제도의 개혁안입니다. 대동법은 각 민호(民戶)에 부과된 공납을 토산물 대신에 농토 결수에 따라 미곡으로 납부하게 한 제도입니다. 쌀로 납부하지 못할 때는 포목이나 전화(동전)도 받았습니다. 본래 세금으로 쌀을 납부하는 것을 전세라고 하지요. 그러니 대동법은 현물로 내던 공납을 쌀로 내는 전세로 바꾼 제도입니다. 그래서 대동법을 ‘공납의 전세화’라 부르는 것입니다.
대동법에 따라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당 미곡 12두만 내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비해 부담이 다소 가벼워진 것입니다. 또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의 경우는 일단 과세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촌 경제는 일시적으로나마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대동법’은 ‘공납의 전세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납을 쌀로 낼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농토의 결수에 따른 것입니다. 즉 과세의 기준이 토지입니다. 그러니 대동법 실시에 대하여 소작농이나 가난한 농민들이야 환영했겠지만, 대토지 소유자들은 당연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다음 기록을 읽어 보도록 합시다.
"강원도에는 대동법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지만, 충청도 · 전라도는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가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강원도에는 토호가 없지만, 충청도 · 전라도에는 토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라도에는 싫어하는 자가 많은데 이는 토호가 많은 까닭입니다. 이 점을 볼 때, 토호들만 싫어할 뿐 백성들은 모두 대동법을 보고 기뻐합니다(《포저집》)."
여기에서 지목된 토호란 물론 토지를 가진 지주를 말합니다. 전라도 지역이 평야지대인 만큼 그곳의 지주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넓은 토지를 가졌기 때문에 대동법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동법은 처음 경기도에서부터 실시되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 100여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대동법이 시행된 뒤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조달했을까요? 정부의 특산물 수급을 위해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공인(貢人)입니다. 정부는 그들에게 미곡 · 포목 · 전화를 지급하고 물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므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공인은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각 지방에 장시가 발달하고 생산 활동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자급자족 상태에서 유통 경제로 경제 질서가 바뀌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상인 자본 규모가 커지고 도고 상업이 발달하기도 했습니다. 정부로부터 미리 선금을 받고 대량의 물품을 취급하면서 부를 축적해 도고로 성장한 것이죠. 즉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을 탄생시켰고, 그들을 통해 상품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농민들도 상품 화폐 경제에 편입되게 마련이었고, 점차 농민층도 분화되어 갔습니다.
대동법은 마치 효과적인 진통제처럼 한때나마 농민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농민들은 다시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왜냐하면 대동법이 시행된 뒤에도 왕실에 현물을 상납하는 진상이나 별공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방 관청에서도 필요할 때 수시로 특산물을 징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를 가진 지주가 자신에게 부과된 대동세를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에게 전가시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또한 수령이나 아전들이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일도 자행되었습니다. 대동법으로 지방 재정을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본래 대동세를 징수하면 일부는 상납미로 중앙에 올리고, 나머지 일부는 유치미로 지방에 유치하여 지방 관아의 경비로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유치미의 비율이 낮아서 지방 관아의 재정이 악화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보충하기 위해 수령과 아전은 농민을 수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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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반드시 특산물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공물의 이런 폐단을 이용한 관리나 상인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물(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몇배씩 가중하여 백성에게 받아내는 방납(防納:代納)이라는 제도가 있어 백성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었다. 더구나 거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의 배정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가 많았다. 이런 관리들의 모리 행위는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지만 오히려 국가 수입은 감소되었다. 결국 중간 관리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는 조세제도는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이었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이(李珥)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조선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군량을 조달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1594년(선조 27),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대공수미법을 제안하고 이 제안은 토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하여 그해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2말은 군현에서 사용하였다.
1623년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후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되었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 폐지되었다. 당시 인조와 서인 조정에서는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백성들의 충성심이라고 여겼다. 이후 대동법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후, 김육(金堉)·조익(趙翼)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1651년(효종 2) 8월에 충청도에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1658년(효종 9)에는 전라도 연해지역 27개 군현에 시행되었으며 이어 산군(山郡)에도 1662년(현종 3)에 실시되었다. 경상도는 16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다. 함경도는 전토가 척박하고 군현들간의 사정이 달라 군현별로 징수량과 물종을 다르게 정하는 상정법(詳定法)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정법은 함경도와 비슷한 상황의 황해도와 강원도에 확대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제체제로 전환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로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전기 농민이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온갖 세납(稅納), 즉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을 모두 전결세화(田結稅化:可食米)하여 1결(結)에 쌀[白米] 12말[斗]씩을 징수하고,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물품 및 역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입 사용하거나 고용 사역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1623년(인조 1) 강원도, 1651년(효종 2)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 전라도의 산군(山郡), 1666년 함경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어,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주도에는 그곳이 번속(藩屬)으로 여겨진 연유로 해서 실시되지 않았고, 또 평안도에는 민고(民庫)의 운영과 함께 1647년(인조 14)부터 수미법(別收法)이 시행되어 이미 대동법의 효과를 대신하고 있었던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국용의 기반을 전통적인 수취체제에 따라 전세(田稅)·공물·진상·잡세(雜稅)·잡역(雜役:徭役) 등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 세납의 부과·징수에 따랐던 여러 가지 폐해와,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양반층의 토지점유 확대에 따른 농민층의 몰락은 이들 제도를 더 이상 존속시키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부과기준이 모호하고 물품이 다양했던 공물상납제도(貢物上納制度:貢納制)에 있어 그러하였으니, 이미 16세기 초부터 그의 폐지·개혁이 논의되고 강구되는 실상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공물·진상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하였고, 또 방납인(防納人)들의 이권이 개재되고 있었던 데서 쉽사리 개선되지도 못하였다.
다만, 일부 군현이 사대동(私大同)으로 일컬어지는 자구책(自救策), 즉 군현에 부과된 각종 경납물(京納物)을 관내 전토(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1결에 1말 또는 2말)을 가지고 구입·납부하는 방책을 스스로 마련하여 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납제의 개혁논의는 임진왜란을 겪기까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개혁론의 주종을 이루어 온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주장과 위와 같은 사대동의 관행은 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부터 그 이듬해까지 정부로 하여금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잠시나마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왜란 후 국가기틀을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대동법의 제정·시행으로 이어졌다.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실시된 대공수미법은 각 군현에서 상납하던 모든 물품을 쌀로 환가(換價)하여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도내 전토에 고르게 부과·징수(대체로 1결에 쌀 2말)하게 하고, 이를 호조에서 수납하여 공물과 진상·방물(方物)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시급하였던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 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그 시행세칙[事目·事例]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수세전결(收稅田結)에서 1결당 쌀 16말씩을 부과·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에서 경납물의 구입비용으로 공인(貢人:주로 종래의 방납인)에게 주어 납품하게 하고, 나머지 2말은 수령(守令)에게 주어 그 군현의 공·사 경비로 쓰게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그리고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대동법의 확대실시는 이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남방토적(南方土賊)을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호란(胡亂)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세칙을 새롭게 수정, 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그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 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하는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앞서 실시된 경기도·강원도의 대동법도 이에 준하여 개정하니, 이에서 대동법은 선혜청(宣惠廳)의 관장 아래 하나의 통일된 재정제도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대동법이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군현별로 부과·징수를 상정하는 이른바 상정법(詳定法)의 특이한 규정을 두게 되었을 뿐이다.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납물의 전결세화(田結稅化)를 기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 부과는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하였고, 징수는 쌀을 수단으로 하였다.
즉, 수조안에 등록된 전결 가운데서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각종의 급복전(給復田)을 제외한 모든 전결에서 1결당 쌀 12말씩을 부과·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면부출세(免賦出稅)의 전결이나 면부면세(免賦免稅)의 전결, 예를 들면 궁방전(宮房田)·영둔전(營屯田)·아문둔전(衙門屯田)·관둔전(官屯田)·학전(學田) 등에는 대동세가 부과되지 않았고, 다만 아록전(衙祿田)과 공수전(公須田)에서만은 지방관아의 경비가 대동미에서 지급됨에 따라 대동세가 부과되었다.
부과된 대동세는 봄·가을로 6말씩 나누어 징수(뒷날에는 가을에 전액 징수함)하되, 산군에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같은 양의 잡곡이나 소정의 환가(換價)에 기준하여 무명[(綿布], 베[麻布], 화폐[錢]로 바꾸어 내게도 하였다.
단, 무명이나 베로 납부할 경우에는 5승(升) 35척(尺)을 1필(疋)로 하였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쌀 5∼8말이었고, 화폐는 1냥(兩)에 쌀 3말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영조에 걸쳐 6도의 대동세액(大同稅額)이 12말로 통일되기까지는 지역에 따라 부과액과 징수액 방법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고, 또 상정법이 시행된 3도에서는 이 이후에도 다른 도와 매우 상이하였다. 이와 같이 징수된 대동세[大同米, 大同木, 大同錢]는 크게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상납미는 선혜청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 상납하던 원공(元貢:二十八司元貢物)·전공(田貢:田稅條貢物)·별공(別貢:別卜定貢物)·진상·방물(方物)·세폐(歲幣) 등의 구입비와 각종 잡세조(雜稅條) 공물·역가(役價)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유치미는 각 영(營)·읍(邑)에 보관하면서 그 영·읍의 관수(官需)·봉름(俸廩)·사객지공(使客支供)·쇄마·월과군기(月課軍器)·제수(祭需)·요역, 상납미의 운송, 향상(享上)의 의례(儀禮)를 존속시키는 뜻에서 설정된 약간의 종묘천신물(宗廟薦新物)과 진상물(進上物)의 상납 등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납미의 지출은 선혜청이 직접 계(契)·전(廛)·기인(其人)·주인(主人) 등에게 선급(先給)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해당 관서에 책정된 액수를 주어 각 관서로 하여금 소정의 공인(貢人)에게 납품에 앞서 지급하게 하였고, 유치미의 지출은 영·읍의 관장(官長)이 용목별(用目別)로 책정된 경비 한도 내에서 월별로 나누어 적절히 쓰게 하되, 그 명세서를 매월 선혜청에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사용 항목과 운영에 색다른 규정이 가하여지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이처럼 공납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또 면세전(免稅田)의 증가로 인한 세입의 감축과 영세 소작농의 증대로 인한 호역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한 수취제도이자 재정제도였다.
오늘날 이 법은 ‘봉건체제의 기본적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로서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제도’로 평가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순정성리학자(純正性理學者)들이 중국 3대(三代:夏·殷·周시대)의 이상사회, 즉 대동(大同)사회를 지향’하여 제정한 정전제(井田制)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김육(金堉)의 말에 따른다면 “농민은 전세와 대동세를 한 차례 납부하기만 하면 세납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오로지 농사에만 힘을 쓸 수 있는” 민생안전의 조치였고, 또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키고 고용증대도 가져올 수 있는 제도였으며, 국가는 국가대로 재정을 확보하면서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대동법은 점차 그 당초의 성과를 잃게 되었다.
원래 상납미는 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쌀 6말)로, 유치미는 가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6말)로 각각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17세기 말엽부터는 해마다 선혜청에서 수조반강(收租頒降:상납미의 소요 예상량을 산정한 다음에 각 군현에서 상납할 수량과 영·읍에 유치할 수량을 책정하여 주는 것)하는 제도가 생겨, 그 수량들이 전적으로 선혜청에 의하여 조정되어 갔다.
그것은 대동법의 실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각 도와 군현들간의 유치미의 다과를 조절하고 대동세를 전국적 차원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에서의 수요가 날로 증대되자, 상납미의 수량만을 거듭 증가시켜 가는 방편으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치미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수령들은 선혜청의 양해 아래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고, 또 이를 기회로 갖가지 탐학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여기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가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될 정도로, 그 시행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의 제정 자체가 지니는 의의나 그 실시가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재정사(財政史)의 측면에서는 잡다한 공(貢)·역(役)을 모두 전결세화하면서 정률(定率:1결당 쌀 12말)로 하고, 그 징수와 지급을 쌀로 하되, 무명이나 베 또는 화폐로도 대신하게 한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국가의 수취원(收取源)을 부(富)와 수입의 척도였던 전토에 일률적으로 집중시켜 수익과 담세(擔稅)를 직결시키는 과세상의 진보, 재산과 수익에 비례하는 공평한 조세체계로의 지향, 배부세주의(配賦稅主義)를 폐기하고 정률세주의(定率稅主義)를 채택하는 세제상의 진보 등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징수·지급을 당시 교역의 기준수단이었던 물품화폐(쌀·무명·베 등)나 화폐로 전환시켜 조세의 금납화(金納化)와 화폐재정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정부 소요물자를 공인·시인 등에게 조달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을 크게 촉진시켜 여러 산업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게 하고, 상품·화폐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상·공인층의 성장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와 사회체제가 이완·해체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