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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델가수신광우 원문보기 글쓴이: 신해
* 향토를 빛낸 가수들
1. 향토 출신의 가수로서 아니 대한민국의 가요계에서 '백년설’선생님을 빼면 이야기가 되
질 않는다. 우리에게 ‘나그네설음’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백년설’선생은 본명은 '이창민’
으로서 1914년 경북 성주에서출생하셨다.
성주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문학청년 ‘백년설’은 서을로 상경해 처음엔 ‘콜롬비아 레
코드’사에서 문예부장으로 계시면서 작사를 하셨다. 1938년 자신이 작사를 하고 ‘전기현’
선생이 작곡한 ‘유랑극단’이 발표 되어 큰 히트를 한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가수활동
을 하시게 된다. 같은 해 발표한 ‘나그네 설움’은 당시 우리 민족의 한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곡으로써 ‘백년설’선생을 최고의 가수 로 만들었던 민족가요였다.
- 나그네 설움 -
'고려성'작사, ‘이재호’작곡, ‘백년설’노래
1 /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 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2 /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3 /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
가야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
당시 ‘남인수’선생과 더불어 조선최고의 가수로서 많은 인기를 누린 '백년설’선생은 그
창법과 음색마저도 ‘남인수’선생과는 대조적이었다.'남인수’선생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해서 힘이 넘치고 호소력이 짙었다면 '백년설’선생의 목소리는 너무나 부드럽게 우리들
가슴속에 젖어들었고 특히 선생의 그 독특한 창법은 훗날 많은 후배들이 따라했는데 그
대표적인 후배가수가 바로 ‘남백송’선생이시다.
그 후 ‘백년설’선생은 ‘번지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복지만리’ ‘고향설’등 이루 셀수없을
정도로 많은 노래를 불러 히트시킨다. 선생님이 부른 노래가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암울
했던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는 곡들이었는데 1940년을 지나면
서 당시 대동아전쟁에서 밀려 패망의 징후가 나타나던 일제의 마지막 폭정의 일환으로
강요된 친일 가요 ‘아들의 혈서’를 불러 훗날 친일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남인수’선생을 비롯해 톱 클래스에 있었던 대부분의
가수들은 어쩔수 없었지않았나 생각된다.
'한국 가수협회장’을 역임하셨던 선생님은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1980
년 타계하셨다.
지역의 후배가수인 고‘강남달’선생은 고향선배인 ‘백년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백년설
가요제’를 만들기위해 평생을 노력하시다 2002년 타계하셨다.
한편 1947년 대구에서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창업하신 ‘이병주’선생님의 활동으로 이곳
대구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가요계에 발을 들인다. 제일 먼저 선생님의 제자가된 분들
은 ‘고화성’ ‘강남달’ '신세영’같은 분들 이었는데 세분은 그후 평생을 함께하신 절친한
친구분들이시다.
'고화성’선생은 ‘삼팔선야화’ ‘꽃피는 진주 땅’을 발표 하시고는 군에 입대해 종군 연예인
으로 전장을 누볐다. 그 때 대구공고를 졸업한 ‘신세영’선생이 불러 히트한 곡이 바로 지
금도 애창 되고 있는 국민 가요 '전선야곡’이다.
- 전선 야곡 -
'이호’작사, ‘박시춘’작곡, ‘신세영’노래
1 /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 운데
단잠을 못 이루어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에게 들려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 ~ ~ 그 목소리 그리워.
2 /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 길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 수 떠 놓고서 이아들의 공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 ~ ~ 쓸어 안고 싶었소.
'신세영’ 선생님은 그 후 '귀향'을 비롯해 많은 곡을 불렀다.
'신세영'선생님 다음으로는 '두남매' ‘한많은 청춘’ 그리고 '인생은 나그네’ ‘부산 행진곡’
등 많은 힛트곡을 남긴 ‘방운아’ 선생님이 계신다. ‘방운아’선생님은 '방태원'이라고도 불
리셨고 고향은 경산이시다.
- 두 남매 -
'이사라’작사, ‘박시춘’작곡, ‘방운아’노래
1 / 거치른 인정사정 비바람에도
오누이 정다웁게 자라났건만
지금은 유랑천리 암흑의 거리에서
내 너를 그리워 운다 내 너를 그리워 운다
금희야 이 못생긴 오빠를 용서하여라.
2 / 세친구 굳은 맹세 깨어진 곳에
미치는 사나이의 마음만 남아
죄악의 그늘에서 복수의 칼을 들고
내 너를 그리워 운다 내 너를 그리워 운다
금희야 이 못생긴 오빠를 용서하여라.
50년대 후반에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출신인 ‘도미(본명:오종수)’씨가 50년대 초 대구극장
에서 열린 노래자랑에서 입상하고(방운아 선생도 같이 입상했다) 그 후 서울로 가서는 한
국 최고의 스타로 부상한다. '현인’ 선생님의 창법과 약간 비슷했는데 ‘청포도 사랑’ ‘하이
킹의 노래’등을 비롯해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도미’선생은 그 후 ‘한국연예협회’ 이사장
을 역임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 청포도 사랑 -
'이화촌’작사, ‘나화랑’작곡, ‘도미’노래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아래서
어여쁜 아가씨와 손잡고 가잔다
그윽히 풍겨주는 포도향기
달콤한 첫사랑의 향기
그대와 단둘이서 속삭이면
바람도 산들바람 불어준다네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넝쿨아래서
그대와 단둘이서 오늘도 맺어보는
청포도 사랑.
그 무렵 미스코리아 ‘손미희자’의 오빠이기도 한 ‘손시향’선생이 부른 '이별의 종착역’
‘검은장갑’이 큰히트를 쳤다. 당시 정통 ‘트로트’에 젖어있던 우리에게 ‘손시향’선생의
노래는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다.요즘으로 보면 아주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였다.
'노란샤스의 사나이’의 히트로 우리 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손석우’선생의 작품인 ‘이별의
종착역’은 훗날 요절한 천재가수 ‘김현식’이 젊은이들의 취향으로 재 취입해서 젊은 세대
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 이별의 종착역 -
‘손석우’작사/작곡, ‘손시향’노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길
음 ~ 안개 짙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이만은 왜 못오나
음 ~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별의 종착역
* 아 ~ 언제나 이 가슴에 덮힌 안개 활짝 개고
아 ~ 언제나 이 가슴에 밝은 해가 떠오르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 나그네 길
음 ~ 비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친다
이별의 종착역.
또한 라디오 연속극 ‘남과 북’의 주제가인 ‘누가 이 사람을 모르 시나요’를 부른 ‘곽순옥’
씨가 대구사람인 것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샹송’을 많이부른 ‘곽순옥’씨는 당시 실력
파 가수로 인정 받고 있었으며 ‘누가 이 사람을 모르 시나요’는 50년대 말 라디오 연속극
과 함께 큰 인기를 누렸는데 80년대 중반 전국민을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던 남,북 이산가
족 만남때 다시 한번 큰 사랑을 받았다.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한운사’작사, ‘박춘석’작곡, ‘곽순옥’노래
1. 누가 이 사람을 모르 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 시나요.
2. 누가 이 사람을 모르 시나요
넘치는 정열에 붉은 입술
한번 작정하면 변함이 없고
꿈 따라 님 따라 가겠노라고
내 품에 안기어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 시나요.
2. 1960년대 접어들면서 대구는 두명의 큰스타를 배출하게 되는데 바로 영화계의 ‘신성일’
과 가요계의 ‘남일해’씨다. 대건 고등학교를 나오고 58년 ‘대도극장’에서 열린 콩쿨 대회
에서 입상함으로서 이병주 선생님에게 발탁된 ‘정태호’라는 청년은 서울로 상경해 이름
을 ‘남일해’로 바꾸고 ‘이정표’ ‘첫사랑 마도로스’ ‘핑크 리본에 카드하나’ ‘빨간 구두아가
씨’ ‘맨발로 뛰어라’ ‘추억의 오솔길’ ‘성황당 고갯길’ ‘이별의 십오 미터’ ‘찾아온 산장’등
엄청난 인기를 모은 후 영화계까지 진출해 성공한다.
당시 ‘이정표’ 는 십여만 장의 레코드 판매기록을 세웠는데 당시 전축을 소유한 가정이
많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했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백만장은 족히 넘었으리라.
- 이정표 -
‘월견초’작사, ‘나화랑’작곡, ‘남일해’노래
1. 길 잃은 나그네의 나침반이냐
항구 잃은 연락선의 고동이더냐
해 지는 역 마루 홀로 섰는 이정표
타 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2. 바람 찬 십자로의 신호등이냐
정처 없는 나그네의 주마등이냐
버들잎 떨어지는 삼거리의 이정표
타 고향 가는 길손 울려만 주네.
‘남일해’선생은 1990년대 후반 ‘박현진’씨가 작곡한 ‘안부’란 곡으로 지금 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남일해’선생 이 후부터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대구 출신의
대형가수가 탄생되지 못했다.
70년대 초에는 ‘과거는 흘러갔다’ ‘방랑 삼천리’ 를 부른 ‘여운’(대륜고등)이 있었고....
- 과거는 흘러갔다 -
‘정두수’작사, ‘전오승’작곡, ‘여운’노래
1. 즐거웠던 그 날이 올수 있다면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 돌아가서
못 다한 내 심정을 전해 보련만
아무리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2. 잃어버린 그님 을 찾을 수 있다면
까맣게 멀어져간 옛날로 돌아가서
못 다한 사연들을 전해 보련만
아쉬워 뉘우쳐도 과거는 흘러갔다.
같은 무렵 ‘이동근’씨(대신동)가 ‘고향의 모정’을 불러 전국적으로 히트했다.
- 고향의 모정 -
‘반야월’작사, ‘이인권’작곡, ‘이동근’노래
1. 어머님이 보내 주신 털내의 하나
이아들은 받아들고 눈물집니다
외로운 타향에도 봄이 오며는
고향에 진달래도 곱게 피겠지
아 ~ 풀냄새 흙냄새여 고향의 모정.
2. 어머님이 불러주신 꿈의 자장가
울지 말고 잘 자라고 들려옵니다
성공을 앞세우고 돌아가는 날
어머님 등에 업고 효도 하오리
아 ~ 물소리 새 소리여 고향의 모정.
1970년 우리는 한국의 ‘레이찰스’라는 칭호를 들은 가수 ‘이 용복’의 출현으로 큰 감동을
받는다.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나 10세 전에 사고로 두눈의 시력을 다 잃은 ‘이용복’은
1970년 통기타하나 달랑 들고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을 번안한 ‘어머님 왜 나
를 낳으셨나요(원제: 1943년 3 월 4일생)’란 곡으로 우리곁에 다가왔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이렇게 시작되는 이 곡은 ‘이용복’자신의 이야기 같기도 해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어서 발표된 ‘그 얼굴의 햇살을’역시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큰 히트와 함께 1972
년 MBC 10대 가수상의 영광을 안으며 향후 십여 년간 인기 정상을 지킨다.
- 그 얼굴에 햇살을 -
‘신명순’작사, ‘김강섭’작곡, ‘이용복’노래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
옛 이야기도 잊었다 하자
약속의 말씀도 잊었다 하자
그러나 눈 감으면
잊지 못할 그 사람은
저 멀리 저 멀리서
무지개 타고 오네.
지금도 우리 귀에 아련히 남아있는 그의 히트곡들은 ‘그 얼굴에 햇살을’을 비롯해 어린이
들이 즐겨 부르는 ‘어린 시절’ ‘줄리아’ ‘달맞이 꽃’ ‘잊으라면 잊겠어요’ ‘사랑의 모닥불’
‘마지막 편지’ 그리고 번안곡인 ‘마음은짚시’등 수많은 곡을 불렀다. 1978년 역시 번안곡
인 ‘아낙’을 부르고 ‘이용복’은 녹음실을 차려 음악제작에도 남다른 기량을 발휘한다.
그는 잃어버린 시각 대신 우수한 청각을 소유해 작곡과 편곡 솜씨가 대단했다. 그리고 비
장애인 보다 더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많은 팬들과 동료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0년 들어 양평에 카페를 차려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열정으로 작, 편곡 및 음악
제작에 힘쓰고 있다.
나의 대표곡인 ‘갓바위’도 1999년 그의 녹음실에서 작업이 되었고 지금 호평을 받고있는
반주음악도 그의 편곡이다.
그 무렵 또 한명의 얼굴 없는 가수가 나타나 실력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데 ‘나를 두고 가
려므나’ ‘효심’ ‘그대 앞에 다시서리라’등을 부른 대구 협성고등 출신의 ‘김동아’씨다.
탁월한 가창력으로 전국의 청취자를 사로 잡은 ‘김동아’씨는 뜻하지 않은 화재를 당해
아버지를 구하려다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당시(79년) KBS, MBC, SBS, 세 방송사의
연말 신인상을 다 거머 쥘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김동아’씨 역시 ‘이용복’씨와 더불어 본격적인 컬러 TV시대가 열리면서 주춤하게
된다. 그 후 2,000년대 들어 ‘김동아’씨는 ‘오동나무’ ‘갓 바위’ ‘사랑은 바람’등을 히트 시
켜 재기에 성공한다.
- 나를 두고 가려므나 -
‘조운파’작사/작곡, ‘김동아’의 노래
바람결에 나뭇잎이 지더니
고개 너머 울던 새도 가버리네
에헤야 가려므나 너 마저 가려므나
가다가 그리우면 나를 찾아 또 오면 되지
가려거든 가려마 나를 두고 가려므나.
또한 ‘기적소리만’을 부른 ‘배성’(대륜고등)씨도 한 때 큰 인기를 누렸다.
- 기적 소리만 -
‘진남성’작사/작곡, ‘배성’ 노래
1.가랑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정거장
정든 그 사람을 멀리 보내고
나 홀로 섰네
사랑을 하면서도 보내야 하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겠냐마는
기적 소리만 기적 소리만
내 마음 알고 갔겠지.
2.기적도 잠이 들은 적막한 정거장
비에 젖고 젖은 가로등 밑에
나 홀로 섰네
사나이 두 주먹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이 눈물을 알겠냐마는
기적 소리만 기적 소리만
내 마음 알고 갔겠지.
그리고 당시 원화여고 재학 중 노래자랑입상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애플 시스터즈’ (권은
경/천지애)가 있었는데, 그 후 ‘권은경’은 솔로로 독립해서 활동하다가 사회봉사 활동으
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관 약목출신인 ‘신 웅’도 ‘무효’를 불러 큰 인기를 모았다. 최근엔 ‘영수증을 써 줄거야’
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무 효 -
‘강 석’작사, ‘신 웅’작곡, ‘신 웅’노래
남자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
괜히 우는 게 아냐
너 하나 사랑한 게
바보라서 울었다
남자란 여자란 무엇으로 사는가
남자는 여자의 여자는 남자의
사랑 먹고 살아요
지난 것은 무효야 이제부터 시작이야
다시 한 번 돌아서서 웃어 봐.
천재는 단명이라 했던 가 ‘일어나’ ‘서른 즈음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고 요절해 많은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 ‘고, 김광석’이 대구출신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광
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십년이 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추모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요절한 천재가수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그의 노래도 듣고 있노라면 왠지 슬퍼진다.
김광석은 ‘일어나’ ‘서른 즈음에’외에도 ‘사랑 했지만’ ‘이등병의 편지’등 많은 곡들을 남
겼다.
- 서른 즈음에 -
‘강승원’작사/작곡, ‘김광석’ 노래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 뿜는 담배연기 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이 부른 노래들이 대 부분 그러했지만 특히 ‘서른즈음에’는 많은 동료, 후배가수
들이 리메이크를 했다.
근래에는 노래에 소질이 있는 신인들이 시대변화(가수 등용문)로 인해 바로 서울에가서
데뷔를 하는 관계로 향토 출신임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지금은 솔로로 독립했지만 그룹 ‘GOD’ 의 김태우(구미)’ 혼혈가수 ‘소냐(아포)’
그리고 ‘최재훈’ ‘양파’ ‘박학기’ 등이 있다.
전통가요 쪽으론 경북 출신으로는 ‘당신의 의미’로 스타가 된 ‘이자연’(군위)과 ‘미스고’의
‘이태호’(봉화) ‘꽃을 든 남자’를 부른 ‘최석준’(영주) ‘조약돌 사랑’의 ‘장민’(울진)‘내인생
최고의 히트’를 부른 ‘임 동한(대구)’등이 요즘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가요계의 부활을 목적으로 대구연예협회가 1992년 부터 개최한 ‘대구가요제’에서도
촉망되는 신인이 많이발굴 되었다.
98년 제 7회 때 대상을 받은 ‘안해리’는 당시 대구대학 미술학부 2학년이었는데 이듬해
전국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이어 ‘싱가폴’에서 열린 ‘바쿠스 국제 가요제’에서 당당히
‘금상’을 획득해 대구의 위상을 올렸다.
2000년 ‘동상’을 받은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이었던 ‘권주일’은 그해 기획사로 뽑혀 올라
갔는데 듀엣그룹인 ‘히어로’에서 ‘가을’이란 이름으로 활동했고, 2001년 ‘은상’을 받은
‘노성훈’은 경북 대학(음대)생으로써 ‘서후’란 예명으로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
하다가 예명을 ‘성훈’으로 바꾸고 나서 KBS주말 연속극 ‘로즈마리’ OST 타이틀을 부르
고 나서 젊은이들에겐 일약 스타가 되었다.
2003년 ‘금상’을 한 ‘정 진우’역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서울로 가 공개 오디션에
합격해 영화 ‘내 사랑 싸가지’ OST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2000년에 시작한 ‘달구벌 가요제’에서는 아역 스타3명을 발굴하게 되는데 ‘안희철’
‘이소정’ ‘김용빈’이었다.
지금은 청소년이 되었지만 당시는 전국을 놀라게한 가요 신동들이어서 전국에 ‘가요신동’
붐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