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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메시지 2013-09-15 주일
묵상: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옛적에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헬라인들은 지식을 추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22~24).
그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Christ Jesus has become for us wisdom from God--that is, our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오신 지혜로서, 즉, 우리의 의로움, 거룩함, 그리고 구속함이 되셨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의로움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다는 말이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신다는 말이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 곧 성도로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해졌을 뿐 아니라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속함 또는 구원함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건지셨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한없는 감사가 우러나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전하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그것은 우리를 의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며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며 나아가 구원의 주님께 감사 드리고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소개할 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들로 세우기 위함이며 그것은 또한 교회의 문제들을 감안하는 가운데 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분열과 갈등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소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은 분명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여 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성도들의 형편에 맞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믿고 소개받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대속하신 예수님이시다. 그것은 바울 복음에 주로 기초한다. 흔히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언급되듯이 실제로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습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복음서가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신학적인 렌즈를 통해서 복음서를 읽다 보니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왜냐면 예수님을 우리의 대속 주로만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 받는 것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편향되게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근거로 하여 증언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학적 입장과 렌즈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WCC에 대한 양분된 평가는 그 다른 입장을 반영한다.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 참여에 관하여도 민중신학적 입장에 있는 분들의 갖고 있는 생각과 근본주의 신앙의 소유자들이 가진 생각의 차이는 엄청나다. 여성목사의 안수 문제에 관해서 달리 해석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모든 주장은 다 성경을 근거로 한다고 각자 주장한다. 그것은 결국 같은 성경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하게 하는 렌즈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다른 것이 예수님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정도로 어느 것이든 문제 없으며 좋다고 생각할 문제냐 아니면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복음의 걸림돌이 되든가 도약판이 되든가 하는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렌즈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 독자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고후 3:14)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들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hic et nunc) 필요한 복음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수년 전에 복음의 내용은 바뀌지 않으나 그것을 전하는 방법은 바뀔 수 있다고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 자체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많이 놀란다. 복음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최고의 사명에 대한 이해를 결정하며 이것은 성도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연세중앙교회는 추석명절이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 친척들과의 만남이나 부모형제들과의 교제는 신앙에 해가 될 경우에는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은 우상숭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라고 생각된다. 왜 그렇게 하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성경에 대한 편협하고 왜곡된 이해 때문이라고 본다. 이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성경에서 여러 번 각 상황에 따라 조언을 한다. 그 조언의 기본 정신에 관하여 바울 사도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도외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 정신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걸맞고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정신은 어떤 적용점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명령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는 이 시대에 어떤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흔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오중복음 삼박자 축복을 말한다. 별세 신앙을 말하는 이중표 목사님도 있었다. 이것은 각 시대의 상황에 부응하여 복음을 전하다 보니 그렇게 나온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 삶의 투쟁 속에서 결정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복음이 개인적인 체험을 떠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할 때 본래는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마 24:14).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천국복음이라고 마태복음에서 기록한다. 세례 요한이 옥 중에서 오실 메시아가 당신인가 물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전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의 증거다. 즉,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눈 먼 자가 보며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래서 복음전도자들이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을 하기도 한다. 은사에 집중하기도 하고. 그런데 정녕 복음이 그런 것인가? 이런 기적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잘못된 교회들이요 복음이란 말인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김세윤 교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사복음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누리는 단어, 영생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아담 이후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인간, 또는 탕자와 같은 인간의 실존을 돌이켜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초청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예수님의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어 올바른 관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로 보건대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서 신적 생명을 누리는 삶을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자아를 회복하며 우리의 삶을 회복하여 우리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이 임하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 그 삶은 결국 우리를 영광의 삶, 영생의 삶을 맛보게 하며 그리고 장차 완전한 영생을 누릴 것이다. 여기서 영생이란 시간적으로만 늘여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분으로부터 공급 받는 신적 생명과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하겠다. 이런 삶을 우리는 경건한 삶이라고 하고 그것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연세중앙교회에서 늘 기도하려고 힘쓰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가 가지는 폐단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이 시대에 복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이고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 받은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속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우리가 이 생에서 누리기 시작하다가 주님의 재림에는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야 가는 나라로 공간적이고 시간적으로 지금 현재와는 멀리 동떨어진 어느 곳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일단 천국 하면 하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이라 하면 위에 있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말한 삼층천(셋째 하늘)을 생각해 보자(고후 12:2). 한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권상덕 목사는 고대 히브리인의 우주관을 설명하면서 궁창과 물의 하늘, 그리고 하늘 위의 하늘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 하늘을 소개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하늘은 하늘 위의 하늘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현대의 우주관으로 바울이 간 셋째 하늘이 어딜까 생각해 보자. 현재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바로 4차원의 하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공간으로 생각하는 그런 하늘이 아니다. 그것은 크기를 말할 수 없는 하늘이다. 그러므로 현재와 같이 하늘나라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땅을 떠나 들려 올라가서 어디엔가에 있을 하늘로 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나라는 이 땅이며 하늘나라는 곧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다. 그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의 기도문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그 날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계신 곳은 낙원이다(παράδεισος 눅 23:43). 이 낙원이 바울이 말한 삼층천에 있었다고 한다(고후 12:4).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2:7). 그러므로 낙원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며 주님께서 계신 곳이요 승리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 낙원에서의 기다림이 끝나면 주님께서 승리한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아직 낙원에 이르지 않고 전투하는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정신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때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질 것이며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을 것이다(사 11:9).
천국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원리는 무엇일까?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엡 4장). 또한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한 마음으로 합하는 것이다(빌 1:27). 또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준비하는 것이다(살전 2:12). 하나님을 배반하는 탕자의 모습,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말라져 가는 것이 인간의 실존임을 알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힘입어 사는 것이 주 안에 거하는 삶이요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교회와 사역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의 삶과 공적인 삶이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삶이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하며, 공적인 삶이란 교회와 나아가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여기서 교회는 개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며, 그 개인들이 합심하여 주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도록 힘쓰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명확해져야 한다.
이번 주간에 셋째 딸이 이렇게 묻는다: 예수님을 믿되 세상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 누리다가 주님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포기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재미있는 일들을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학생들에게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하여 조영남이라는 한국의 가수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1973년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에서 김장환 목사의 추천으로 특송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성가가수로 활동하게 되고 트리니티 신학대학교에서 학사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그는 계속 음악인으로 화가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윤여정과의 결혼은 깨졌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성급한 판단을 하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아직 회개하지 않은 탕자라고 고백한다. 탕자라면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돌아온다.
딸이 그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으며 자신이 하려는 삶에서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조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음악의 종류와 삶의 영역은 축소되어야 할 것 같다는 우려에서 그런 질문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오해가 있다. 먼저 복음의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 정신에 맞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그의 눈높이에 맞게 전하고 청소년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지를 명확히 전해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언급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네 가지 밭은 각각 말씀에 대한 네 가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그 결과는 다양하다. 또한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좋은 씨앗 사이에서 자라는 가라지들에 대한 것으로 심판 날에 뽑힐 것이라는 것이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는 작게 시작해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놀랍게 성장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 그리고 그물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과 종말에 있을 심판을 언급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끝까지 인내로 결실하면 적게 시작해도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며 그 삶은 은밀한 기쁨이 넘치는 삶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천국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비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에는 이 비유를 잘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짧지만 핵심을 잘 다루고 있는 비유라 생각된다. 어쩌면 셋째 딸은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것을 우리는 흔히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것인가? 그 보화를 발견하는 삶은 지속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항상 기뻐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로 하신 말씀,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먼 나라로 간 아들이 실패하여 돌아오는 이야기로서 이것은 인간의 실존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물론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회개 촉구를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을 잘 엿볼 수 있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아들, 그것도 못 얻어먹는 아들, 그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허비해버린 아들, 그에게 준 것을 관리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청지기로 지음 받았으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 아담을 생각한다. 주님을 떠난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 역사는 주님을 떠난 인생이 겪는 고초와 불행의 이야기다. 지금 인류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한국은 매일 42.6명, 일년에 15500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한 해에 8천명이라고 한다. 인간이 개발한 문명의 이기는 삶을 정말 풍요롭게 하는가? 주님을 떠난 인간은 그가 가진 모든 재능과 유산을 가지고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조용기 목사님의 장남 조희준 씨가 왜 그렇게 타락했는가? 우리 친척 중의 잘 나가는 식당 경영자가 왜 모친의 유산을 다 물려 받아 허랑방탕하고 코피노를 낳으며 파경에 빠졌는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기술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을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좋은지를 배워야 한다. 사실 시간은 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보물을 낭비하고자 하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 안에 거하여 풍성한 삶을 살라고 복음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 기쁨이 충만하고 갈수록 잘 되는 삶이다. 이런 좋은 예가 다윗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양치기로 출발했으나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결국 그는 강성한 나라를 세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여쭈었으며 그가 모은 모든 전리품은 결국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재료가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여쭌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야기 해 준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5)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상 23:4)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삼하 5:23)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삼상 30: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다윗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 모델은 하나님께 구하고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형통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 다윗을 보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의 나라에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을 것이라고 이사야 11장에서 약속하셨다.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고난 받아 상함을 대신 받고 채찍을 대신 받으며 범죄자처럼 멸시를 받고서야 그런 영광에 이를 것도 이사야 53장에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풍성하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이끄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고백이자 우리의 삶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l 그들은 규칙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주님께 드린다. 기도와 성경읽기에 자신을 드린다. 그를 통해 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더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과 지혜를 공급 받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번득이는 지혜가 있다.
l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임에 즐겨 참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을 확인하고 더불어 힘을 모아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서 배운 것과 재능이 비로소 올바른 곳에 사용된다는 것에 감사와 감격을 누린다.
l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면서 삶을 주님께 헌신한다.
설교 개요
1. 제목: 점점 강성해가는 다윗
2. 본문: 사무엘하 5:1~25
3. 목적: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풍성하게 사는 법을 성경을 통해 배우며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지를 확신하고 매일 그 삶에 자신을 드리게 한다.
4. 구조
① 딸의 질문: 아빠, 예수님을 언제 믿으면 좋을까요?
②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자의 자세-마태복음 13장
③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탕자의 이야기에서-누가복음 15장
④ 탕자의 실례-자살률, 기아, 조희준 씨, 이모님의 아들
⑤ 주님의 인도를 구한 사람- 다윗: 삼하 5장
l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강성해 감
l 하나님께 묻는 다윗: 19절, 23절-1차, 2차 공격
⑥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통해 주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심
⑦ 우리는 어떻게 할까?
l 규칙적으로 시간을 주님과 함께 하기-기도와 성경읽기
l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임에 함께 하기
l 자신의 삶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헌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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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일 설교말씀에서 너무 은혜를 받았는데요 다시 글을 읽어도 너무 주옥 같은 말씀이네요 피곤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말씀을 준비하신 목사님께 하나님의위로와 강건한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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