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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제 度도
8. 예정된 파국 5
미드 맨해튼 경찰서의 하재섭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편성된 수사팀이 모두 모인 가운데 그 동안의 수사상황에 대한 브리핑과 앞으로의 수사 방향을 정하는 회합이 개최 되었다. 그 자리에는 뉴욕시 검찰총장이 특별히 배석했고, 그가 나타나자 경찰서장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인스팩터 크리스가 최종적인 의견을 밝혔다.
“강영민은 한국에서 얼마 전 에어 컨터이너를 하나 들여왔습니다. 그것이 배달된 장소는 맨해튼에 소재해 있는 한 유흥업소입니다. 그곳의 주인인 마크 왕은 차이니스 갱단의 보스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에어 컨테이너 안에 한국에서 제조된 필로폰이 들어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강영민은 에어 컨테이너가 배달된 직후에 뉴욕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한 달에 절반 이상 살다시피 했던 애틀랜틱시티에 최근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조직에서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부의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 같은데 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강영민을 찾아 애틀랜틱시티에 내려갔던 하재섭은 강영민을 찾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마약조직에 의해서 납치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직에서는 하재섭이 무엇 때문에 강영민을 찾는지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재섭이 마약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를 납치했던 조직에서는 풀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재섭이 마약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 판단되면 억류시키거나 영원히 입을 막기 위해 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윌리엄 로저가 물었다,
“그는 억만장자의 애인이오. 돈을 노린 납치 가능성은 없소?”
“납치범으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돈이 목적이 아니라 마약과 관련된 비밀이 새나갔는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납치를 한 것이라는 심증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영민과 마약 조직에 대한 수사가 하재섭을 찾는 지름길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약 전담반과 공조체제를 구축해서 수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앞으로 24시간 안에 하재섭을 찾아내시오.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그레이스가 지금 유산할 위기에 처해 있단 말이오. 남편이 될 남자가 죽고 뱃속의 아이도 잃으면 그레이스는 혼자 살아갈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녀도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오. 세 사람의 생명이 지금 우리 수사 결과에 달려 있으니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수사회의를 마친 직후 도화대주루 일대에 변장을 한 경찰들이 포진(布陣)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손님을 가장하여 도화대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외견상 유사업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을 나와서 건물의 전체를 둘러보았을 때 홀과 주방을 빼고도 뒤쪽으로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공간이 있다는 심증을 갖게 만들었다. 거기에 조직의 아지트로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지트를 급습할 수도 있었지만 증거물이 나오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크리스는 도화대주루 안으로 연결되는 모든 전화선에 도청장치를 설치토록 하였다.
왕은 경찰이 이렇게까지 신속하게 수사망을 압축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병실의 창가에 와서 부서지는 햇살은 화사했다. 창문을 통해 강이 내려다 보였다. 더 멀리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아스라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기가 뉴욕의 맨해튼이고, 마치 바다처럼 도도히 흘러가고 있는 저 강은 허드슨 강일 것이 분명했다. 정화는 마침내 찢어진 종이를 이리저리 맞추어 원형을 복원시키듯 의식의 조각난 편린(片鱗)들을 꿰맞추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내가 지금 남편 곁에 와 있구나.
마치 어둠의 미로(迷路)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혼미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고 여겨졌다.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탈출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극장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깜깜하여 주위를 분간할 수 없지만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며 발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어둠의 혼미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며 의식을 되살려 낼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암실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인화할 때 물 위에 어린 파사체는 처음 흐릿하다. 그렇게 투명하지 않던 의식이 마침내는 종이 위에서 또렷하게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재생이 되는 것처럼 살아나며 명료해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정화는 눈물을 흘렸다. 죽음과 다름없는 무의식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생의 고통과 환희를 감각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정신이 아픈 것도 육체에 병이 든 것이나 마찬가지로 몸을 축내는 것이 틀림없었다. 몸무게를 달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몇 킬로그램은 착실하게 빠졌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앙상하게 야위어 있었다.
기뻐서 눈물이 흐른 것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그녀는 이내 뼈가 저미는 듯한고통에 잠기며 슬퍼서 울기 시작했다. 멕시코 국경을 넘다가 강간을 당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더럽혀진 몸으로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 오욕스러웠다. 남편은 모든 정황을 알게 되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며 따뜻하게 위로해 줄 것이다. 그 정도는 문제를 삼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넓은 남자를 사랑했다고 여겼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몸이 더렵혀진 것을 자신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부정한 남자가 아니기를 바랬듯 자신도 언제나 남편의 떳떳한 사랑을 받아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순결한 몸과 정신을 소유하고 싶었었다. 불행은 자신의 의지 밖에서 발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더렵혀졌다는 자체만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그냥 병원에 갇혀 있다가 죽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이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
정화는 누가 이 병원에다 자기를 입원시켜 의식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소설가 주영찬 선생일 수 있었다. 뉴욕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남편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머지않은 장래에 누구든 자기를 면회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알게 되겠지. 그녀는 당분간 자신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자만의 비밀로 해두리라 작정했다. 거기에 떳떳한 상태로 남편을 만나지 못하게 된 정화의 아픔이 있었다.
과연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의식을 막 회복하여 조각나 있는 생각들을 이지저리 맞추고 있을 즈음 한 명의 면회자가 찾아 왔기 때문이었다. 의사의 안내를 받아 병실 앞까지 왔던 상대는 의사에게 허락을 받았는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왔다. 면회자는 남편이 아니었다. 주영찬도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정화 앞으로 다가왔다.
정화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적의(敵意)도 호의(好意)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방금 전에 의식을 회복했던 그녀는 타인에게 정상인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데 특별한 노력을 기우릴 필요가 없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레이스 그라비우스라고 해요.”
정화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 왔어요.”
이건 무슨 말인가. 역시 모른 체했다.
“재섭 씨는 하루도 당신을 잊은 날이 없으며, 당신을 지금도 사랑해요. 그렇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못할 짓을 시켰어요. 재섭씨가 당신을 배신하도록 유혹한 것은 나에요. 그러니 잘못은 모두 나에게 있어요.”
정화는 남편이 뉴욕에서 새로운 여자를 사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화씨 용서해 주세요. 당신이 재섭씨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도 당신못지 않게 그 사람을 사랑해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레이스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는 듯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당신을 다시 면회 오지 못하게 될 거에요. 그렇지만 당신이 하루빨리 의식을 회복하게 되기를 진심에서 빌겠어요. 나는 당신이 이 병원에서 가장 좋은 특실로 옮겨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놓았어요. 오늘부터 아주 유능한 몇 명의 전문의사가 팀을 이루어 당신을 집중 치료하기 시작할 거예요.”
정화는 그럴 필요 없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되찾은 의식은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명타(致命打)를 맞았다. 그러나 다시 혼돈에 빠지는 불행만은 면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도려 졌다. 정화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당신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에요. 재섭씨는 지금 실종되었어요.”
그 말은 정화의 혼을 반쯤 빼놓을 만큼 위력이 대단한 직격탄이었지만 이번에도 다시 이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녀의 아팠던 정신은 아직 튼튼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라도 소생된 것만은 분명했다. 하마터면 정화는 자제력을 잃고 남편이 실종되었다니 무슨 소리냐고 물을 뻔했다. 그녀는 심장이 마구 불규칙하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상대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다행이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재섭씨를 납치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강영민이라는 사람이 범인인 것 같아요. 뉴욕 경찰들이 지금 백방으로 찾고 있으니까 강영민은 곧 잡힐 거에요. 나는 재섭씨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래요. 살아서만 돌아온다면 재섭씨가 당신에게 가겠다고 해도 잡지 않기로 했어요. 당신도 재섭씨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거에요. 그렇게만 되면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 주세요.”
그레이스의 눈에 재섭이 살아서 돌아오면 당신에게 보내 준다는 말을 할 때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했다.
“당신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찾아 왔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정화는 남편을 유혹했다는 그레이스에 대하여 아무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는 천주교 신자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남편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지금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걱정이 더 큰 부피로 다가 왔기에 원망할 여력도 없었다.
그레이스가 사라진지 10분도 경과하지 않아서 남자 간호사들이 나타나 정화를 그 병원이 보유한 가장 비싼 병실로 옮겼다. 정화는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채 병원 측 처사에 맡겼다. 호텔의 특실보다도 입원비가 비싸게 치여질 것 같은 병실은 우선 전망이 훨씬 좋았다. 주의에 환자들이 눈에 뜨이지 않는 쾌적한 공간이었다.
정화는 안락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자 그레이스 그라비우스라고 했던 여자의 얼굴이 망막(網膜)에 어렸다.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마음씨도 고와 보였다. 요란한 의상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의식이 돌아온 정화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 매우 비싼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특실로 옮겨주고 여러 명의 전문의로 하여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한 재력가라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
정화는 남편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레이스로부터 남편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 바뀌어 남편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몸이 더렵혀진 자기로서는 당당하게 내 남편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은 남편에게 부담만 줄 것이 분명한 순결하지 못한 몸뚱이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그녀에게는 돈이 있었다. 돈, 그것은 남편이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남편이 그녀와 사는데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그를 사랑한 여자가 취해야 할 행동일 것만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찾아 온 나는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사랑했던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주고 달리 살아갈 목적을 찾을 수가 없다는데 그녀의 슬픔이 있었다. 남편은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인생항로를 밝혀주는 등대였었다. 그 모두를 잃었으니 좌초(坐礁)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은 것을 저주했다. 정상으로 돌아온 그녀가 내린 결론은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납치되었다는 남편이 죽은 것으로 밝혀지면 미련 없이 뒤따라가리라. 살아 있다면 마지막으로 얼굴만은 꼭 한 번 본 다음 떠나고 싶었다. 정신을 되찾았지만 밖으로 나가야 생에 대한 아무 의의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환자를 가장하여 그 병원에 계속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레이스 그라비우스가 트럼프 타워로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들자 윌리엄 로저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레이스, 많이 걱정하고 있지?”
그야 물어보나 마나 뻔한 사실이었다. 재섭이 아파트를 나간 지 3일째였다. 그녀에게는 30년도 더 되는 기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이처럼 피를 말리는 일일 줄은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울먹였다.
“그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그레이스. 비관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돼요.”
“강영민은 도박꾼이에요. 애틀랜틱시티에 없다면 라스베이거스에 가 있을 지도 몰라요. 그 사람을 한시바삐 찾아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강영민의 사진을 라스베이거스의 경찰서로 전송해 주고, 카지노를 수색토록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그가 미국 내의 다른 장소에 숨어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강영민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집중 감시하며 전화를 도청(盜聽)하기 시작했어요. 인스팩터 크리스는 유능한 수사관이오. 조금만 기다리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강영민을 찾는데 공개수사를 할 필요는 없을까요?”
“아직은 비밀 수사를 하는 게 더 빨리 수사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 판단 하지만 장기화되면 그 방법도 고려해야지.”
“공개수사를 하게 되면 내가 현상금을 내놓겠어요. 수사에 필요하다면 격려금도 드릴게요.”
“그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말하마. 그러나 우선은 나를 믿고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자주 전화 주세요.”
“물론이다, 그레이스.”
통화를 끝낸 그레이스는 강영민을 찾는 것이 재섭을 찾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았다. 자신의 돈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 서 납치될 수도 있고……그레이스는 재섭의 누이동생을 자살케 만든 원수가 뉴욕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뒤늦게 상기했다. 그도 용의선상에 올려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가 누구란 말인가.
그레이스는 재섭이 일기를 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일기를 훔쳐보는 짓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기를 통해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재섭이 사용해온 책상 서랍 안에서 그의 일기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일기는 그가 미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써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는 아내를 절실하게 그리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등장하면서부터 갈등을 일으킨 그간의 경위에 대해서도 소상히 적어놓고 있었다. 재섭은 적어도 자신의 부를 탐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아내를 배신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재섭은 그 이유를 한 여자의 진실과 고독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어놓고 있었다. 그런 줄 알고 있었지만 재섭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남자였다. 사람은 제대로 만났는데, 늦게 만난 것이 문제가 복잡하게 된 원인이라고 여겨졌다.
일기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자살하게 된 이유와 그에 따른 복수를 하기 위해서 뉴욕에 머무르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그것은 황명선 부자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역으로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재섭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그의 복수건이 일기를 통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재섭이 황명선 부자에 대한 복수를 결코 서두를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재섭이 실종된 배경에는 황명선이 아니라 강영민이 개입해 있다는 심증을 주는 내용이었다. 황명선의 존재를 부각시켜 수사에 혼선을 빚도록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재섭의 가슴속에 복수에 대한 집념이 똘똘 뭉쳐 있었는데도, 그리고 그것을 여행을 할 때 약간 시사했음에도 그동안 그것을 외면했다는 것을 자책했다. 재섭은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임신을 시켜 주었다. 자신은 그가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했다. 재섭이 받고 싶었던 선물은 고급시계나 멋진 옷이 아니라 복수에 필요한 돈이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돈이었기에 재섭은 선뜻 말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재섭을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황명선에게 멋진 복수를 한 것을 선물로 안겨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것을 즉시 행동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부분에 대한 조사는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플러싱에 살고 있던 재섭의 직장과 아파트를 알아다 준 사립탐정의 솜씨가 일품이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녀는 잠시 후에 그의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레이스는 이번에도 금액을 적지 않은 백지 수표를 위임하며 말했다.
“브로드웨이 27가 코너에 황스 트레이딩 앤 홀 세일 컴퍼니가 있어요. 나는 그 빌딩 주인이자 사주인 황명선이라는 사람이 내 남편을 납치했는지 알고 싶어요.”
사립탐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당신 남편이 실종된 상태라고 했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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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재섭을 사이에 두고 정화와 그레이스 그라비우스가 만났는데, 불꽃을 튀기는 것보다 더 피장이 긴 아픔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