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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시생활로 마음과 몸이 지치면 의례 평생을 아름답게 사신 두 노부부 목사님이 살고 계시는 지리산 맞은 편의 구례를 찾습니다. 지난 주에도 저는 병풍처럼 지리산이 펼쳐져 있는 구례에 갔습니다. 참으로 떠나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녹지사 모임에 빠질 수 없어 12월19일 눈덮힌 지리산의 설경을 뒤로하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녹지사모임 역시 도시생활에 찌든 영혼을 위로하는 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녹지사 모임은 종로3가 인사동의 시천주(詩泉酒)에서 가졌습니다. 모임장소인 시천주(詩泉酒)에 걸맞게 이번 모임은 '詩같은 나눔'과 '술이 샘솟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 한번 들어보십시오.
술을 샘솟게 한 이는 새로 녹지사 모임에 나오신 정혜승님과 최명성(송주)님이었습니다. 이날따라 시천주에 막걸리가 떨어졌는데 정혜승님께서 막걸리를 사와서 마시자 했습니다. 그것도 발효되지 않은 서울막걸리여야 한다 했습니다. 하도 술을 마셔 의사로부터 금주령이 내렸다는 주장(酒將) 송주님이 "서울 막걸리를 찾으시다니. 아하 술을 제대로 아시는 분이시군요."라고 정혜승님을 추켜세웠습니다.
막걸리 명품, 서울막걸리가 도착하자 송주님이 거품없이 막걸리 따르는 법을 시연해주었습니다. 우선 프라스틱으로된 막걸리통을 꺼꾸로 든 후 두 손바닥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립니다. 그 다음 막걸리병을 세운 후 꾹꾹 눌러 발효된 막걸리에 포함되어 있던 탄산가스가 미세한 병마게틈으로 빠져나가게 합니다. 그런 후 병을 따면 희안하게도 거품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와 희정님을 포함하여 여러명이 송주님을 따라 한 후 병마게를 열었지만 그 간단한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합니다. 분명히 송주님처럼 그대로 했는데 막걸리가 샘솟듯이 솟구치는 게 아닙니까. 여기저기 막걸리가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막걸리따기 초보자인 다른 이들은 그렇다치고 마지막엔 송주님 막걸리까지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송주님의 비법이 통하지 않는 까닭은 이곳이 '술이 샘솟는' 시천주(詩泉酒)라 그런가 봅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연말에 어울리게 '선물 주고받기'를 했습니다. 단, 돈 주고 산 선물이 아니라 집에 있던 것이나 직접 만든 것, 내게는 필요를 다했지만 앞으로도 한참을 더 쓸 수 있는 생활용품들, 어찌하다보니 내 것이 되었지만 당최 나와 맞지 않는 물건들, 손수 농사지은 농산물, 직접 만든 음식 등 을 선물로 가지고 나오기로 했습니다. 헌 애인도 다시 살펴 새로 써야 하는 이 엄동설한에 '이젠 인연이 다해 다른 분께 소개해 줄만한 애인까지 선물로 가지고 나오라'는 엄명도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이날 모임엔 제가 녹지사에 나오고 난 후 제일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녹색대학 생태건축과 학생의 학부모인 문상열(노을빛바라기)님이 인천에서 오셨고, 안양에서 방과후공부방을 운영하는 민영은님과 앞서 소개했던 한국건강연대의 정혜승님이 새로 참석했습니다. 멀리 함양에서 후원회 운영을 맞고 계시는 녹색대학의 정미은님, 음악치료를 하는 이정은님, 녹지사 모임에 두번째 참석한 프로그래머 김소영님, 일산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김정옥님, 우리의 큰언니 이희정(흐르는 물)님, 서대문구에서 풀뿌리정치운동을 하는 박경난(꿈결)님, 아동출판사에 다니는 정철호(초로)님, 역사적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노재화(춤추는 들녂꽃)님, 바쁜 회의를 끝마치고도 참석한 권민서(꿈꾸는 느티나무)님, 철도청에 다니는 최명성(송주)님, 저 김성원(바람부는 길)을 포함하여 모두 14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서로가 나눈 선물들은 어느 선물가게에서도 살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직접 퀼트를 해서 만든 너무도 작은 방석모양의 열쇠고리, '기살리고, 몸살리고, 맘살리고'란 글귀가 쓰여진 재생노트, 직접 텍스타일 물감으로 무늬를 놓은 천 주머니,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예뻐했다던 퀼트 방석, 하나 더 있어 가져나온 사진기, 지리산에서 가져온 청국장 가루와 솔잎가루, 함양의 옆집 할머니가 만든 곶감, 식물과 꽃으로 만든 친환경 비누, 오래전 선물로 받았던 고급스런 일본 이쑤시개 셋트, 음식찌꺼기가 잘 끼지 않는 스테인리스 수채, 아직 결혼 안한 여 녹지사님 몫이 된 아기용 비누받이 오리인형, 2006년 책상달력, 그리고 포장을 뜯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몇몇 선물들이 우리가 함께 나눈 선물의 명세입니다.
녹지사들이 함께 그저 가지고 있던 손때 묻고 정성이 담긴 선물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신화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가 쓰고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번역해 내놓은 카이에쏘바즈(Cahier Sauvage ; 야생적 사고의 산책) 씨리즈 중 한권입니다. 꼭 한번 여러분도 읽어보십시오.
이 책은 북아메리카 포틀래치 인디언들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증여의 경제'를 소개합니다. '물질'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았던 아름다운 시대의 '경제'는 곧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와 '등가를 전제로 한 교환이나 거래'가 사실은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고 알려줍니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대부분 “증여의 원리와 함께 움직이던 여러 종류의 힘이 정지해버림으로써 초래된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포틀래치 인디언들은 신임 추장을 축하하고, 세상을 떠난 전 추장의 덕을 기리는 일종의 제의를 연다고 합니다. 제의를 주최하는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엄청난 양의 선물을 마련했고, 상대방 역시 그 답례로 같은 값어치의 선물을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되돌려 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에는 보이지 않은 '영혼'의 가치, 즉 증여하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담긴다고 보았기때문입니다. 또한 ‘물질’의 배타적 소유는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다고 믿었습니다. 포틀래치 인디언들이 “만물에는 영력(靈力)이 깃들어 있어 교환이나 증여가 이루어지면 영력도 물질과 함께 이동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물이 집단과 집단 사이를 옮겨 다님으로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력이 활발히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하지 않을 경우 영력의 유동이 정지해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12월 녹지사 모임의 '선물주고 받기'는 계산을 앞세워야 하는 자본주의적 교환이 아니었습니다. 다름아닌 '증여'를 복원하는 제의였습니다. 이날 준비한 대부분의 선물들은 '선물가게'에서 상품으로 산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주고 받은 선물들은 사연이 있고 정성과 마음이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등가, 즉 대등한 값어치를 기대하지 않고 나눈 선물이었습니다. 이날 참석한 녹지사들은 선물 속에 사랑과 만물 속 영력이 깃들어 유통되는 '증여의 경제'를 체험한 것입니다. 물론 부도덕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상무 사이 이루어진 증여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12월 녹지사 모임을 ''詩같은 나눔'이 있던 시간이라 말한 것입니다.
이글을 빌어 녹지사 모임자리에서 제게 침을 놔주신 박경난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날 제가 받은 가장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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