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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짐의 현상이나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신학적으로 규명해주고 있는 자료입니다. 생명샘교회 서울목회자성경연구회 자료실에서 퍼 온글입니다. (김형곤)
프란시스 맥너트,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예영수 역, 예루살렘, 1995
존 윔버 목사의 사역을 쫓아 다니며 연구해 온 정신과 의사 존 화이트 박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는, 교회가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겁에 질려 피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부흥의 은사를 보내 주실 때 그것을 개닫지 못한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부흥운동은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아예 거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단지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해서 권능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권능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다름아닌 악의 세력이 부리는 고도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두려움은 교회 구석구석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이요, 쇠약케 하는 불안이며, 그리고 그 불안 때문에 정작 전진과 공격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진동할 때 우리의 양 속은 힘없이 풀려있고 양 발은 꾸물거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모순, 즉 이 시대의 단면을 보게 된다.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들은 쓰러지는 현상이 순전히 심리적인 작용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치유사역을 위해 안수하는 목사들에게 행여 사람들을 쓰러뜨리게 하는 상황은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동시에 심리학자들에게는 그 현상이 심리적인 것이 아닌지 알아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정신과 의사와 인류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교회가 우리 문명의 서구적, 과학적,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치게 물들어 이러한 현상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과학이 사람들에게 경고해 주기를 바라고, 과학은 종교가 하나님께 더 의지하고 긴장을 풀 것을 권하다니! P11-12.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대부분은 (모두는 아니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또한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놀랍고도 신비한 광경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안식을 경험하는 사람은 자아의 주장을 포기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포기하고 싶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러길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쨌든 성령의 권능에 압도된 사람들의 모습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간의 나약함을 보임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매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지남에 다라 영ㅈ거인 현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육체적인 현상이 차츰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처음에는 그 권능에 육신이 압도되었다가 시간이 흘려 그 일에 익숙해지면, 즉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면 그런 외적인 반응은 차츰 사라진다는 것이다. 화이트 박사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맨 처음에는 조절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차차로 조절하기 쉬워진다. 바울이 우리에게 확실히 말해주듯이, 방언으로 말을 하고 예언의 말을 하는 것(성령이 주신 은사를 행사하는 것)은 기독교인 당사자의 의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시겠지만 언제 입을 열 것이냐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고전 14:32)
반복적으로 은사가 나타나는 것 역시 당사자의 의지로 조종할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그렇게 된다. 이것은 원할 때 은사를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는 당사자가 임재현상을 자제시킬 것인지 혹은 나타나게 할 것인지 선택할 수가 있다. P36-37
우리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상상 외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쓰러짐을 통해 삶 전체를 변화시킬 만큼 예수님과 획기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쓰러짐을 통해 회개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더욱 큰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치유함을 특히 영적인 치유함을 받고, 도 누군가는 악령들에게서 해방된다. 무두가 영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사 못하더라도 일단 쓰러지면 하나님의 능력을 반드시 깨닫게 된다. P 39
일부 신학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체험을 구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체험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삶의 어떤 시점에서 하나님을 아주 긴밀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정말 도움이 될 것이다. 나중에라도 메마른 광야같은 시기가 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느꼈던 때를 기억한다면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할 때 그렇게 일단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이라고 난 생각한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덤불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바울은 땅바닥에 내던져지자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그를 에워쌌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그런 체험이 우리의 삶에 지속적인 효과를 주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물론 안 그럴 때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정도의 모순은 우리 인간의 삶에 흔한 일이 아닌가? 영감이 넘치는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순간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을 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영구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P 47
내가 가장 흥미있게 읽은 구절은 역대하 5장 13-14절 말씀이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런 현상이 있기 바로 전에 제사장들은 모두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나? 단순히 너무 안개로 싸여 어두워서 볼 수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제사장들이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었던 것인가?
존 윔버 목사의 헤로게이트 대성회 연구에 대한 루이스박사의 책에서는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무게감’이라고 설명한다. 그 예로 어느 남자는 ‘양 팔과 머리르 fdkfo로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를 느꼈다고 한다.
하나님 영광을 뜻하는 히브리어(kabod)는 의미상 그 어원이 ‘무게’ 또는 ‘물질’이다. 거 깊이 조사해보니 여기서 말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현상과 실제로 똑같은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몇몇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체험과 관계되는 이릉ㄹ 말할 때 ‘구름’이니 ‘안개’니 하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잿빛 안개가 깔리더군요 -- 의자 반쪽을 가리고, 화장대도 희미하게 가리고, 거울만 안개 너머로 살짝 보였어요 -- 그때 질씨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곳에 주님의 님재하심이 강하게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나 실제 그대로여서 -- 난 안개 때문에 가구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의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 현상이라고 결론을 지웠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는 종종 ‘구름’으로 인식되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집, 곧 주의 성전에는 구름이 가득 찼다. 주의 영광이 하나님의 성전을 가득 채워서, 구름이 자욱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은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표준새번역) P 85-86
웨슬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도록 해야 한다.” P 105
또 분명한 것은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은 특별한 능력, 즉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배심원 앞에서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을 변론하는 변호사처럼 설교를 하는 피니조차 하나님의 권능에 압도당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피니의 체험은 존 웨슬리가 말하는 ‘물줄기 같은 사랑의 파도’가 그의 전신을 씻기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 이후에 웨슬리는 목회를 시작했다. P112
존 윔버 목사도 다른 설교자들처럼 처음에는 그런 현상에 반대했다. 그가 처음 그런 장면을 본 것은 1979년 그가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부흥강사가 설교할 때였다. 그 강사는 이렇게 설교를 맺고 있었다고 윔버 목사는 말한다.
“이것으로 내 말씀의 증거를 끝내겠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교회는 성령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억제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시도록 갈망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기다렸다. 기대와 염려로 가득한 분위기였다. 그때 그 목사님은 “성령이여, 강림하시옵소서”라고 했고 성령님께서는 정말 오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방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강사 목사님은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기도를 해주었는데 기도를 받은 사람들은 즉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쓰러졌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하나님, 네가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주세요’라는 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여파가 가라앉은 후 신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제직들은 아주 당혹해 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후 몇 달간 초자연적인 현상은 계속 일어났다.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자연발생적으로 계속 일어났다. 새로운 활기가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령 체험을 하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들은 -- 쓰러지거나 몸을 떨다가 평온해져서 가만히 있거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 모두 자신들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훌륭한 체험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와말씀 읽기, 이웃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더해 가게 된 것이다.
5월에 시작된 부흥이 9월쯤에는 700명 정도의 새 결신자에게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3개월 반만에 1,700명 정도으 새 결신자에게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나는 교회성장의 전문가였지만 이와 같은 복음 전도 사역은 결코 본 적이 없었다. P114-115
윔버 목사의 다음과 같은 요약된 말은 개신교나 카톨릭 교회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영적 충돌이 벌어질 때 ‘교양있는 예절’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부흥 운동에 총력을 기울려야 한다. 20세기의 교회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시대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서은 질서나 조직이 약할수록 성령님께서 더 역사하시기 자유스러울 것이고, 질서가 강할수록 성령의 역사를 억제한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질서는 교회가 발전하여 성숙하며 그 사명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산 몸이다. 시체는 아무리 고도의 조직체라고 해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영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 많은 교회들이 잘 조직되어 있다해도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면 시체와 같을 것이다. 반면에 조직과 복잡성이 없는 아메바라고 하는 하나의 세포는 생명은 있지만 어떤 과업을 성취할 수는 없다. 지도력의 필요성을 외면하는 기도모임과 여러 기독교 단체들은 종종 이 아메바와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생명은 있으나 성취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할 수 있는 산 몸이다. 그 산 몸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질서정연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몸은 복음 선포와 제자의 도를 이루어 나가는 목표를 지닌 훌륭한 복합체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질서를 확립하시기 위해 우리의 것을 버리게 하신다. P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