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실현'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1. 노인 인구의 37%만 단순 노무직에 취업 …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진로 마련해야한다.
홍모(67세) 씨는 강동구 성내동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로 근무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빌딩과 아파트 일을 해 온 터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고 한다. “한때 쉬어 보기도 했어요. 그동안 노인정도 다녀 보았지만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집에서도 가장으로서 대우를 못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자녀들을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했고요. 일거리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으려니 힘들더군요.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 문의하고 6개월이 지나고서야 일을 겨우 얻었어요. 자식 3남매들은 내가 일하는 것을 썩 내켜 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취업은 자식들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어쨌거나 일할 만큼 충분히 건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능력이 있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는 178cm의 장신에 건강한 편이었지만 고령자 취업의 벽은 높았다고 털어놓았다. 홍 씨는 넉넉지 않은 자신의 월급(65만 원)으로 출가 안 한 자녀들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어서 그래도 행복하다고 한다. 하루 걸러 24시간씩 교대 근무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아파트 주민들과 지내면서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
하지만 홍 씨처럼 만족스런 일자리를 얻은 노인 취업자를 주위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탑골공원에 가 보면 기력있는 노인들이 많아요. 힘있고 의욕있는 노인 인력이 이렇게 많이 남아돈다는 것이 안타깝더라고요. 정부가 좀 더 나서서 속시원한 방안을 마련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2. 취업률 10명 가운데 3명 꼴
홍 씨의 바람은 이미 고령화 사회가 도래한 우리 사회 노인 문제의 한 정곡을 찌르고 있다. 노인들에게 ‘삶의 보람’을 찾는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지난 해 12월 현재, 55살 이상 노인 인구 712만 9,127명 가운데 취업한 노인(비농가)은 37%인 261만 5,000명. 게다가 취업 인구의 절대 다수가 55∼60세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60살 이상 노령층의 취업 현실은 심각할 지경이다.
노인 일자리는 태부족인데 젊은 노인들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노령 인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데다 정년 단축, IMF 이후 명예퇴직과 조기퇴직의 이름으로 ‘정리’된 젊은 노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젊은 노인들이 갑자기 늘어났다고 해서 그들을 위한 취업 기회가 그만큼 뒷받침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경비나 건물 청소, 관리 일 따위이다. 물론 그동안 정부가 고령자 적합 직종을 선정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고용주들이 원하는 직종은 단순 노무직들뿐이다.
연금 수혜 인구라야 65세 이상 337만 노인 가운데 국민연금, 공무원 연금 등 공적연금 혜택을 받는 사람은 28만여 명으로 전체의 8%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리고 연금도 현재 추세라면 내는 사람은 줄고 타는 사람이 늘어나 일정 기간 지나면 바닥 날 전망이다.
3. 힘 못쓰는 고령자 고용 촉진법
이런 상황에서 2020년이면 전 국민의 14%가 노인화가 될 전망이다. 이웃 일본과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노령화 사회를 대비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쏟아지는 노인과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대비하지 못하고 뚜렷한 대책없이 노인 문제를 악화시킨 데 대해 정부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최성재(55세) 교수는 “지금의 정부 정책은 가족들이나 노인 당사자들이 그냥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에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의 복지 수준치고는 밑바닥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정부의 노인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은 92년 7월 전격 시행된 고령자고용촉진법이 갖고 있는 한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법은 “사업주는 기준 고용률 이상의 고령자를 고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기준 고용률은 300명 이상 고용 업체에 3% 이상을 55세 이상 고령자로 고용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또한 고령자 취업을 위해 직업 훈련을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며 정부기관의 경우 고령자 적합 직종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채용토록 했다.
하지만 시행 9년이 지난 지금 고령자고용촉진법에 협조하는 업체는 전체의 3% 수준. 전문가들은 “이 법은 의무 조항도 아니고 어겨도 벌칙이 없어서 많은 기업들이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법규정 자체가 ‘요청’, ‘권고’, ‘노력’ 등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권장 사항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실질적인 취업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고용 기준을 의무조항으로 바꾸고 이에 대한 법적인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장애인은 기업들에게 강제성을 띄고 있지만 고령자는 아직까지 적극 장려하는 입장”이라고 밝히고 “고용보험을 통한 장려금 지원을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4. 우리를 물로 보지 마!
서울대 최성재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노인의 능력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웬만한 고령자가 아니면 노인도 비노인이나 마찬가지로 동등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이나 몇몇 국회의원들, 기업의 총수들은 모두 고령자들 아닙니까? 노인은 모두 약하고 능력도 없어서 쓸모없다는 편견은 이제 버려야 할 때입니다.”
기업이 침체기에 있을 때, 정리해고의 일차적 대상이 된 사람들은 중·노년 근로자들이었다. 그 이유는 비용 절감의 효과도 있었지만 나이와 직무 능력에 대한 편견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의 한 백화점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차관리에 노인들을 채용하여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요즘엔 일이 고되다는 이유로 모두 20∼30대 젊은이로 물갈이했다. 하지만 정말 노인들이 늙고 힘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을까. 인간행동연구소 김애순(55세) 전문위원에 따르면 “나이와 직무 능력과의 관계는 감각과 지각, 기억력, 지능, 학습 능력 등 연령 증가에 따른 인지적 능력의 변화와 상관이 있다”고 말하고 “둔화된 감각과 학습 능력의 감퇴는 적절한 학습 조건에서 재훈련을 통해 충분히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 전문위원은 “나이든 사람들은 책임감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나 수행 능력이 떨어지고 재훈련 효과가 적으며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나이든 사람을 꺼리는 이유는 부리기 어렵고 시대에 뒤진다는 생각 때문이죠. 이러한 연령 편견은 낮은 수준의 직업에서 더욱 심합니다”고 지적한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고령자 취업 적합 직종에서도 나타난다. 92년부터 2000년 10월까지 선정된 고령자 적합 직종은 총 77개. 초기에는 매표 검표원, 주차장 관리원에서 최근에는 창업 지원 컨설턴트, 인사노무 관리자 등 다양하고 고급 수준의 전문 기술 직종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아직도 다양성은 상당히 뒤진 상태다.
서울시 중앙 고령자취업알선센터(용산·마포 지역) 정미애 과장은 “하루 평균 30∼40명의 노인들이 전화로 일자리를 문의하지만 이들이 사무직이나 기술직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며 노인 취업의 어려움을 전했다. 고령자 취업센터에 들어오는 일자리는 주로 아파트 경비, 건물 청소, 주차관리 등 단순직이 대부분이라고. 더욱이 구인자들이 대개 60세 이상은 거리끼기 때문에 나이가 더 든 노인일수록 단순 노무직도 얻기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5. 일 자체에 의미를 두라
이제 어느 사회든지 모든 사람들이 상당한 기간을 은퇴 생활로 보내야 하고 이 시기가 인생의 한 단계로 정착되고 있다. 특히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 20∼30년 동안 지속될 남은 여생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퇴 후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70세 이상의 고령자까지 비록 일에 대한 동기는 다양하지만 일을 찾아 재취업 전선에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재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지위나 보수에서 눈높이를 낮추고 내재적 동기에서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즉 보수, 지위, 특별한 혜택에 집착하기보다 일에 대한 소신을 갖고 일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60세부터 노년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레 27:3∼7). 노인이 되면 몸에서 힘이 빠지고 치아도 약해지며 시력이 흐려진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쇠약해졌다 하더라도 노인은 풍부한 경험과 지혜(욥 12:12; 32:7)를 가진 존재로서 존경을 받았고 공경 받을 대상이었다(레 19:32).
그래서 이스라엘과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들 가운데서 장로의 직분을 감당했다(출 3:16; 행 14:23). 아브라함은 100세 때에 이삭을 얻었고 모세는 여든 살에 부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 다윗은 생의 후반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으로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노년은 또한 성전을 짓기 위한 준비의 삶을 보내기도 했다(대상 22:5).
어떠한 노년의 삶도 인간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누가복음 2장 21∼40절에 등장하는 시므온의 노년은 주님을 기다리고 만나고 증거하는 삶이었다. 얼마전, 유니세프가 발표한 것처럼 한국 청소년들은 어른 공경심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이것은 그동안 나이든 어른들을 홀대해 왔던 우리 사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건강의 문제로 육체가 쇠약해서 일을 못한다 하더라도 노인은 노년 자체로 우리 사회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노년기의 일은 자신의 생계와 여가 선용의 차원뿐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노인의 근로 문제는 그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매우 중차대한 문제다.
/신상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