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태국사태를 마무리하면서

70일전 깔끔한 붉은옷들을 입은 "레드셔츠"(UDD: 반독재 국가민주 연합전선)라 불리는 농민들이, 사실상의 적진인 수도 방콕으로 몰려왔다.
이들이 주장한 것은 의회해산하고 다시 총선을 실시하자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선거를 통하지 않고, 2008년 12월 노란셔츠 시위대의 공항점거 테러와 사법부의 친-탁신계 여당에 대한 해산명령에 뒤이어, 정계개편을 통해 등장한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의 정부는, 이들이 보기에 정당성을 결여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예 협상의사를 갖고 있지 않은 아피싯 총리의 태국 현 정부는 이들을 언제 학살할 수 있을지만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는 것을 --- 최소한 국내외의 이성을 가진 분석가들에게는 분명하게 보인 것임 ---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지구의 역사상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 이처럼 거의 모든 가능한 제안과 수단이 동원된 예는 찾아보기 쉽지않을 것 같다. 시위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자진해산 방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안을 했지만, 정부는 적절한 기회에 "총"으로 대답해주었다.
4월 10일에 "제1차 강제진압"이 실시되었지만, 27명 사망에 1,000명이 넘는 부상자만 남기고 실패했다. 이후로도 이들은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며 다시 한달의 기나긴 농성에 들어갔다. 광주민주화 항쟁과 비교할 때, 이들이 끝까지 총을 들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였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광주민주화 항쟁이 故 김대중 대통령 사건에서 자극을 받아 발생한 후 김대중을 넘어선 운동으로 변해간 것과 마찬가지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라는 촉매를 통해 촉발된 레드셔츠의 항쟁 역시, 탁신을 넘어서는 시민항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 19일 진압작전이 있기 직전, 5월 13일 밤 세댕(캇띠야 사왓디폰) 장군에 대한 저격을 시작으로, 이후로 꼬박 일주일간 정부군은 저격수들을 이용한 "인간사냥"을 펼쳤고, 이들의 붉은옷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흐르는 피가 그들의 옷이 되었다.
이 일주일간 약 50명이 사망하고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총상을 입었다. 그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학살이었다.

정작 진압작전에서는 10여명만 사망했고, 대규모 학살을 염려한 지도부도 자진해산한 후, 경찰에 투항했다. 레드셔츠 시위대 대부분은 순순히 해산하며, 해산 직후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부가 그들에게 제공한 버스는 관광버스가 아니라, 창문도 없는 낡은 버스들이었다.

태국의 레드셔츠 항쟁은 단순한 민주화 시위를 넘어선다. 이 사건은 "19세기적 봉건주의 집단 지배체제에 대한 믿음"과 "21세기적 보통의 사고관"이 충돌한 사건으로, 이는 거의 종교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의 세계관끼리의 충돌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드셔츠 시위대는 이 사건을 통해 지구의 역사에서 가장 처절하고도 기나긴 비폭력항쟁을 보여주었고, 이제 태국사회가 다시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도도한 물결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귀향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인간사냥에서 머리가 돌아버린 소수의 극-과격파만 남았고, 사실상 지역 불량배들이 주류인 "하드코어 레드셔츠"라 불리는 이 집단은 아름답던 방콕의 빌딩들 30여곳에 불을질렀다. 태국 정부는 이들을 거의 제압해나가고 있다.
이 항쟁기간 동안 2명의 외신기자가 총탄에 피격되어 사망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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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FP) 2010년 5월 19일, 주한 태국대사관 앞에서도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학살반대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그 어떤 언론매체도 이같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
(이번 사건에서 느낀 점)
1. 태국이 영토나 인구수에서 캄보디아보다 큰 나라답게, 이곳의 노란 극우파가 가진 학살광기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보는 학살광기보다, 그 규모와 잔학성이 가공할만한 수준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또 실제 계획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태국사태를 바라보는 한국인 네티즌(일부 교민 포함)의 의식수준이 참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인도주의와 같은 보편적 기준의 적용에 대해 엄청나게 망설인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태국 노란 나찌들의 기존 체제를 과감하게 옹호하거나, 혹은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비열한 방식으로 태클을 걸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들의 대부분은 입으로는
"중립"이라고 말한다. 혹은 자신이 "중립"이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도 또한 이런 자들이다.
이러한 네티즌 중에는 일부 교민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한국 정부기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도 존재하며, 이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과히 본 카페가 탄생하기 이전에 캄보디아
관련 한국어권 온라인 사이트들에서 "독재자 훈센 우상화"를 하던 것과 비교해서도, 그 규모 및
이성에 의거한 도덕성 결여 면에서 훨씬 심각한 수준을 보여준다.
3. 우리가 살펴본 것은 "태국사태"였는데, 결론은 엉뚱하게도 "한국사회의 미래가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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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록 레드셔츠의 항쟁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종결되었지만, 한국의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계기가 되어, 6.29 선언을 이끌어 냈듯이 이번 항쟁은 태국민 가슴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2달 이상을 태국사태에 매진했던 지기님과 단군반공님에게도 찬사를 드립니다.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태국시간 5월 21일 밤 8:50] 내용 증보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래도 일단 <레드셔츠 항쟁사건>은 끝났다고 봅니다. 이제 속편이 시작되면 그것은 다른 제목으로 새로출발해야겠지요 ^^ 우리가 이제 동남아시아는 아주 약간.. 알지 않습니까?? .. 권력과 관련된 것에서는 한치의 양보는 커녕.. 반드시 확인사살까지 하는 사람들인 거.. 잘 알고 있습니다.. ^^ 근데 그런 기질을 기득권층만 가진 게 아니기 때문에.. 심각한거죠.. 그냥 놔두세요.. 결국은 되빠꾸가 또 있는거니까요.. 갈수록 한심합니다... 태국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시 옛날 중국의 삼국지나 춘추전국시대.. 혹은 오다 노부나가-토요토미 히데요시-토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일본의 전국시대 수준의..
모든 수단(학살+암살+저격+여론조작+권모술수+매수 등등)을 다 동원한 싸움으로 봐야만 이해가 가는거죠.. 당연히 후속타가 있을겁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다루기로 하고~ ^^ 일단 제3막은 여기까지입니다.. ^^
[훈수 하나] 그나마 레드셔츠가 이번에 자신들의 힘을 확인한 게 굉장히 주효한 것 같습니다.. 일단 겉으로만 보면 레드셔츠가 전투에서 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 판이 깨지지 않는 한, 즉 태국의 현 기득권층이 .. 완전히 현행 헌정질서를 무시하고.... 미얀마식 군사정권을 출현시키지 않는 한, 결국 2년 안에 언젠가는 총선을 해야 하는데.. 그걸 레드셔츠가 승리할 가능성에 대해 일정 부분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정치판이 깨지지 않도록, 레드셔츠가 전술적 후퇴를 했다고 봅니다.. 즉 레드셔츠에게는 "후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제3막이 끝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향후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기득권층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충실히 하려면.. 판을 깨야한다고 보는데.. 즉 제가 노란셔츠 작전참모라면.. 기존의 판을 깨도록 어드바이스할 겁니다만... 이 판을 깨는게 이미 2006년 쿠테타에서도 나타났지만.. 왕실이라는 형식을 가진 채로는 근본적으로 판을 깨는 게.. 거의 불가능한거죠.. 즉 "왕실"이 다시금 쿠테타 후에 "총통 일가"로 탈바꿈하던가.. 아니면 왕실 없이 군사정권 지도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수밖에는 없는겁니다.. 그러니 기득권층으로서는 판을 깨려고 해도 쉽지가 않은겁니다. "왕실"이 일종의 딜렘마입니다.. 결국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은 난다고 봅니다
그리고 레드셔츠 입장에서 보면, 기득권층이 ..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로 판을 깬다면.. 그때는 "내전"을 선택하겠죠.. 그러니, 기득권층으로서는 내전으로 안가도록 판은 유지하면서.. 뭘 해보려고 하는데.. 최고로 길어도 2년.. 안그러면 6개월 안에는 ..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만 하는 구조적 상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기님 비롯한 여러 회원님들 안녕하세요! 지난 5/4~10 라오스 출장 다녀오고는 바로 내려와 아직까지 파타야에 머물고 있는 리차드입니다
파타야 분위기로는 쓰아뎅(네삐쳐, 붉은셔츠, 파타야에선 이렇게 부르더군요!)이 절대로 패배한 것은 아니라 생각되고,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언제 다시 부상할지만 기다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파타야 역시 촌부리도의 한 도시라 야간통금이 실시되고는 있습니다.
대부분 유흥업소는 밖으로는 문을 닫았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광란의 밤이 지속되고 있으며,
세븐일레븐, 패미리마트, 미니마트들 역시 신문지로 창문은 가렸습니다만,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구요!
안녕하세요 리차드님. ^^ 바쁘신 데 정보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오늘중에 향후 태국정국에 대한 세부분석 게시물을 하나 올릴겁니다.. 특히 박공 님께서 <그럴 것 같다>고 동의해주신 발언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보여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게시물을 작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태국문제는 일단 이번 국면은 어느 정도 정리한 상태에서... 상세한 분석은 오늘 올리는 게시물에서 끝장 댓글토론들 부탁드립니다.. ^^
인터넷이 자꾸 끊겨서 위 글도 세번 정도 설명하는 내용을 올리려 했는데, 다운...다운... 이거 댓글 달기도 쉽지 않은 파타야입니다.
수일내에 제가 파타야에서 보고 느낀 부분들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19세기적 봉건주의 집단지배체제에 대한 믿음과 21세기적 보통의 사고관 의 충돌,,
하~ 명문장입니다,,명문장,,
꼬르 님께서 칭찬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