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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15 강
不違道用(불위도용)이어다. ←14강. 道用이라고 하는 중요한 말씀 말씀이거든요. 道用이라는 것은 도를 쓴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수도하는 작용이라. 道用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데는 자세하게 이야기 아니해 놨는데요. 그 도용이라고 하는 것이 도를 닦는 사람의 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가섭존자가 초조가 돼서ㆍ2조 아란존자ㆍ3조 상나화수존자ㆍ4조 우바국다존자ㆍ5조 제다가 이렇게 쭉~~ 하니 傳燈(전등) 제23조에 학륵나존자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500마리의 학들이 항상 이 스님을 따라다녔다고 그래요. 이 스님이 가는 곳에는 학들이 500마리가 뒤에서 빙빙 돌기 때문에 멀리서도 대번 알아요. ‘아~, 학륵나존자 저기 계시는구나.’이렇게 알 정도입니다. 스님이 가는 곳 마다 이 학들이 죽어라고 따라다녀요. 어떤 면으로는 좋은 것도 같지만, 비 올 때 되면 그 학이 냄새가 나고 똥도 갈리고 영 안 좋거든요. 아무리 쫓아도 가지도 않고 학륵나존자 가는 곳마다 학 500마리가 따라다닌단 말입니다.
한 번은 마나라존자라고 하는 스님을 만나서, 자기 스님이지요. 만나서 물었어요. “저는 과거의 무슨 업으로 학 500마리가 이렇게 따라다닙니까?”그러니까 “네가 과거전생에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제자가 500명이 있었는데, 그 제자들을 놔놓고 네 혼자 저 용궁에 공양청정을 갔다.”는 겁니다. 전생에도 도력이 좀 있었던가 봐요. 용궁에 가서 공양을 받아서 자시고 오고 하니까 제자들이 알거든요.
‘우리 스님은 용궁에 공양청정을 간단 말이여, 그런데 우리는 안 데려 간단 말이여, 그 용궁 한번 구경도 하고 가 봤으면 좋겠데...’싶었는데 요즘 말로 데모를 떡~ 합니다.
스님한테 사서 절을 하고, “스님요, 스님이 항상 법문하시기를 於法에 平等者는 於食에 平等(어법평등자 어식평등)이라고, 법에 평등한 사람은 먹는 데도 평등하다고 했고, 於食에 平等이면 於法에 平等이라. 먹는데 평등한 사람은 법에도 평등하다고 늘 안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요즘 어떻게 스님이 말씀하고 실지하고 영 안 다릅니까?” 이러거든요. 진짜 입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역할을 하거든요. 입이 설법, 법문도 하고 또 입으로 먹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제가 외국을 다녀보니까요. 어느 나라든지 가서 그 나라 음식이 탁 입에 맞게 되면, 맛있게 되면 그 나라 말을 잘 하게 돼요. 외국 사람들요? 한국에 와가지고 김치깍두기 된장 “아 맛 좋습니다. 맛 좋습니다.” 하게 되면 한국말 제법 잘 하는 겁니다. 처음 와가지고 김치깍두기 “아~~ 맵다.”하고, 된장 “아~~이구 냄새납니다.”하면 그것은 영 한국말 모르는 겁니다. 그런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입에 맞게 되면 그 나라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 보고 너희들 영어 잘 하려거든 햄버거 부지런히 먹으라고 그러지요.
“햄버거를 부지런히 먹으면서 하게 되면 영어가 훨씬 낫게 된다.”
입이라는 것이 於食아닙니까? 食아닙니까? 於法은 말하는 것이 법이거든요. “於食에 平等하면 於法에 平等하고, 於法에 平等하면 於食에 平等이라. 이라더니 스님이 어째서 용왕궁에 혼자가십니까?” 이러니까 할 말이 없거든요. “그러면 나를 따라 한 번 가자.” 그러고 상수제자 보고 “내 가사 자락을 잡으라.”나머지도 전부 그 사람들 가사 자락을 잡은 겁니다. 가사 자락을 잡으니까 눈 감으니까 찰라 간에 전부 용왕궁으로 갔어요. 가니까 음식을 차려놓는데 어마어마하거든요. 뭐가 뭔지도 알 수가 없고, 촌사람이 일본 요리집에 가니까 시보리, 시보리하니까, 시보리라는 소리가 손 닦는 물수건 달라는 소리인데 이 사람이 뭘 아나요? “어이 나도 시보리 한 그릇” 그랬다고 하듯이 모르거든요. 음식인지 소금인지 알 수가 있나요?
음식이 쭉 차려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한 그릇 먹긴 먹었는데 당장 복이 감해가지고, 이 사람들이 용궁 음식이 자기네가 감당할 음식이 못 되어요. 다음 생에 학이 됐어요. 학은 아무리 부지런히 먹어도 양을 못 채운 답니다. 학 목이 길잖아요. 식도가 기니까 부지런히 주워 먹어도 배까지 들어가는 동안에 다 소화가 돼버리니까 배가 찰 새가 없어요. 언제든지 양이 반 밖에 안 찬답니다.
鶴食半量千年壽(학식반량천년수)라. 학은 음식을 반만 양을 채우기 때문에 천년을 산다고 그럽니다. 양을 배가 부르게 자꾸 먹으면 기계를 모두 무리시키는 겁니다. 조금 적다. 더 먹었으면 싶을 때 그만 딱 끄쳐 버리는 것이, 그러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일본 사람 말로 언제든지 배가 8부쯤 되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좀 많다 싶을 때 한 숟갈 더 먹으면 그것이 그만 무리가 되거든요. 그 500제자가 다 학이 돼가지고 지금 이 스님을 따라다니는데, 그래도 자기 스님이니까 法恩(법은)이 중한 줄은 알기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23조 학륵나존자가 22조 마나라 존자를 만나가지고 “如何得脫矣(여하득탈의)닛꼬? 어떻게 하면 이 학들이 다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마나라 존자가 턱~ 하늘을 쳐다보고, 학들을 보며 하는 말이 나에게 깊고 깊은 한 게송이 있으니, 내 게송을 들으라.
心隨萬境轉(심수만경전)이나 轉處悉能幽(전처실능유)라.
마음은 만 가지경계를 따라서 굴러간다. 마음은 자성이 본래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없는데 그 경계를 따라서 마음이 바꿔진다 이 말입니다. 거울이 어디 뭘 아는 것이 있나요? 거울이란 것이 형상이 없거든요. 그런데 앞에 나타나는 그 형상을 따라서 거울에 모양이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안 그래요?거울에다 거울을 갖다 대면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런데 거울 앞에 붉은 것이 나타나면 붉게 나타나고, 검은 것이 나타나면 검게 나타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서 다 있지만, 轉處悉能幽라. 구르는 곳에 다 그윽하니 그 자취가 없다 이 말입니다.
隨流認得性(수류인득성)하면 흘러가는 곳마다, 認得性. 그 자성 그 자체를, 마음의 자체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니라.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스러울 것도 없느니라. 이 게송을 길게 빼서 노래를 불렀더니 학들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슬피 울면서 다 날아갔다는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於法에 平等하면 於食에 平等(어법평등 어식평등)이라고 아무리 했어도, 不違道用(불위도용)이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도의 작용에 어긋나지 말고, 지 분수를 지나치면 안 된다 이 겁니다. 언제든지 지 분수에 맞추어서, 떡~ 하니 자기 도에 맞추어가지고... 법정스님이 五觀偈(오관게) 번역한 것이 있지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나의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몸을 지키는 약으로 알아서... 그 오관게 번역 참 잘 되어 있지요. 그것 정신문화원 새마을 연수원 식당에 가면 크게 써서 붙여놨다고 하더군요. 정신문화원에도 붙여놓고요. 번역 잘 되었다고 정부에서 알아준다고 하더군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 음식을 받습니다. 마지막에 그랬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道用입니다. 五觀偈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道用입니다. 道用에 어긋나지 말아라. 또 이런 얘기도 있어요.
15조 가나제바존자가 범마정덕 장자의 집에 갔어요. 그 집의 정원이 엄청 크고 넓고 그래요. 그 정원 둥구나무에서 꼭 사람 귀같이 생긴 벌건 버섯이 나오는데 아주 부들, 부들부들한 것이 아주 좋아요. 그것을 따다가 요리를 해서 먹으면 꼭 고기 맛 같아요. 꼭 고기 맛처럼 맛이 좋아요. 그래서 늘 따다가 먹는데 다른 식구들 눈에는 안 보이고요. 범마정덕 장자의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입맛 없으면 가서 따다가 그렇게 해 먹어요. 어째서 그 버섯이 그렇게 맛이 좋고 자기 눈에만 보이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가서 따오라 하면 다른 사람은 없더라는 겁니다.
자기가 가면 따오거든요. 아주 먹음직스럽고 좋게... 그런데 그것이 그냥 나불나불나불 한 것이 고기 같아요. 그래서 이 가나제바존자 한테 물었어요. “그런 버섯이 나는데 그것 참, 무슨 버섯인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가나제바 말씀이 “과거에 이 집에서 중 하나를 공양물을 대준 적이 있지?” 그러거든요. 공부하는 스님한테 공양물을 대준 적이 있다 이 겁니다. “그런데 그 중이 그 공양을 받고 도를 통하지 못 했어요. 그러나 因果(인과)는 분명하게 아는 아주 참 진실한 중이었기 때문에 죽어서 버섯이 되어서 지금 그 빚을 갚고 있느니라. 지금 이 영감 나이 몇 살이지요?” “80입니다.”이러니까 “음~ 내년에는 끝나겠다. 81살이면 끝난다.” 이러거든요. 그리고 턱~ 하는 말씀이 게송을 읊으셨어요.
入道不通理(입도불통리)하면, 도에 들어와서
不通理하면 그 진리를 통하지 못한다면
復身還信施(부신환신시)라. 復身, 이 몸뚱이를 다시 하여 信施를 갚게 되느니라. 信施. 신도들의 시주물건을 도로 갚게 된다 이 말입니다.
長者八十一(장자팔십일)에 其樹가 不生耳(기수불생이)리라.
범마정덕 장자가 81살이 되면 其樹가 不生耳니라. 그 나무에서 귀가 나지 아니할 것이다. 귀는 버섯이란 말이거든요. 버섯이 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 게송을 읊었다 이 겁니다. 그래서 범마정덕 장자가 그 말에 너무 감복해가지고 발심을 해서 버섯을 따먹지 않고, 제발 그만 나시라고 나무한테 가서 절을 하고, 제발 그만 나달라고 그렇게 하고 아들을 출가 시켰다는 겁니다. 출가 시켜가지고 가나제바존자의 제자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전등 제15조 가나제바존자. 거기에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다 이런 얘기를 듣고 이런 것을 보고 不違道用(불위도용)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道用에 어긋나지 말아야 된다.
어떤 중이 탁발을 하러 갔는데 그 집 아이가 쌀을 한 말을 퍼다 주거든요. 너무 많이 주거든요. 쌀을 받으려고 하니까 그 집 영감이, 그 아이 할아버지가 있다가 “쟤가 집안 망하겠네, 웬 탁발을, 한 바가지만 주지 그렇게 한 말을 퍼다 주느냐? 중아, 준다고 그걸 다 받아 가느냐?”그리고는 조금만 줬어요. 아이가 시무룩 해있거든요. “생각을 해 봐라. 네가 알뜰하게 살림을 살아야지 중한테 그렇게 많이 퍼주면 집안이 어떻게 되느냐?” 이러니까 그 아이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는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릅니까? 그 중이 이거 먹고 얼마 안 있으면 죽어가지고 우리 집에 황소가 될 것인데...” 황소 한 마리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황소 한 마리 놓쳐버렸으니 씨나락 아까워서 농사 안 지어가지고 가을에 거둘 것 없는 거와 한 가지 아닙니까?” 이러거든요. 그 아이 참 영악한 놈이지요?
그래서 釋子가 皆成佛(석자개성불)하면, 중이 다 성불하면
野無一犢子(야무일독자)라. 들판에 송아지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소는 거의 다 중의 身이랍니다. 그래서 소들이 다 착하거든요. 소는 거짓말도 안합니다. 소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혓바닥이 길거든요. 길어서 콧구멍을 푹푹 쑤시잖아요. 하나도 공짜배기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不違道用(불위도용)이어다. 道用을 어기지 말지어다.
어떤 스님은 탁발을 하러 가니까 거사가 있다가
“무슨 탁발을 하러왔소?”
“보리 탁발을 하러왔습니다.”
“그래 스님 보리는 어쩌고 남의 보리를 구하러왔소?”
“내 보리는 덜 익어가지고 익은 보리 좀 구하러왔습니다.”
“익은 보리는 어떻고 선 보리는 어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익었고, 들에 것은 덜 익었습니다.”
‘이 중 어지간 하다...’ “보리 탁발해다가 법당하나 지으려고요.”
“아, 그래요? 법당하나 짓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한천 냥 들어야지요.”
“그래요? 내 내지요. 아무개야~~” 일꾼들을 불러가지고...
옛날에는 돈 천 냥이면 장부 열 짐 져야 됩니다. 100냥이 한 짐이거든요. 엽전 꿰 놓으면 100냥이면 빠듯하게 한 짐입니다. 천 냥 이면 열 짐 져야 되거든요. 일꾼들을 열 명을 불러가지고 “이 스님께 져다 드려라.”그 스님은 돈 천 냥 얻어가지고 껄떡껄떡 가다가 바로 조금 나가니까 장터거든요. “나 집에까지 갈 것 없다. 여기 부려라.”장바닥 한복판에다 부려놓고 보신탕이고 국밥이고 입에 닥치는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여기 장바닥 사람들 다 먹으라고 울력 좀 하자고... 밥 당기는데 울력 하라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한테 막 먹였어요. “아이고 내 배 부르니까 돈이 필요하다.”면 “아 돈 주지 까짓 것.”한 웅큼 씩 그저 막 줘 버리고...
돈 천 냥, 열 짐 부어 놓으면 산더미 같을 것 아닙니까?
막 막막 막 다 주는 겁니다. 일꾼들이 보고 기가 막히거든요. 법당 짓는다고 가져가다가 장바닥에 부어놓고 막 흩어대니까 와서“아이고 나리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 났느냐?”
“아, 아까 그 중이 법당 짓는다고 하더니 장바닥에다 놔놓고 사람들 다 퍼 먹입니다.” “네가 알 바가 아니니라. 그냥 둬라.”
실컷 며칠 먹으니 돈 다 떨어졌거든요. 배는 두둑하고 며칠 잘 먹어 놓으니 얼굴이 번들번들 하거든요.
또 왔어요. 또 오니까
“법당 다 지었소?”
“예, 법당은 다 지었는데, 법당구경 안 갈래요?” 주인이 있다가,
“어디 봅시다.” 하니까 배때기를 쑥 내놓고 법당 이만하면 튼튼 안하냐고... “법당 이만하면 됐는데 부처를 모셔야 되겠으니까 부처 모시러 갑시다.” 이러는 겁니다. “그래요? 갑시다.” “부처 모시러 가자.” 그 소리에 그냥 당장 거사가 눈이 멀어버렸어요. 그리고 이 중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어요. 그 소리 끝에 그냥 하나는 앉은뱅이가 되고, 하나는 눈이 멀어가지고... 앉은뱅이가 또 앉아서도 재주는 부릴 줄 알아서 홀짝 영감 등에 올라타가지고, “눈도 없는 영감아, 다리는 성하니까 가자.” 이래가지고 영감상투를 잡고 “자, 왼 쪽으로.” 하면 왼 쪽으로 가고, “오른 쪽으로.” 하면 오른 쪽으로 가고, 그래 고개 너머로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답니다.
그거 다 도인들입니다. 그것은 완전 道用을 요새말로 마스터한 사람들입니다. 열반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한, 觀이 자재한 사람들입니다. 도인의 경지는 그랬다고 그러거든요. 어떤 중은 신도 물건을 많이 먹고서 소가 돼버렸어요. 소가 되어서... 항상 먹으면서
“信施難消(신시난소)인데, 신도의 시주물건을 녹이기가 어려운 것인데 능히 녹이겠느냐?” 아~, 만날 能消(능소)라 하는 겁니다.
능히 다 녹일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래 나중에 소가 되었거든요. 소가 되어서 꺼떡꺼떡 하는데 그 도반 스님도 역시 도인이니까 “이래도 네가 能消냐?” 이러니까 “능소능소” 소가 이러더랍니다.
다 능히 녹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다 不違道用(불위도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말하자면, 범부의 경계에 있어서는 항상 受施를 如受箭(수시여수전)하고, 신도의 물건을 받는 것은 화살을 받듯이 하고,
進食에 如眞毒(진식여진독)이니라.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 독약을 먹는 것과 같이 생각하라. 이랬거든요. 빚 짖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不違道用얘기입니다. 음식 얘기는 이쯤 하고요.
赴焚修(부분수)호대 須朝暮勤行(수조모근행)하야
自責懈怠(자책해태)하며 知衆行次(지중행차)하야
不得雜亂(부득잡난)하며 讚唄祝願(찬패축원)호대
須誦文觀義(수송문관의)언정 不得但隨音聲(부득단수음성)하고
不得韻曲不調(부득운곡부조)하며 瞻敬尊顔(첨경존안)하야
不得攀緣異境(부득반연이경)이어다.
赴焚修(부분수)호대, 赴 =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일어나서 걸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달아날 走(주)했잖아요. 달아날 走자가 쫓아간다 이 말이거든요. 들어 눴다가 벌떡 일어나서 쫓아간다 이 말입니다.
焚 = 수풀 林(림)밑에 불 火(화)했으니까 태운다는 소리고요. 숲을 불태운다 이 말입니다. 修 = 닦는다는 뜻이니까 익힌다는 뜻이고요.
닦는다는 말은 익힌다는 뜻입니다. 계속 습관을 들인다는 뜻이거든요. 焚修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것 같으면 예불하고 기도하고 하는 그것이 焚修거든요. 焚은 향불을 사루고 촛불을 사루고, 촛불을 켜고 향불을 태우면서 떡~ 수행에 노력하는 것이 赴焚修지요. “예불하고 誦經(송경)하고 기도하러 가는 시간을” 이 말입니다.
옛날 스님들은 목탁만 쳤습니다. 화두만 챙기고요. 종도 그래요.
종도 꽝~~ 치고 가~~ 만~~ 히~~ 화두 챙기다가 또 종만 꽝~~ 치고 그래요. 묵언 종. 목탁도 묵언목탁... 본래 염불이라고 할 적에는 부처를 念(념)하는 것이지 誦(송)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송불이 아니거든요. 口佛(구불)이라는 소리 어디 있나요? 송불이 어디 있나요?
염불이지요. 생각으로 통하는 것이지 입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것입니다. 입으로는 겉껍데기이고, 생각으로 통하는 것이 진짜 하는 것입니다. 염불ㆍ송불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송경ㆍ예불 그런 것이 떡~ 하니 讚唄(찬패) 하는 그것이 예불인데 옛날 스님들이 그런 말씀을 했어요.
聞鐘聲臥不起(문종성와불기)하면, 종소리를 듣고 누워가지고 일어나지 아니하면, 來生에 受蛇身(내생수사신)이니라. 내생에 뱀 몸을 받을 것이다. 알았나요? 그러니까 종소리 들으면 덮어놓고 번개같이 일어나라 이 겁니다. 5분 더 들어 누웠으면 뭐합니까?
맨날 ‘종 다 쳐 가면 일어나지...’ 하고 있다가 잠 더 들어버리거든요. 때르릉 시계 해놓고 때르릉 하면 벌떡 일어나야지요.
赴焚修(부분수)호대 須朝暮勤行(수조모근행)하야 自責懈怠(자책해태)하며, 아침이나 저녁이나 부지런히 행해서 스스로 해태를 꾸짖을 것이며, 자기 게으름 노릇 하는 것 자꾸 꾸짖고, ‘아이 내가 이래선 안 되지.’그래야 된다 이 말입니다.
知衆行次(지중행차)하야 不得雜亂(부득잡난)하며, 대중이 행하는 次를 알아서 잡난 하지 말 것이며, 雜亂이라고 하는 것은 막 뒤섞여가지고 어지러운 것이 잡난 인데, 옛날에는, 지금도 옛날 절 제대로 된 법당에 가면 사자 위에 둥그런 막대기가 있고, 그 위에 연꽃 잎사귀가 되어있고, 그 위에 북이 있습니다. 그것이 법고라고 해가지고 북ㆍ징ㆍ광쇠(꽹가리)ㆍ바라ㆍ요령ㆍ목탁. 이렇게 다 순서대로 되어있습니다. 거기서 제일잽이가 요령잽이가 제일이고요. 그 다음에 꽹가리치는 사람이 상수 잽이 이고요. 그런데 절 집안에서는 요령잽이가 상수 잽이입니다. 요령 하는 사람이 짱 짱 짱 짱 짱 따르르륵 이렇게 흔들 때 언제든지 목탁은 요령에 맞춰서 쳐야 되는 겁니다.
요령에 맞춰서 쳐야 되는데 목탁 치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요령이야 어찌 흔들든가 말든가 막 들이 두드려 제키면 각각이어서 안 되거든요. 요령 흔드는 사람이 염불을 시작하면 거기에 다 따라 해야 되는 겁니다. 송경이 여러 가지니까 반야바라밀다심경 하면 다 거기에 따라 해야 되고 나무 동방해탈주 세계허공공덕 하면 거기에 다 따라 해야 되는 것인데, 남은 반야심경 하는데, 이 사람은 나무 동방해탈주 하면 되겠나요? 안 되지요. 우리가 그대로 순서대로 따라 하는 것이 雜亂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스님들은 바라치고 마지 줬을 때 그 분들이 다 나타나거든요.
바라 치는 사람ㆍ징치는 사람ㆍ꽹가리 치는 사람ㆍ요령 흔드는 사람ㆍ목탁 치는 사람ㆍ북치는 사람ㆍ이것이 다 있어요. 다 제 자리 잡아가지고... 欲建~~~ 曼~~ 陀~ 羅先~ 誦(욕건만다라선송). 이것은 만다라를 세우고자 할 때에 先誦. 먼저 외운다 이 말입니다. 무엇을 외우느냐? 정법계 진언을 먼저 외운다 이겁니다. 욕건만다라 라는 것은 그건 제목입니다. 만다라를 세우고자 할 때에 먼저 정법계 진언부터 송하라. 이 말입니다.
욕건~~~ 만~다~라선~송 여기는 한 사람 상수잡이가 하고, 그 다음에 정~ 법계 진~언 옴남 할 적에는 일제히 두드리는 겁니다. 북은 북대로 두드리고 광쇠는 광쇠대로 바라는 바라대로 철거덩 철거덩 쾅 쾅 꽹꽹 꽹 한몫 치거든요. 그것이 요새말로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대로가 교향악입니다. 그래가지고는 香水眞言(향수진언)ㆍ運心供養眞言(운심공양진언)할 적에 또 그렇게 해요.
운~~ 심 공 양 진 언 願~ 此 香 供 遍 法~~ 界~~(원차향공변법계) 普 供 無 盡 三 寶 海~~(보공무진삼보해)할 적에는 막 신납니다. 바라는 바라대로, 징은 징대로 신바람 나지요. 이래가지고 아침에는 사성제에다가, 향수에 사성제에 전부 두드려 대는데 하루 신명이 그냥 거기서 다 풀어지는 겁니다. 아침저녁 六時禮佛(6시예불)하는 거기에서, 예경하는데서 모든 신명이 풀어져요.
이조 500년간 斥佛崇儒(척불숭유)정책에 의해서 중들을 얼마나 억압을 했는지, 중들 억압한 것이 아마 세계사적으로, 한국같이 중을 억압한 나라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불교가 그대로 유지가 된 것은 양반 상놈 그것 때문에 그대로 유지가 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양반가운데서 서출들이 있잖아요. 서출들이 학문도 높고 머리도 좋고요. 그러나 출세를 못하니까 다 중 돼버리거든요. 중 돼가지고 학문은 높지 머리는 좋지 그러니까 그 가운데서 진실하게 공부한 사람은 도인 나오고, 안 그러면 거기서 땡초들도 그 가운데서 천지빼까리로 나오고요. 속인들 애먹이는 놈들도 나오고요. 스님들은 양반 상수들 보면 찍사하게 두드려 패고요. 그런 사람들, 괴각쟁이들 많거든요.
서출이니까 출세를 못하고, 글도 좋고 참~ 이런데, 머리 좋고 그런데 출세를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떡~ 절에서... 속인들이 와가지고 스님들 제법 문자 쓴다고 “입사에 모아허니 화초전고? 절에 어찌하여 화초가 없는고~?”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스님이 떡~ 한다는 소리가 “靑山에 有鳥(청산유조)하니 부력이로다.” 청산에 새가 있으니 그 새 이름은 부력이로다.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말입니다. 시러배 잡놈아 누가 오라고 하더냐? 부력이라고 하는 것이 소쩍새를 부력이라고 하잖아요. 탁~ 나오면 중은 그냥 대번에 詩로 받아버리는 겁니다. 절 집안에 그런 중들이 꽉 찼었거든요. 이조불교는 그랬어요. 그래도 세상에 나가면 출세 못하고 하니까 불평불만이 꽉 차가지고 있는 세상이었지만, 이조 500년간 그 척불정책으로 말미암아가지고, 그렇게 콱~~ 그냥 억압을 당했어도 그래도 중노릇 잘한 스님들도 많잖아요.
신심이 있고 중노릇 잘한 스님들도 있고 절 집안에 그렇게 농땡이들도 천지백빼까리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다 승화시키기 위해서 북 장구, 예식으로 말미암아서 징ㆍ바라ㆍ꽹가리. 釋門儀範(석문의범)이 전부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석문의 범 전체가 전부 반주를 맞추게 되어있는 겁니다. 석문의 범 대회 참이 있잖아요. 지심정~~례~공양~~ 대 방 광 불 화 엄 경 화장장엄세계해 불가~설불가설마니보운장엄 쭉~~ 나갈 적에 아주 음성 좋은 사람이하면 공중에 뜨는 것 같거든요. 소리가...
韻曲(운곡)을 고르지 않게 하지 말고, 雜亂(잡난)하지 말고,
讚唄祝願(찬패축원). 讚唄라는 이것이 찬불가와 같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어긋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須誦文觀義(수송문관의)언정, 글을 외울 적에 뜻을 觀할지언정
不得但隨音聲(부득단수음성)하라. 음성만 따르지 말아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염불을 하는데 귀신이 떡~ 와서 들으니까, 영가가 와서 들으니까 아이 이거 뭐 염불은 아니 하고 목탁만 똑딱 똑딱 똑딱 두드려요. 은행나무 발우대(똑딱 똑딱), 은행나무 발우대(똑딱 똑딱) 자꾸 이러기만 하고, 또 요령 흔드는 사람은 요령 흔들며 제경행상 책(딸랑 딸랑), 제경행상 책(딸랑 딸랑) 자꾸 이러거든요.
‘이 사람들이 미쳤나? 염불하면서 왜 제경행상은 왜 자꾸 들먹이나?’諸經行相(제경행상)이라는 것이 요새로 말할 것 같으면 불교사전하고 한 가지입니다. 옛날에 사전 역할을 한 것이 제경행상이라고 하는, 붓글씨로 촘촘히 써서 삼천대천세계에서 수미산세를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갖가지 불교의 낱말 풀이를 전부... 요새 사전과 같은 것이지요. 사전이 낱말 풀이 아닙니까?
죽은 사람이 해인사 강원 학인인데 장경각 뒤에 잣나무에 올라갔다가 뚝 떨어졌거든요. 그 때 학인들은 잣나무가 되게 높으니까 이 잣나무에서 저 잣나무로, 내려와 가지고 또 올라가려면 귀찮으니까 이 잣나무에서 저 잣나무로 건너뛴단 말입니다. 건너뛰다가 한 놈이 뚝 떨어졌어요. 그런데 밑에 가랑잎이 쌓이고 해놓으니까 몸이 부러지지는 않고 기절을 해서 죽어버렸지요.
죽어서 자기 속가에 가니까 식구들이 전부 골치 아프다 하고 드러눕거든요. ‘참 이상스럽다.’ 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동네에서 개꿈 물리는 할머니가 바가지에다 김치국밥을 풀어가지고 살살 오더니 지한테 와서 대가리에 확 덮어씌우더니 부엌의 칼을 가지고“이 눔의 개코야 안 나갈래? 하거든요. 아이고야 깜짝 놀라서 쫓아 나와 버렸어요. 나와 가지고 ‘에이 빌어먹을 놈의 집, 내가 생전 안 올 것이다. 중 된 놈이 뭣 때문에 집에 왔나? 내 집이라고 찾아 왔더니 사람대접을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쫓겨왔습니다.
한참 절에 오다보니까 청춘남녀가 꽃밭에서 개골개골 개골개골 어떻게나 춤추고 노는데 신바람 나게 놀거든요. 그 뒤에 있는 처자 하나가 쫓아와가지고 스님도 나하고 놀자고 끌고 가거든요.
‘아이고 내가 중인데 어찌 끌려갈 수 있나?’싶어가지고 기어이 안 간다하니 “앗따 그 중 젠장 간 작아가지고 평생 중노릇 밖에 못하겠다.” 하고 욕하거든요. 욕하든가 말든가 그냥 왔어요. 얼마를 오니까 웬 처녀가 기다리고 있다가 또 붙들고 늘어지는데 안 논다하고 그냥 오는데 선비들이 노루를 잡아다가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막 떼어서 먹으면서, 요새말로 바비큐를 해서 먹으면서 한참 들이 마시면서 “어 대사, 여기 와서 한잔 먹고 가라” 고 막 그러거든요.
“아이고 중이 어찌 그런 것을 먹을 수 있나?”하며 그냥 왔어요.
절에 오니까 요령 목탁을 두드리는데 은행나무 발우대 제경행상을 찿는다 말입니다. ‘이상하다.’저~ 뒤에 열반당 간병실에 가니까 꼭 지 같은 사람이 드러눴거든요. ‘야, 꼭 나 닮았네. 이상한 사람이 드러눴네’ 하면서 가서 “야” 턱 건드리니까 그만 탁 깨났어요. 지금까지 전부가 꿈입니다. 그래서 큰 방에 가서 물 한 그릇 먹고, 자기 친구한테 “니 왜 아까 자꾸 은행나무 발우대를 찾았나?” “니는 왜 자꾸 제경행상 찾았나?” 하니까 ‘내가 염불을 해줬으니까 그 사람 발우대는 은행나무 발우대인데 그것은 내가 차지해야지.’ 그 생각만 했다는 겁니다. 그 생각한 것만 들리는 겁니다. 입으로 염불하는 그것은 안 들리는 겁니다. 소용없어요.
그래 誦文觀義(송문관의)를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글을 외우면서 그 뜻을 관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청년들이 한잔 먹고 누각에서 놀던데를 가니까 왕탱이들이 전부 왕탱이, 벌집이 있어서 벌들이 왱~ 날라가 가지고 나비 메뚜기 같은 것들을 쏘아서 잡아가지고 끌고와서 매달아 놓고 뜯어 먹고 하는 것이 있더랍니다. 처녀가 붙들고 늘어지던 데를 가보니까 뱀 한 마리가 턱~ 똬리를 틀고 있더랍니다. 청춘남녀들이 꽃밭에서 놀던 데를 가보니까 비단 개구리들이 개골개골 울고 있더랍니다. 거기에 들어갔으면 거머리가 되는 것이지 별 수 있나요?
그러니까 영가의 세계는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須誦文觀義(수송문관의)언정 不得但隨音聲(부득단수음성)하라. 뜻을 딱~ 관해야 됩니다.
四陀羅尼(사다라니) 變食眞言(변식진언)할 때 나막살바다타~ 아다바로기제 옴 삼바라 삼바라 훔 나막살바다하 할 때, 밥 한 그릇이 일곱 그릇으로 변하는 것을 탁~ 관을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두 번째 할 적에는 일곱 그릇이 또 일곱 그릇 씩 마흔 아홉 그릇이 되잖아요. 또 하면 그것이 7배로 변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小食(소식)이 多食(다식)으로 변하는 것은 變食眞言이다 이랬거든요.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제일 첫째 주문의 힘이 있고, 觀想力(관상력)이 있고, 우리가 관하고 생각하는 그 觀想力. 셋째는 三寶(삼보)의 無生神力(무생신력)이 있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신력으로 말미암아서 소식이 다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물 한 가지를 天見琉璃人見水(천견유리인견수).
하늘 사람들은 물이 유리궁전으로 보인답니다. 사람은 물로 보이는데... 魚不見水鬼見火(어불견수귀견화)라. 고기들은 물을 보지를 못해요. 우리가 공기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고기들은 물을 못 봐요.
鬼見火라. 귀신은 물을 불로 본답니다. 반대로... 그러기 때문에
甘露水眞言(감로수진언)을 쳐야만 물을 마실 수 있어요.
감로수진언을 안치면 영가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욱 더 一字水輪觀眞言(일자수륜관진언)· 乳海眞言(유해진언) 유해진언을... 전부 우유와 같이 영양가 있는 그런 물이 되라는 말이거든요. 四陀羅尼를 반드시 觀을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보통 중 100명이 하는 것 보다 도력이 있는 한 사람이 하는 것이 낫다는 이유가 그것이고, 도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해도 가만~~히 앉아서 觀만 해줘도 된다는 겁니다.
不得韻曲不調(부득운곡부조)하며, 韻曲을 고르지 않게 하지 말고, 그러니까 목탁고리든 음성이든 요령 흔드는 사람을 항상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무시하고 지 멋대로 고함지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瞻敬尊顔(첨경존안)하대, 부처님 얼굴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턱~ 쳐다볼 때, 不得攀緣異境(부득반연이경)이어다. 다른 경계에 攀緣하지 말아라. 다른 경계에 끄달려 가지 말아라. 망상심을 다른 데로 가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딱~ 하게 정성을 다하라 이 말입니다.
망상 피우지 말아라 이 말이지요. 정념으로 대하라 이 말입니다.
정념으로 대하면 바로 보이거니와, 망념으로 볼 것 같으면 반대현상이 나타난다. 거꾸로 보인다.
망념은 탐진치. 욕심이 앞에 가려놓여 있으니까, 이 눈은 볼록한 렌즈인데 욕심은 잡아 당겨서 지가 가지려고 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오목 렌즈다 이 겁니다. 볼록렌즈와 오목 렌즈가 마주치면 피사체가 반대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동그란 것하고 오목한 것하고 같이 마주쳐보세요. 피사체가 거꾸로 나타나게 되어 있잖아요.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꿈에 똥 보면 그것이 그 이튿날 돈이 생긴다고 그러잖아요. 돈이 사실은 똥 보다 더러운 것입니다. 문둥이도 만지고, 페병환자도 만지고, 에이즈환자도 만지고, 온갖 사람이 다 만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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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隨流認得性(수류인득성)하면 無喜亦無憂(무희역무우)니라.ㅡ자성 그 마음의 자체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스러울 것도 없느니라._()()()_
心隨萬境轉이나 轉處悉能幽라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니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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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心隨萬境轉 轉處悉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마음은 만 가지경계를 따라서 바뀌어진다. 흘러가는 곳마다 마음의 자체를 알아 얻을 것 같으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근심스러울 것도 없느니라.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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