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공화국"(République Khmère)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가 "민주 캄푸치아" 정부를 수립하면서 멸망하는 비운의 정권이다.
1. 배 경
1970년 10월 9일 공식적으로 수립이 선포된 크메르공화국은, 1970년 3월 18일 무혈 쿠테타를 통해 국가수반이었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을 실각시킨 론 놀(Lon Nol) 장군과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왕자가 이끈 우익 친미 군사정권이었다. 이 쿠테타의 주된 이유는 노로돔 시하누크 공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서 북-베트남 군대의 활동을 묵인하여, 캄보디아 북동부의 광활한 지역이 사실상 중무장한 베트남 공산군에 장악되도록 내버려둔 데 있었다. 쿠테타의 또다른 원인으로는 시하누크 공의 적개심이 가득찬 반미주의로 인해 그 여파로 발생한 심각한 경제난에도 있었다.(주1)
이미 노로돔 수라마릿(Norodom Suramarit) 국왕의 서거와 함께 사실상 왕위가 궐위된 상태가 상당 기간 계속되던 중인 캄보디아 왕국은, 시하누크의 실각과 함께 공식적으로 공화국으로 변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권의 성향은 우익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성향은 특히 시하누크 치세에 암묵적 협력관계에 있었던 북-베트남 및 베트콩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캄보디아를 베트남전쟁의 와중에서 남-베트남과 동맹을 맺도록 변화시켰다.
"크메르공화국"은 국내에서는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ront Uni National du Kampuchea: FUNK)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 세력은 실각한 시하누크와 그 지지자들, 그리고 "캄푸치아 공산당"(CPK: 훗날의 크메르루즈)이 연합한 광범위한 세력이었다. 이 반군의 명칭은 "캄보디아 인민민족해방군"(Cambodian People's National Liberation Armed Forces: CPNLAF)으로 불렸는데, 당시 캄보디아 동북부지방을 남-베트남과의 전쟁용 군사기지로 장악하고 있던 "북-베트남 인민군"(PAVN)과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지원을 받았다.
크메르공화국은 강력한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가졌고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 및 재정원조를 받았지만, 그 군대인 "크메르국군"(Force Armée Nationale Khmère: FANK)은 그다지 훈련도 잘 받지 못한 상태였고, CPNLAF은 물론 북-베트남 인민군이나 베트콩을 물리치지도 못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공산반군이 프놈펜을 함락시키면서 크메르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주1) Milton Osborne, Sihanouk, Prince of Light, Prince of Darkness. Silkworm 1994. |
2. 1970년의 쿠테타
시하누크 공 자신은 아 쿠테타가 그의 오랜 정적으로서 망명 중이던 우파 민족주의자인 손 웟 탄(Son Ngoc Thanh), 캄보디아 왕위 경쟁에서 패배해 불만을 품고있던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왕자, 그리고 보다 친미적 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연합해 일으킨 것이라 주장했다.(주2) 물론 론 놀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미군 조직들, 특히 육군 특수부대(Army Special Forces) 일부가 쿠테타 세력을 훈련시키고 도움을 주는 데 일조하긴 했지만, CIA가 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주3)
시하누크가 프랑스를 방문 중일 때, 프놈펜에서는 반-베트남 폭동이 발생하여, 북-베트남 및 NLF 대사관이 약탈당했다.(주4) 이 폭동은 당시 총리였던 론 놀 장군과 부총리였던 시릭 마딱 왕자에 의해 방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12일, 론 놀 총리는 NLF에로의 무기 밀수 창구였던 시하눅빌 항구를 폐쇄하고,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즉 모든 PAVN 및 NLF 병력들은 캄보디아 영토에서 72시간 안에 철수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군사적 대치에 직면하게 되리란 것이었다.(주5)
이는 북-베트남 군대의 활동을 부분적으로 묵인했던 시하누크의 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는데, 론 놀은 국가수반을 실각시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심한 갈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에 시하누크가 북-베트남에 대해 보다 큰 압력을 가하길 원했다. 그는 시릭 마딱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쿠테타를 염두에 두고 있던 시릭 마딱은 론 놀을 설득하기 위해, 시하누크가 파리에서 행한 기자회견 녹음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이 테이프에서 시하누크는 프놈펜으로 돌아가면 이 두 사람을 처형할 것이라 위협하고 있었다.(주6) 하지만 론 놀 총리는 확신을 하지 못했고, 결국 시릭 마딱 왕자와 다른 세 명의 장교들이 론 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결정적인 문서에 서명토록 했다고 한다.
3월 18일 국회에서는 인 땀(In Tam)의 주도로 투표가 진행되었고, 시하누크를 실각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론 놀은 긴급상황이란 배경을 등에 업고 국가수반의 권한을 획득하게 되었다. 3월 28일과 29일에는 몇몇 지방에서 시하누크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하지만 론 놀의 군대가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주7) 또한 시위로 인해 론 놀의 동생 론 닐(Lon Nil)을 포함한 많은 관료들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외국의 정부들은 이 새로운 정권의 지지도에 대해 긴가민가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론 놀 정부와 계속해서 협상에 나서, 취소된 무역협정의 원상복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얼마 안 있어 실패로 돌아갔다.
(주2) Norodom Sihanouk, My War with the CIA, Pantheon, 1972, p.37.
(주3) Kiernan, B., How Pol Pot came to power, Yale UP, 2004, p.300.
(주4) Shawcross, W. Sideshow: Kissinger, Nixon, and the Destruction of Cambodia, New York: Washington Square Books, 1981, p.118.
(주5) Sutsakhan, Lt. Gen. S. The Khmer Republic at War and the Final Collapse Washington DC: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7, p.42.
(주6) Marlay, R. and Neher, C. Patriots and tyrants, Rowman & Littlefield, 1999, p.165.
(주7) Kiernan, p.302. |
3. 크메르공화국 수립 선포와 FANK의 성립
이 쿠테타로 발생한 즉각적인 변화 중 하나는 1970년 4월-6월 사이에 미군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군대(ARVN)가 캄보디아 동부지방(일명 "앵무새부리")으로 들어와 "캄보디아 작전"(Cambodian Campaign)을 펼친 것이다. 이 작전은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던 북-베트남 군대와 베트콩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공산군대는 서쪽으로 후퇴하면서 캄보디아 영토 보다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또한 일부는 북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론 놀 정부에 대한 중이던 반군들을 돕기 시작했다.
(사진) 캄보디아의 스노울(Snuol)로 진입 중인 미 육군 제11기갑수색연대의 모습. ☞ 확대사진 바로가기
론 놀 정부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캄보디아의 영토를 침입한 것이라고 즉각적인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후에 당시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보였던 알렉산더 헤이그(Alexander Haig)에게, 결과적으로 자국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통보했다. 헤이그 보좌관보는 미국 지상군이 캄보디아 육군을 지원할 수 없음을 밝히고, 대신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에 따라 원조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하자, 론 놀은 공개적으로 눈물까지 보였다.(주8)
10월 9일 군사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시하누크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시하누크 치세의 군주제를 상징하는 인물인 그의 모친 시소왓 꼬써막 니어리리엇(Sisowath Kossamak Nearyrath) 왕후에 대해서는 가택연금에 처했다. 시하누크의 부인인 노로돔 모니니엇(Norodom Monineath)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에 처했다.(주6)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권은 "크메르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그 헌법은 1972년에 가서야 채택한다.
한편 이 사이 시하누크는 공산반군들과 연합하여 베이징에 근거지를 둔 망명정부인 "캄푸치아 민족통일왕국정부"(GRUNK)를 결성하고, 론 놀 정부 타도를 부르짖고 나섰다. 그는 론 놀을 "완전한 바보"라 부르고, 시릭 마딱에 대해서는 "비열하고, 기만적이며, 저질적인 사생아"라고 혹평했다.(주9)
시하누크 치세에는 중립정책을 표방하여 왕립 육군 병력이 35,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크메르국군(FANK)으로 재조직 되면서 이미 1970년 말경에 15만명선까지 확대된다. 이는 당시의 반-베트남 정서와 맞물려 론 놀을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인물로 본 수많은 자원입대자들 덕분에 가능했다.(주10) 미국 역시 군사원조 및 훈련지원을 했고, 크메르세레이(Khmer Serei) 군대에 대해서는 베트남 남부의 군사기지에서 훈련을 시켜주기도 했다.
론 놀의 합동참모부는 경제에 미칠 심각한 영향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FANK를 20만명 수준까지 늘리라고 지시했다. 또한 테오도르 마탁시스(Theodore C. Mataxis) 장군이 이끄는 미국의 "캄보디아 주재 군사장비보급팀"(MEDTC)은 보급망의 혼선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캄보디아 군대에 "육군의 미국화"를 요구했다.(주11)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소테나 페르난데스(Sosthene Fernandez) 장군이 지휘하는 FANK는 부정부패로 인한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지휘관들의 유령병력 등재를 통한 월급수령과 군사적 무능력이 골칫거리였다. 당시 군사부문에서 은퇴했다 론 놀의 설득으로 13여단장으로 복귀한 독립운동 반군출신의 노로돔 짠따라잉서이(Norodom Chantaraingsey) 왕자만이, FANK 지휘관 중에서 유일하게 관할지역을 평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4번 국도와 끼리롬(Kirirom) 고원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외의 대부분 지휘관들은 군사적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개별 병사들의 용맹함에도 불구하고, 공산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작전인 "첸라 원 작전"(Operation Chenla I)과 "첸라 투 작전"(Operation Chenla II)이 심각한 패배로 귀착되고 말았다.
(주8) Shawcross, p.163.
(주9) Marlay, p.166.
(주10) Kiernan, p.303.
(주11) Shawcross, pp.190-194. 미국은 공문서를 기존에 사용하던 프랑스어나 크메르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했다. 이는 병참 하사관들을 필리핀인들로 고용해야 함을 의미했다. |
4. 크메르공화국의 정치사
친 시하누크 및 공산 반군들, 그리고 북-베트남 군대와 맞선 "캄보디아 내전"과 별도로, 크메르공화국은 심각한 내부 문제도 안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하누크 치세를 거치면서 확실하고 경험많은 정치적 지도자들이 드물었다. 그리하여 크메르공화국은 시작부터 내분과 갈등에 휩싸였다. 특히 론 놀과 시릭 마딱 사이의 권력투쟁이 두드러졌다. 론 놀의 건강이 악화되어 시릭 마딱 왕자가 총리 대행을 맡았는데, 그 업무방식이나 왕가와의 관계 등이 론 놀을 분노케 만들었다. 한편 젊은이들과 도시주민들 사이에서는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에 대한 회의가 점차로 자라나고 있었다.(주12)
1971년 4월 론 놀이 하와이의 병원에서 퇴원해 귀국하면서, 그는 사임을 하여 내각 내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이는 정부해체를 위한 수순이었고, 특히 군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그의 동생 론 논(Lon Non)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비록 "총리서리"란 직함으로 시릭 마딱이 총리 대행을 계속해나가긴 했지만, 상당한 진통 끝에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1971년 10월 16일 론 놀은 국회의 입법권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헙법을 입안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가 무정부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인 땀 및 400명 승려의 항의시위를 불러일으켰다.(주13)
(주12) Leifer, M. Selected Works on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p.418.
(주13) Sorpong Peou, Intervention and Change in Cambodia, 2000, p.52. |
4.1. 1972년 : 시릭 마딱의 제거
1972년 3월 론 놀과 그의 동생은 간신히 시릭 마딱을 권력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시릭 마딱이 반체제 학자 께오 안(Keo An)을 파면한 직후, 론 놀의 동생 론 논은 시릭 마딱의 하야를 촉구하는 학생시위를 조직했다.(주14) 시릭 마딱은 사임했고, 외형적으로는 그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주15) 이 위기를 이용하여 론 놀은 국가수반인 쩽 헹(Cheng Heng)을 밀어내고 그 직책을 스스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시하누크의 오랜 정적이었던 손 웟 탄을 총리로 기용했다.(주16)
같은 해 론 놀은 대통령 선거 실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인 땀과 친-시하누크파로 알려진 께오 안이 후보로 출마할 것을 발표했고, 그들이 사퇴 권유조차 거절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주17) 비록 론 놀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부가 론 놀 지지파로 출범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 선거는 현 체체에 상당한 불만세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공정한 선거가 치뤄졌더라면, 인 땀이 승리했을 것이다.(주17)
1972년 내내 정치적 상황은 안정되지 않았다. 시소왓 시릭 마딱 왕자가 이끌던 "공화당"과 인 땀이 이끌던 "민주당"은 9월의 국회의원 총선을 보이콧했다. 그리하여 론 놀의 "사회-공화당"이 전 의석을 싹쓸이했다. 수도에서는 테러범들의 공격이 증가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차례는 손 웟 탄에 대한 공격이었다.(주18) 손 웟 탄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시릭 마딱 왕자가 운영하던 신문사를 폐간시킨 것인데, 이후 손 웟 탄은 강제로 해임당한 후 베트남 남부로 망명을 떠났다. 이후 총리는 온건 좌파였던 항 툰 학(Hang Thun Hak)으로 대체되었다.(주19)
"크메르공화국"이 내분으로 약화되고 있을 때, 이미 "첸라 1"과 "첸라 2" 작전에서 크메르국군(FANK)과 여러 교전경험을 갖고 있던 북-베트남 군대는, 조용하고도 서서히 캄보디아 영토 내로 모습을 보였는데, 주로 병참과 지원 요원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이 활동하던 지역은 친-시하누크 및 공산반군으로 이뤄진 "캄보디아 인민민족해방군"(CPNLAF)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시골지역 민중들은 친-시하누크 성향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시하누크가 반군들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하자 반군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주14) Kiernan, p.347.
(주15) Kamm, H. Cambodia: report from a stricken land, Arcade, 1998, pp.110-112.
(주16) Kiernan, p.347.
(주17) Clymer, K. J. The United States and Cambodia, 1969-2000, Routledge, 2004, p.55.
(주18) Clymer, p.65.
(주19) Kiernan, p.348. |
4.2. 1973년 : 휴전과 국회 임기의 연장
1973년 초에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조인된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은 캄보디아 내전에 일시적 휴전을 안겨다 주는 것으로 보였다. 비록 FANK가 지상전에서 열세인 상태였지만, 론 놀은 이 기회에 일방적인 휴전 선언을 했다. 이 시기엔 실제로 크메르루즈 온건파였던 호우 유온(Hou Yuon)과 크메르공화국 사이에 접촉이 있기도 했다.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협정을 준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북-베트남의 관심은 크메르루즈의 두드러진 승리보다는 전쟁의 보다 물밑에서 남-베트남 군대를 움직이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데 있었다. 하지만 크메르루즈 지도부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1973년 2월 7일 밤, 크메르루즈가 포위된 껌뽕 톰(Kompong Thom) 시의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전투는 재개되었다.(주20) 4월이 되자 FANK는 대부분 지역의 전투를 포기하고 수도 방어에만 몰입했고, CPNLAF은 전국 각지로 진격을 개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미국은 론 놀로 하여금 보다 확대된 지지기반을 획득하라고 강요하면서,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압력을 가했다. 미국이 요구한 조치에는 친미주의자 시릭 마딱을 복귀시키고 론 놀의 동생인 론 논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주21) 4월 24일 론 놀은 국회 임기의 연장과 함께, 자신을 포함해 시릭 마딱, 인 땀, 쩽 헹으로 구성된 "고위정치위원회"의 포고령을 통해 통치를 하게 될 것이라 발표했다.
프놈펜으로 진격 중이던 CPNLAF 군대는 미공군의 폭격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폭격이 훗날 크메르루즈의 잔혹한 만행이 발생하는 데 일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을 정도이다.(주22)
(주20) Clymer, p.65.
(주21) Clymer, p.71.
(주22) Shawcross, p.293. |
4.3. 1974년 : 우덩의 함락
1974년 초, 론 놀은 다시금 "고위정치위원회"를 제껴놓고 독자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군사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공산반군은 바로 프놈펜 코앞에 있는 옛 도성 우덩(Oudong 혹은 Odongk)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그곳에서 공무원과 교사들을 처형하고, 거주민들을 시골로 강제 소개시켰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호전되어 FANK는 우덩을 탈환해 떤레 삽 호수의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4.4. 정권의 종말
이에도 불구하고 "크메르공화국"은 1975년의 건기 공세를 견뎌내지 못했다. 공산반군은 수도를 포위했고, 전쟁기의 프놈펜 인구는 급격하게 불어나 있었다. 극도의 미신 신봉자였던 론 놀은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헬기를 이용해 마법의 모레를 도시 주변에 뿌리게 했다. 이무렵 FANK 병사들의 전의는 높았고 크메르루즈 병사들은 심지어 FANK 군대의 사상자수보다도 많은 피해가 발생하면서 낮은 사기와 말라리아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중국에서 보급되는 새로운 탄약과 무기들이 "크메르공화국" 군대의 마지막 저항선을 제압할 원동력으로 작용했다.(주23)
시하누크와 론 놀 사이의 직접대화 제의가 몇 차례 오가긴 했지만, 론 놀의 제거가 대화의 전제조건이 되어 성사되질 못했다. 중국주재 프랑스 대사 에띠엔 마낙(Étienne Manac'h)은 크메르루즈 소속 병사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소작농 출신 병사들을 이탈시킬 수도 있는, 시하누크 공의 국가수반직 복귀를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975년 4월 1일, 론 놀은 사임을 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FANK는 거의 붕괴되었다. 시릭 마딱 왕자, 롱 보렛(Long Boret), 론 논 및 몇몇 정치인들이 수도에 남아 휴전협상을 중비하는 가운데, 크메르루즈는 4월 17일 프놈펜에 입성했다. 이들이 불과 며칠만에 구 정권의 많은 지도자들을 처형하면서 "크메르루즈"는 신속히 종말을 고했다. "크메르공화국"이 존속했던 시기는 비교적 짧았지만, 이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매일 평균 100만 달러 정도의 군사, 경제 원조를 받았다.(주24)
"크메르공화국"의 최종적인 종말은 당렉산맥(Dângrêk Mountains)의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에서 맞이했다. FANK 병사들은 이곳을 4월말까지도 사수하고 있었다.(주25) 크메르루즈는 이곳을 5월 22일에야 최종적으로 접수할 수 있었다.
첫댓글 다소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현대사 연표를 만들기 위해선 검토가 필요한 자료네요...
짧은 시기에 많은 사건들이 겹쳐 이해하기가 쉽지 않네요. 시간을 갖이고 천천히 살펴보아야만 조금 이해가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