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訖解尼今紀(흘해니금기)
五年 木豕 正月 帝與后滯雪于桃山 三日 始幸南桃 賜酺百官仙巫 康世伊伐飡 朋姬稟主 乳良力引其弟而茜公入点 故遂援康世 乃其同虎也
5년 木豕(목시, 甲戌, AD374년) 1월, 帝(제)와 后(후)가 눈에 가로막혀 桃山(도산)에서 3일동안 머물렀다. 비로서 南桃(남도)에 행차하여 百官(백관)과 仙巫(선무)에게 酺(포)를 하사하였다. 康世(강세)를 伊伐飡(이벌찬)으로, 朋姬(붕희)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乳良(유량)이 그의 동생 而茜公(이천공)을 끌어 들여 入点(입점)시켜서, 그래서 마침내 康世(강세)를 도우니, 곧 그의 同虎(동호)였다.
*狗(구) = 戌(술) 이므로, 木狗(목구)가 되야 함. 원본의 오기. 개띠.
*拔=> 援 으로 수정.
*AD374년은 신라본기 내물 19년에 해당.
二月 倭王移書絶交
2월, 倭王(왜왕)이 글을 보내와, 絶交(절교)하였다.
*신라본기 訖解尼師今(흘해이사금) 36년, AD345년.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湌 二月 倭王移書絶交
36년(AD345년) 봄 1월, 강세(康世)를 伊伐湌(이벌찬)으로 삼았다. 2월, 倭王(왜왕)이 글을 보내와, 絶交(절교)하였다.
*AD374년- AD345년= 29년 편차.
三月 神后生帝女方丹
3월, 神后(신후)가 帝(제)의 딸 方丹(방단)을 낳았다.
七月 日千伊伐飡 石勝稟主 日千乃山公之同年 石勝亦被山公之寵 故点之也
7월 일천(日千)을 이벌찬으로 석승(石勝)을 품주로 삼았다. 일천은 산공(山公)과 同年(동년)으로, 석승 또한 산공(山公)의 총애를 입어 그런 연유로 점지되었다.
八月 命柰勿行嘉俳
8월 내물(柰勿)에게 명하여 가배(嘉俳)를 행하게 하였다.
九月 命元太后崩 春秋六十八 葬于元上陵 國公碧解欲殉之 帝以太后遺命禁之 帝以無母后 迎光元宮主爲母后
9월 명원(命元)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68세였다. 원상릉(元上陵)에 장사를 지냈다. 국공(國公) 벽해(碧解)가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왕이 태후의 유명으로 금지하였다. 왕이 모후가 없음으로 광원(光元)궁주를 모후로 맞아들였다.
六年 靑豕 正月 虎夫伊伐飡 羽皇稟主 羽皇公兌母軟凰與其奴羽介通而生也 美而善歌舞 公兌夫日骨愛之 如己出 公兌異母兄日千亦愛之相通 公兌責之 曰 “吾之妹兄 忍通之乎” 日千慙之 乃與其嬖虎夫易而妻之 石勝羽皇 皆以美色 得寵於山公及帝 而得主 非公兌所引也 然羽皇事公兌如父 曰 “吾無父 以兄爲父事” 無大小皆問於公兌 而決之 故政事 公平得治 人稱其賢
6년 靑豕(청시, 乙亥, AD375년) 1월, 호부(虎夫)를 이벌찬으로 우황(羽皇)을 품주로 삼았다. 우황은 공태(公兌)의 어머니 연황(軟凰)과 그의 아랫사람 우개(羽介)와 통하여 낳았다. 아름답고 가무를 잘하였다. 공태의 아버지 일골(日骨)이 사랑하여 그의 자식과 같이 대우하였다. 공태의 다른 어머니의 형 일천(日千) 또한 사랑하여 상통(相通)하였는데 공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여동생과 형이 통하니 참을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일천이 부끄러워 이에 그가 귀여워하는 호부와 처를 바꾸었다. 석승(石勝)과 우황은 모두 미색으로 산공(山公)과 왕에게 총애를 얻어 품주가 되었다. 공태가 끌어들인 바가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우황이 공태를 아버지와 같이 섬겨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가 없으니 오빠를 아버지처럼 섬기겠다.”라고 하였다. 크고 작은 일에 모두 공태에게 묻지 않고 결정함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정사가 공평하게 다스림을 얻었다.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二月 以奈勿公子爲副君 奈勿以末仇子 娶神后女道留 寵愛甚隆 常置左右 竟相烝報 帝知后意 而立爲副君
2월, 奈勿公子(내물공자)를 부군(副君)으로 삼았다. 내물은 말구(末仇)의 아들인데 신후(神后)의 딸 도류(道留)에게 장가들어 총애가 심히 융성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결국에는 서로 증(烝)하여 보답하였으며 왕이 후의 뜻을 이해하여 부군으로 세웠다.
四月 倭寇風島進圍金城 待其食盡 康世出擊大破之 虜其酋夫妻 而獻之 禮生宮生帝子河期
4월 왜구(倭寇)가 풍도(風島)에서 나아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그 식량이 떨어지를 기다렸다가 강세(康世)가 출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그 우두머리 부부를 사로잡아 바쳤다. 예생(禮生)궁주가 왕의 아들 하기(河期)를 낳았다.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37년, AD346년.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湌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 追擊走之
37년(AD346년)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 강세(康世)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칼날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AD375년- AD346년= 29년 편차.
七月 杞公伊伐飡 玄宝稟主 玄宝與帝同牛 而杞公與虎夫同馬 帝及山公虎夫 皆点之也 玄宝本以汗聖妻 又媚于杞公 而再主 玄宝杞公 皆出於雲己之孫 其骨甚微 而色美 而妖言 故能至顯達 杞公之母星杞 與玄宝之母玄雲 爲從姉妹 而皆有殊色 被味鄒帝寵幸 而生杞公 爲人至仁好施 淡而無欲 且善於花鳥 所居多眞果異禽 而人有求之 則不問貴賤 而與之 又往其家 敎之以方 時稱花鳥王子 至是身爲冡相 而不問國政 玄宝專之 時星杞之從孫弘白 新除臨汀千戶 將赴任所 杞公冒雨 在野人家移花 徒跣在泥中 弘白拜辭于泥中 杞公問何往 弘白曰 “蒙叔父之恩 新除千戶 而去” 杞公曰 “吾不知之也 必汝叔母之爲也 幸善愛民 無負聖恩” 弘白曰 “愛民之道 何如” 杞公曰 “汝我在此泥中 則民可保矣” 弘白乃之任 至誠愛民 曰 “叔父泥敎在耳 邑果大治”
7월, 기공(杞公)을 이벌찬으로 현보(玄宝)를 품주로 삼았다. 현보와 왕은 같은 우도(牛徒)의 무리이고 기공과 호부(虎夫)는 같은 마도(馬徒)의 무리였다. 왕과 산공(山公)과 호부 모두 기공을 점지하였다. 현보는 본시 한성(汗聖)의 처였으나 기공에게 아첨하여 다시 품주가 되었다. 현보와 기공은 모두 운기(雲己)의 손자녀이다. 그 골품이 심히 미약하나 미색으로 요염한 말을 잘하여 그런 연유로 능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기공의 모는 성기는 현보의 어머니 현운(玄雲)과 종자매(從姉妹)사이로 모두 뛰어난 용모를 가졌는데, (성기는) 미추제(味鄒帝)의 총애를 입어 기공을 낳았다. 사람됨이 어질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담백하고 욕심이 없어 또 꽃과 새를 기른 것을 잘하며, 사는 곳에는 진과(眞果, 복숭아·매화·야자 따위)와 특이한 날짐승이 많았다. 사람들이 구함이 있으면 귀천을 묻지 않고 함께 하였으면 또 그 집에 가서 기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당시 사람들이 화조왕자(花鳥王子)라고 칭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스스로 (국정에) 어두운 재상이 되어 국정에 대하여 묻지 아니하였다. 현보가 국정을 오로지 하였는데 당시에 성기의 종손(從孫) 홍백(弘白)이 새로 임정천호(臨汀千戶)의 벼슬을 제수 받아 장차 임지로 나아가려 하였다. 기공이 비를 무릅쓰고 야인(野人) 집의 꽃을 옮기고 있었다. 무리들이 맨발로 진흙탕에 있었는데 홍백이 진흙탕을 공손히 사양하였다. 기공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홍백이 말하기를 “숙부의 은혜를 입어 새로이 천호벼슬을 받아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였다. 기공이 말하기를 “나는 모르는 일이다. 필시 너의 숙모가 한일일 것이다. 다행히 애민(愛民)한다면 성은(聖恩)에 빚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백이 발하기를 “애민하는 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기공이 말하기를 “너와 내가 진흙탕 속에 있지만 백성을 편안히 지켜주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홍백에 이에 그 임지로 가서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였다. 말하기를 “숙부는 진흙탕을 가르쳤음이 있었을 뿐이지만 마을은 결과로 큰 다스림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麗與扶余大戰于水谷
麗(고구려)는 扶余(부여)와 水谷(수곡)에서 크게 싸웠다.
十一月 近肖古殂 謹須立 遣發亥弔之 日骨角干薨 年七十七 公日知帝寵孫也 寬厚有宰相器 羊徒奉之爲君 而不偏于一邊 撫愛 四徒不使爭妬 故良夫常稱其賢 公亦以子公兌學于良夫 曰 “吾雖生汝 無可敎汝之道 良夫以仙道敎汝 是眞汝父也” 至是公兌泣 曰 “吾父口不言道 身自得道者也”
11월, 近肖古(근초고)가 죽고, 謹須(근수)가 섰다. 發亥(발해)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일골(日骨)각간이 77세로 죽었다, 공은 일지제(日知帝)의 총손으로 관후(寬厚)하고 재상의 그릇이었다. 양도(羊徒)가 군(君)으로 봉하였으나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었다.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4개의 선도무리로 하여금 시새움하여 싸우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 연유로 양부(良夫)가 항상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공은 또한 아들 공태(公兌)를 양부에게 배우도록 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너를 낳았지만 너의 도를 가르침은 옳지 않다. 양부가 너에게 선도(仙道)를 가르쳤으니 진짜 너의 아버지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공태가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는 입으로 도를 말하지 않았으나 제 몸으로 도를 얻은 자이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 AD375년.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AD37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順道(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海東(해동)의 佛法(불법)의 시작이다.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AD375년.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冬十一月 王薨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30년(AD375년)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七年 火鼠 正月 捺烏伊伐飡 長生稟主 捺烏與杞公同馬 而長生狗徒 故后使副君点之也 長生三姬之異父妹也 聰明多才医藥卜筮 無不通之 且善歌舞 初爲捺己(烏의 잘못)妻 尋慕世己 奔于世己 生子女數人 而捺烏不妬之 曰 “吾妻才高 非世己則不可配 吾無才 爲其奴亦足矣” 世己名望漸高 人多以奪人之妻非之 世己乃勸 長生歸捺烏 而長生泣 而不歸 公兌乃命世己與捺烏共妻之 副君以世己爲師 故長生亦爲副君師 副君愛長生之才慕之 甚迫通之娠副君女 長生乃作紫鳩篇 而謝于世己 世己曰 “枕席之間 宜於化人 事君之道 當矣” 副君聞之 欲推之 而力薦 捺烏之德 乃点捺烏 捺烏持身淸潔 善於琴笛及碁 而頗多雅趣 而內實不廉 上媚于權 貴下撫吏輩 肥己爲事能巧言令色 常着美服 跨好馬 過閭閻望之 若神仙 而及其止接之地 則皆富吏豪民 往往淫其妻女産子 于外者不知其數 故人稱捺烏子 以名落胤 至是捺烏與杞公最善 故內實圖相 而佯欲 讓于世己 故副君賢之 遂点之 杞公賀之 曰 “吾弟之琴 可如吉公之笛” 捺烏曰 “乃兄之力也 笛何爲乎” 捺烏先杞公一月而生 而以其日 後自稱弟 媚于杞公 亦潛通于玄宝 杞公之臣 告其奸則 杞公笑曰 “物皆有能其奸 稟于天則 奸亦加愛 交無少損” 時帝有疾 后與副君受朝 而除之
7년(AD376년) 火鼠(화서, 丙子, AD376년) 1월, 날오(捺烏)를 이벌찬으로 장생(長生)을 품주로 삼았다. 날오와 기공(杞公)은 같은 마도(馬徒)이고, 장생은 구도(狗徒)이다. 그런 연유로 후가 부군(副君)으로 하여금 점지하도록 하였다. 장생은 삼희(三姬)의 다른 아버지의 여동생이다. 총명하고 재능이 많아 의약과 점술에 능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가무에 능하였다. 처음에 날오의 처가 되었다가 세기(世己)를 흠모하여 찾았는데 세기에게 도망가서 자녀 여러 명을 낳았으나 날오가 시새움하지 않았다. 말하기를 “나의 처는 재주가 많으나 세기가 아니면 짝을 짓는 것을 옳지 않다. 나는 재주가 없으니 그 노비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세기의 명망이 점점 높아지자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은 일은 그르다 하였다. 세기가 이에 장생을 날오에게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장생이 울면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공태(公兌)가 이에 세기와 날오가 같이 처로 삼도록 명하였다. 부군이 세기를 스승으로 삼고 장생 역시 부군의 스승으로 삼았던 연유로 부군이 장생의 재주를 흠모하여 심히 긴박하게 통하여 부군의 딸을 임신하게 되었다. 장생이 이에 자구편(紫鳩篇)을 지어 세기에게 사죄하였다. 세기가 말하기를 “잠자리의 사이는 화인(化人: 신선, 부처, 보살이 사람을 교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타내 변하여 나타낸 몸)에게 마땅하니, 군(君)을 섬기는 길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부군이 그 말을 듣고 천거하고다 하여 날오의 덕을 힘써 추천하여 이에 날오를 점지하였다. 날오는 자신을 청결하게 보존하려 하였으며 거문고(혹은 가야금)와 피리와 바둑에 능하였으며 자못 아담스러운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청렴하지 않아서 위로 권세에 아첨하고 상대방의 관리와 무리를 어루만졌다. 비대한 몸으로 환심을 사기위해 꾸미는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을 하기에 능하였다. 항상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말에 걸터앉기를 좋아하여 여염집을 지날 때 바라보면 신선같았다. 잠시 그 땅에 의탁하여 머물면 부유한 관리와 세력이 있는 백성들이 이따금 그의 처와 딸을 음란하여 자식을 낳으니 (경도) 바깥사람들로 셀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날오의 자를 칭하여 추락하는 자손이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날오와 기공은 최선이라고 하여 그런 연유로 안으로는 재상의 자리를 꾀하고 거짓으로 세기에게 사양하는 척하였다. 점지됨에 이르자 기공이 축하하며 말하기를 “내 동생의 거문고(혹은 가야금)는 길공(吉公)의 피리와 대적될 만하다”하고 하였다. 날오가 말하기를 “저번에 형님이 힘쓴 공로입니다. 길공의 피리와 어찌 간주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날오는 기공보다 한달 먼저 태어났으나 그날 이후로 자칭 동생이라 하며 기공에게 아첨하였으며 또한 현보(玄宝)와 잠통(潛通)하였다. 기공의 신하들이 그 간사스러움을 고한 즉 기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물에는 모두 그 간사스러움에 능함이 있으며, 하늘에게 품한 즉 간사스러움 또한 사랑을 더함이 있으니 교제함이 없음은 젊음을 잃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왕이 병이 들어 후와 부군이 조회를 받아서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二月 宮井暴溢
2월 궁궐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39년, AD348년.
三十九年 宮井水暴溢
39년(AD348년) 궁궐의 우물 물이 갑자기 넘쳤다.
*AD376년- AD348년= 28년 편차.
五月 副君妃道留公主 因産而薨 后命保反宮爲繼妃 行吉鮑祠 新建其宮
5월 부군(副君)의 비(妃) 도류(道留)공주가 산고로 인해 죽었다. 후(后)가 보반(保反)궁주에게 비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포사(鮑祠)에서 결혼을 행하도록 하고 새로 궁(宮)을 신축하였다.
七月 貝薛伊伐飡 活况稟主 貝薛與世己同羊 而乳兄也 性順良 專依世己 故世己命羊徒推之 至是命長生引之 副君敬世己 故点之 時神后與副君同寢 而不與帝同寢 已近一年 而不召帝 于寢席 故帝知后意 己倦 欲禪位于副君 稱病入綃宮不歸 故副君專政
7월 패설(貝薛)을 이벌찬으로 활황(活况)을 품주로 삼았다. 패설과 세기(世己)는 같은 양도(羊徒)의 무리로 같은 젖을 먹은 형이다. 성품이 순하고 어질며 오로지 세기에게 의지하였다. 그런 연유로 세기가 양도를 밀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생(長生)에게 끌어올리도록 명하고 부군(副君)이 세기를 공경하여 그런 연유로 점지하였다. 당시 신후(神后)와 부군이 동침하여 왕과는 동침하지 않음이 이미 일년에 가까웠다. 왕을 잠자리에 부르지 않는 이유로 왕이 후의 뜻을 알지 못하여 몸이 피로해져서 부군에게 선위하고자 하였다. 병을 핑계로 초궁(綃宮)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부군이 정치를 오로지하였다.
十一月 神后生副君子好童 副君洗之 賜酺百官 以長生爲好童乳母 時長生亦副君女長文故也 活荒亦已生女 故命乳好童及長文 副君累幸 活况于乳房 保反責之 曰 “帝以外荒見 疎于母后 汝何不自愼如此乎” 副君乃謝 而絶之 活况托以稟事 親理誘出 政堂密薦如常 保反知之 使人促 帝入賀而親政 活况始得茜衣 受幸于帝 副君恐 后复歸于帝 唯在后側 后以是益賢副君 行鼠火祭
11월 신후(神后)가 부군(副君)의 아들 호동(好童)을 낳았다. 부군이 아기를 씻겨주며 백관(百官)들에게 연회를 내렸다. 장생(長生)을 호동의 유모로 삼았는데 장생 또한 부군의 딸 장문(長文)을 낳은 까닭이다. 활황(活荒) 또한 이미 딸을 낳아 그런 연유로 호동과 장문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는데, 부군이 누차로 활황이 젖을 먹이는 방에 행차하였다. 보반(保反)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바깥에서 황음을 하는 것을 보고 모후가 멀리하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삼가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부군이 이에 사죄하여 발길을 끊었다. 활황이 품하는 일을 맡겨두고 관리들과 친하여 유혹하여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정당(政堂)에서 은밀히 천거함이 평상시와 같았다. 보반이 그것을 알고 부리는 사람을 재촉하여 왕을 위로하여 친히 정사를 보게 하였다. 활황이 처음으로 천의(茜衣, 품주의 옷 색깔이 붉은색)를 얻게 되어 왕의 행차를 받았다. 부군이 후가 다시 왕에게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오직 후의 곁에 머물렀다. 후가 부군이 보다 더 현명하다고 하였다. 서화제(鼠火祭)를 행하였다.
八年 正月 神后與副君受朝 帝稱病不出 先是帝累欲复寵 媚於后側 曰 “臣自知恃寵外荒 得罪於聖妻 願以今日更新勿二” 后笑曰 “朕本不妬 汝亦無妬可也 神仙唯藥 是爲妬爲百惡之長 汝勿爲之 朕愛新夫而生子愉極 愛憐不暇思汝 汝宜待之” 帝歎曰 “吾复爲儒禮基臨矣” 欲行禪事 而山公等沮之 欲复后寵 而后無意 命副君專政 至是后與副君抱好童受朝 曰 “生此好童 朕願足矣”
8년(AD377년) 1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조회를 받았다. 왕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왕이 누차로 신후의 총애를 받고자 하여 후의 곁에서 아첨하여 말하기를 “신은 스스로 총애를 믿어 밖에서 황음하였으니 성처(聖妻)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원하건대 이로써 금일부터는 두 번 다시 (남편을) 바꾸지 말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짐은 본래 시새움을 하지 않는다. 너 또한 시새움하지 않음이 옳다. 신선의 약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시세움은 백악(百惡)의 으뜸이니 너는 시새움을 하지 마라. 짐은 새로운 남편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즐거움의 끝이 없다. 가엾게 여기나 너를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 유례(儒禮)와 기림(基臨)의 꼴이 되겠구나.”라고 하며 선위를 하려고 하였다. 산공(山公) 등이 선위를 막았다. 다시 후의 총애를 바랬으나 후의 총애의 뜻이 없어 부군에게 정치를 오로지 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후와 부군이 호동(好童)을 안고 조회를 받으며 말하기를 “호동(好童, 왕위 계승자)을 낳았으니 짐은 바람에 만족한다.”라고 하였다.
興蘭伊伐飡 石華稟主 亦世己徒也
흥란(興蘭)을 이벌찬으로 석화(石華)를 품주로 삼았다. 역시 세기(世己)의 무리이다.
二月 鸛巢月城堣(신라본기隅) 木公奏 曰 “鸛本水鳥 而居城 失其所也” 請禳之 許之
2월 황새가 월성(月城)에 둥지를 틀었다. 목공(木公)이 아뢰어 말하기를 “황새는 본래 물가에서 사는 새인데 성안에서 살고 있으니 그 터전을 잃은 탓입니다”라고 하며 푸닥거리를 하기를 청하였다. 허락하였다.
四月 神后與副君入桃山 祝子好童 率仙巫二白人 命世己忽明主其事 碧解國公薨 公美風儀善事上 故命元太后愛之 以爲夫 及其崩 以光元代之 至是與光元入捺己神山 中途而薨 帝迎歸葬之 后與副君畢福 而欲下山 忽大雨 浹旬平地三四尺 漂流官舍私屋無數 而各地山崩 凡三十所 后惧命世己点之 世己曰 “修德而己 何必点之” 后問 修德之方 世己曰 “祖宗之法 年久多弊 民多苦之者請改之 以安民 庶宮中之用 務以儉約 無多賦歛” 后可之
4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도산(桃山)에 들어와 아들 호동(好童)을 축원하였다. 선무(仙巫) 2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세기(世己)와 홀명(忽明)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벽해(碧解) 국공(國公)이 죽었다. 공은 아름다운 풍속의 예의와 윗사람을 섬기기를 잘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명원(命元)태후가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았다. 명원태후가 죽음에 이르자 광원(光元)으로 대신하였는데 이 때에 광원과 날기신산(捺己神山)에 들어가다가 중도(中途)에 죽었다. 왕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여 장사를 지냈다. 후와 부군 복을 빌기를 마치고 하산하려고 하였는데 문득 큰 비가 왔다. 두루 평지에 서너 자가 잠기었다. 표류하는 관사와 개인주택이 무수하였다. 각지의 산이 무너져서 무릇 30여소였다. 후가 두려워하여 세기에게 점을 치도록 하였다. 세기가 말하기를 “몸소 덕을 닦아야 할 일을 하필 점을 치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후가 덕을 닦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기가 말하기를 “조종의 법은 해가 오래도록 폐단이 많으면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면 고치기를 청하는데 이로써 백성을 안심시키고 여러 궁중의 씀씀이를 검소하게 절약하여 세금을 탐함이 줄어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가 옳다고 하였다.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41년, AD350년
四十一年 春三月 鸛巢月城隅 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 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所
41년(AD350년) 봄 3월에 황새가 월성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여름 4월에 큰비가 열흘 동안이나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나 되었고,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떠내려 갔으며 산 13곳이 무너졌다.
*AD377년- AD350년= 27년 편차.
五月二日 雨且不止 執書華宗等 詣于帝所 力言 “災異重出 宜決禪讓 以答天” 帝曰 “神后之意何如” 華宗曰 “聖人順天 而已神后亦聖人而已” 帝乃與光元宮主 議政大事 而入挑山 遂行禪事 于副君 雨收而天晴 人皆異之 帝旣讓位 留桃山不下 新帝尊帝及光元 爲仙帝仙后奉供之 優倍於帝時 又營仙宮於桃山 以爲行在所 帝乃自怡 與妃嬪等 優遊神山 以扶仙門 及神后崩 哀毁成病 葬期迫而殉崩 光元后亦於後三日 而崩 從其遺命 葬於牛谷 神后亦分骨 而光元命元合葬之 故曰 ‘子母陵’ 廟曰 ‘黃陵’ 封其子女三十二人 牛徒奉之 爲新山主 帝以金枝玉葉 自少從事神后 在寵位 凡四十六年 而無逆后意 終始一誠 尊后愛民 撫育仙衆 功績之顯 皆見於仙史 諸記鳴呼 至哉聖矣
5월 2일 또 비가 그치지 아니하였다. 집서(執書) 화종(華宗) 등이 왕이 있는 곳에 이르러 힘써 말하기를 “재앙이 달리 거듭하여 나타나니 마땅히 선양함을 결정하여 하늘에 답하여야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신후(神后)의 뜻이 어떠하냐?”라고 물었다. 화종이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의 뜻을 따르며, 신후 또한 이미 성인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광원(光元)궁주와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고 도산(挑山)으로 들어갔다. 부군(副君)에게 선위를 행하고 나자 하늘이 비를 거두고 맑아졌다. 사람들이 다 기이하다 하였는데 왕이 이미 양위를 하여 도산에 머물며 내려오지 않았다. 새로운 왕이 왕과 광원(光元)을 높이어 선제(仙帝)와 선후(仙后)로 받들어 공손히 모셨는데 왕일 때보다 배는 우대하였다. 또 도산에 선궁을 경영하여 행재소(行在所: 왕이 거동할 때 머무는 곳)로 삼았으며 왕이 이에 스스로 기쁘게 생각하여 비빈등과 더불어 넉넉히 신산을 유람하며 선문을 도왔다. 신후(神后)가 죽음에 이르자 슬픔에 몸을 해치어 병이 되었다. 장사를 지내는 기한이 임박해지자 따라 죽었다. 광원후 또한 3일후에 죽었다. 그 유명을 따라 우곡(牛谷)에 장사를 지냈으며 신후 또한 분골하여 광원, 명원(命元)을 함께 묻었는데 그런 연유로 ‘자모릉(子母陵)’이라 불렀고 사당은 ‘황릉(黃陵)’이라 불렀다. 그의 자녀 32인이 흙더미를 쌓고 우도(牛徒)가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산의 주인으로 삼았다. 왕은 금지옥엽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후를 따르며 섬겨 총애를 받는 자리에 무릇 46년 동안 있었으며, 후의 뜻을 거스름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후를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어루만져 선선의 무리를 기른 공적이 드러난다. 모두 선사(仙史)에서 보이는데 모든 기록이 울며 부르짖었다고 한다. 성스러움으로 비롯하여 두루 미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