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僻水寺에는
물소리 하나에도
가슴에 조용히 금이 가는
微物들이 산다
유월 토요일 오후 두 시
아이들이 하교한 교실 뒷뜰을
갈짓자로 산보하는 어린 유혈목이와
재래식 변소 오줌받이벽
구석진 곳 차지해 서리서리 즐거운 거미와
마사토 물어 올려 장만한 알집이
매우 보기 좋은 여름 귀뚜라미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은 인간들이 그은 삼팔선이여 !
한 점 머리를 수없이 부딪히는 날파리 깍다구
사슴벌레 나나니 깃동상투벌레 등 등
삼학년 교실에서 월동 잘했다 짧게 인사하고 간
말벌 무당벌레 그 것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짝짓기는 했는지 둥지는 장만했는지
인간들이 멋대로 이름 지어 그렇지
뭐 이름 없어도 별로 살아가기 불편하지 않은 그 것들
교목 이파리 뒷면에 나붓이 앉아
잠시 쉬다가는 그 것들
있는 듯 없는 듯 지구의 自轉에 전혀 무관한 그 것들
여름 햇살에 한 금씩 반짝이는 흑운모처럼
풀잎에서 태어나 풀잎으로 사라지는
산잠자리 억새노린재 유지매미 점호리병벌 등 등
인간들이 먹이 주지 않아도 잠재워 주지 않아도
느릅나무 잎새에 앉아 하늘 이슬 마시며
사람들이 근심해 주지 않아도
僻水寺에서 그 것들은
눈정 오가는 끼리끼리 짝짓기 하며
微物들은 마냥 즐겁다
인간아굿바이
여름 숲
여름 숲에 들면
사람을 멀리 해야지 혼자 말 낮게 하는
나무들이 있다
한 때는 상종가였지 침목 거푸목
뒷심이 딸려 갱목감은 아니었고
여름 숲에 들면
사람을 멀리해야지 날 보는 초등학교 선생들마다
교실 쪽으로 넘어지면 아이들 다쳐, 저 것들을 처리해야 해
깐깐한 말투가 아랫도리를 감는다
아차 넘어지면 안 되지 죽더라도 서서 죽어야지
찬물에 등목하듯 소스라치며
몸을 곧추 세우는 낙엽송 하나 둘
山中獨白
융단이듯 보드라운 이승의 굴레를
너와나로 매만지는 多情은 몇 구비
한 때는 연습 상황 한 때는 실제 상황
그림 속 반달눈썹 어디서 훔쳤는지
몸매 고운 여인아 연분홍 絲窓가에
그 누가 觀淫하나 밤새 타는 도화살을
늘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속에 지르고
살아서 설운 얼굴 하늘마당 내걸면
상사화 언제 지고 구절초 언제 필까
핏기 있어 그리는 님 명치 아래 새겨 두면
내 죽는 날 거울마다 서리서리 안개 일고
一萬의 풀잎들 속절없이 숙어질 걸
벌써 버린 깊은 속정 하염없이 되이는 밤
인간의 언어 배운 젊은 날의 까탈일까
그립다 말 지르면 사라지는 저 넋은
구름 하나 바람 하나 아스라한 마음 하나
아침 저녁 피고 짐은 인간세상 흔한 것을
어이해 내 딛는 이승 뒤 뜰 落花流水냐
劫을 너머 내 손등 마주 앉는 불나방
숨은 잠시 緣은 무궁 지화자 水菊世界
한 찰나 타는 마음 반짝이는 유성 하나
언어도 잘린 이 밤 인연 긋는 소쩍새
한 마디 피울음에 출렁이는 無色界를
겨울 하늘 서리치듯 아소님하 가시는 길
사람이 그리운 날 觀音이 그리운 날
초롱꽃 하나 밝혀 속을 주던 님처럼
無汶土器 등너머로 事物마다 앉는 풀색
강무싯돌
물살이 새겨준 주름살
무엇이 될까 어떻게 살아갈까
젊은날의 푸른꿈은 아침연기처럼 사라지고
이제는, 산란마친 연어와 동무하여
가지 가지 모양으로 강가에 나앉아
너와 나 한꺼번에 불리는 이름 무싯돌
칼날같던 모서리도 이제는 닳고 닳아
둥그스레 닮은꼴이 되었다
또 떠내려가 볼까 봇짐을 챙기며
속절없이 기다리는 유월 장마
풀씨 몇 개 등에 업고 이리저리 굴러가다
여울물소리 잠시 쉬는 구석진 곳에
눈치 빠르게 봇짐을 풀자
갈대 쑥대 억새들 질펀한 강가 한 뼘 사글세 얻어
팔베고 편하게 누으면
갈대가 되다가 억새가 되다가
새벽길 꿈속에서라도 우리는 무엇이 될까
물새들도 울고 떠난 허기진 강가
우리 모두 허재비가 되어
한 줄로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보자
별 수 없이 깎이고 맞아서 작아진
마음들을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나 보자
아 이렇게들 모여 사는구나
큰 돌에 채여 기 못 펴고 살아도
시간이 다듬어 주는 대로
물살이 새겨 주는 대로
아무렇게나 생긴 대로 이렇게들 모여
서로 서로 등 대고 발끝 대고
이렇게들 살아가는구나
여울물 소리 따라 조금씩 주름지며
서로서로 닮아가는구나 강돌들은
바람부는 날
어딘들 바람이 불지 않을까
키 작은 나무들과 허리 굽힌 풀들의
아우성이 간간이 흩어지는 곳
삶의 행방은 갈수록 아득하고
바람은 종일을 길게 분다
내가 버린 많은 분노로 하여
시퍼렇게 살아서 꿈틀대는 잎들
어딘들 바람이 불지 않을까
허리 굽힌 풀들과 키 작은 나무들의
그리움으로 일군 땅
불을 지피듯이 가슴에 마른 불을 지피듯이
삶은 파랗게 살아서 일어나고
바람은 늘 그렇게 불어라
내 모든 삶의 부분들을 모아
불을 지핀다 불을 지펴 사람들을 부른다
내가 버린 많은 분노로 하여
삶은 새로 화장하고 바람은 종일을 분다
속을 비우며
장다리꽃 유채꽃 떠나간 자리에
민들레꽃 냉이꽃 몇 나 피었다
아내의 가출을 먼 빛으로 보며
한낮의 들판에다 속을 비운다
어느 해나 강물의 한 뿌리 찰랑찰랑 적시며
우리 모두 돌아올 수 있을까 근심스럽다
사랑하는 모든 것 떠나 보내고
이제는 빈속으로 누운 풀밭 가장자리에서
한 모금의 불씨를 지펴보자
우리 사는 세상 들춰보면 별 것 아니다
작은 행복이란 사실 얼마나 허약한 포장지에
어설프게 싸인 유리꽃병인가
장다리꽃 유채꽃 돌아가고
민들레꽃 냉이꽃 돌아가고
우리네 사는 세상 세월 구비구비 돌아가고
속에 든 것 하나씩 풀어 보내고
사람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소리
속을 비우며
세상의 온 필부는
하늘 속 반짝이는
수 천 수 만 방향 별빛에도
오늘밤 조심 조심 내 눈에 뜨는
한 조각의 별 있듯이
민들레 씀바귀 냉이들 사는
논둑길 비탈진 세상
그리운 씨앗 하나 흙 속에 묻네
해마다 오는 봄날 이른 아침 햇살로
환히 싹터 오를 우리들의 가난 따라
가슴 속 깊은 강물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듯
올올이 삭은 시간 자아내는 물레이듯
내 골라서 보는 한 모금의 별빛은
오늘 밤 어느 삶의 하늘 위에서
반짝 반짝
물 속 같은 그리움에 숨을 묻느니
파리를 잡으며
파리를 잡는다
내 곤한 잠을 방해하는 한 마리의 파리
수십 수백 마리의 파리를 잠는다
한 마리의 파리를 잡으며 내 미움을 버리고
두 마리의 파리를 잡으며 내 욕망을 버리고
세 마리의 파리를 잡으며 내 살기를 버리고
파리는 다시 수십 수백 마리의 욕망으로 변신하여
내 곤한 잠 속으로 수직 낙하한다
파리는 견고한 살의로 무장하고
벽 틈에서 쌀통 뒤에서 때를 노리다가
바람 따라 일어서는 풀잎의 소리를 내며
우리들의 가난한 밥상 위로 단숨에 날아온다
한 마리의 파리를 버리며 얻는 내 목숨
두 마리의 파리를 버리며 얻는 내 자유
세 마리의 파리를 버리며 얻는 내 사랑
崔孤雲
그의 눈 속에는 늘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추가 익고 石榴가 익는 가을햇살이
그의 심장 속에서 늘 두근대고 있었다
新羅 천년, 한 줄기 푸른 燈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가는 붉은 옷의 사내
그의 가슴 한복판으로 늘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靑山行
맑게 살리라 말 한 마디로
세상을 떠나 보낸다
시간의 강물 위에 실려 바다로 가는
세상의 조그마한 분별들
가을날 맑은 햇살에 그을리고
비늘처럼 돋아나는 욕망에 흔들리고
빈가지 끝을 흔드는
하느님의 쩡쩡한 눈빛에 깎이고
흘러 흘러서
비로소 도착한 세상의 끝에서
확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맑게 살리라
말 한 마디의 뒷모습을
한 槍에 꿰어
풍진 세상 온갖 시름
한 槍에 꿰어
천지사방 내팽개치면
닿는 자죽마다
무심히 대꽃은 피어나리
눈 앞 캄캄한 세월마다
스르르 몸을 떨며 대꽃은 피어나리
민둥산 낮은 허리
부축해 일어서면
원시의 눈길 불타는 늘 푸른 槍에
흙속에 반짝이는 것 모두
가볍게 꿰면
또 한 송이 모란은
긴 잠을 깨리
민들레
폐교가 내일 모레인
계곡분교장 화단가에
민들레 몇 포기 돋아났다
청청한 하늘이 사라지고
비구름 모여들면
선물 받기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
귀여운 것들만
가만히 손짓해 부르고
거친 것들은
금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세상 물정 모르고 눈치 없이
주제넘게 까불던 어린것들
착지자세 즉시로
한 아름 제초제 선물을 받았다
측백 생울타리 틈에서
하얗게 자맥질하던 너희들
귀여운 것들 뒤에서
신상발언 한 마디 못하고
고개를 떨구던 너희들
이제, 獨床의 아침이다
기능직 이씨 아저씨가
분무기를 화단가에 내려 놓고
너희들의 반란을 예감한다
金 笠
주머니 속에 든 것 모두 버리고
길을 나서면
선뜻 다가서는 중붓만한 산
산 밖에는 흩날리는 눈발
산 안에는 일렁이는 물무늬
兩白之間에
이제는 발 씻고 편히 누운 사람아
푸른 솔 흰 솔 고만고만한 바람소리
이마 너머로 씻어 넘기며
무엇일까 하늘과 땅 틈새로
부싯돌 치는 소리 이따금 들린다니
解放하세요
방금 羽化한 구름나비 한 마리
서리
하늘 뜻으로
한 순간에 지울다
내내 거만하던 푸새들
비로소 고개 숙이다
인간의 뜻으로
졸지에 가다
내내 빳빳하던 푸성귀들
비로소 허리 꺾이다
落葉
나무를 흔든다
한 줌 힘으로
똑바로 떨어지는 것들
나폴대며 떨어지는 것들
미련일까
이 곳 저 곳 기웃대며
찰라라도 허공에 머물고 싶어
앙탈하며 떨어지는 것들
나무를 흔든다
한 줌 힘으로
한 번 흔들면
이파리 하나 떨어지고
두 번 흔들면
이파리 두 나 떨어지고
그래도 天上에 남아
눈부시게 매달려 있는 것들
나무를 흔든다
한 줌 힘으로
흔들지 않아도 고이 질 것들
힘을 주지 않아도
가을날의 마지막 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할 것들
金井里
친구여
금정가는 막버스를 타 보았는가
먼지 앉은 차창을 걸어가는
廢鑛村의 낡은 풍경
해묵은 나무 삭정이에 걸려 깃발이 된 비닐 조각들
이제는 울지 않는 아이들
저 마다의 분노로 돌아앉은 돌맹이들
씨앗을 날려보낸 뒤의 민들레 대궁
짧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아귀가 맞지 않아 바튼 소리로 우는 문틀
廢石 틈새에 돋아난 새 민들레
토끼 목로를 보러 가는 후반기의 아이들
친구여
금정가는 막버스를 타 보았는가
山中問答
다이애나가 죽었다며
어떡하지
어떡하지
왜요
통시보지껌씹는소리여
銀海寺에서
내 젊은 날의 고독이
몸부림치던 銀海寺
이십년 만에 다시 찾았다
한 때 절친하던 인간들
뿔뿔이 흩어졌다
一英 溫圭 銀實 潤貞,그리고 이름 잊은 여인들
흥해벌의 겨울 밤바람 송도 파도소리
데이트코스로 안성맞춤인 앞산공원
논공마을 왜관철교 원두막 낙동강 백사장
금호강, 미루나무가 싱그럽던 청천 유원지
‘ 강언덕 너머에는 ’의 무대 하양
청춘 한 때의, 그 분주하던 짝짓기 연습이라니 !
초임지 숙천국민학교 숙직실
그 분주하던 젊은 날의 술잔,
피잉 도는 머리를 식히느라 새벽 운동장을 달리던
전라도 여산벌 2下士 전우 균식이
방금 맛본 섹스를 닦은 수건을 머리맡에 치우며
하얗게 웃던 은희,
결국 홍하하고 맺어지지 못했다던가
서울가서 순경이 됐다는 홍하
보험회사 영업소장이 됐다는 균식이
쯪 쯪 쯪
신혼의 꿈을 꺾어들고 하늘로 간 한목이 식구들.
몹쓸 놈의 연탄가스, 째지게 연애하더니 ......
사람이 산다는 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밤배를 타는 일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 한 대 태우고
내 지나온 하늘 뒤돌아보면
아하!
언젠가 우리 다시 데이트할
銀海寺 그 붉은 숲길
文殊山 鷲棲寺
저 것 좀 보아 억새 어린것들
참 고와
흰 구름 한 자락 걸어 내려와
허리 편 가을 산길
사람의 길이 다하고
산짐승의 길 이어지는
文殊山 가을 산길
잘 깎인 잔디 위에 앉아
염불을 듣는다
포크레인 노동소리와는 장단이 안 맞아
마디 마디 산으로 숨는
테이프 속 無如의 말씀
부처님 좋으시겠어
내년 이맘때쯤이면 날아갈 듯
새 기와집 새 山川
곱게 분단장한 近事女들
꽃보시 받으시리
이제는
文殊의 둔부를 만지며
마음 놓은 대로 길을 가자
九月 늦매미 울음소리, 가볍게 색칠하며
부처님 낮잠 옆에서
온몸의 힘을 풀자
도척行
萬物이 도통하는 새벽
도마질 소리를 내며 일어서는
연꽃 한 송이
무리 중에 단 하나 피부가 하얀
도척이 .
훔칠 것이 참 많은 세상
값나가는 것 모두 버리고
연꽃 한 송이 훔쳐
얼굴 부수며 곱게 웃는
芳年의 도척이 .
산새
산새 한 마리
돌아오지 않는다
줄기 줄기 장마비 끝 하늘을
순순히 날아가던
갈매빛 둥근 눈을 한 산새
한 장
주머니 속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빈 산 밝은 달
솔바람 마디 마디 시나위 흥을 싣던
그 때 그 산새
부리를 열면
구 구 절 절 풀냄새 피던
初老의 그 산새
지금은, 오후 두 시
素月里 피브이시 솟대 끝에 앉아
부리를 닦고 있다
겨울 浮石寺
선달산을 올라오는
多情 앞에
날이 서는 浮石
간빙기의 하늘을 짧게 호흡하는
白나비 黑나비
산벚꽃이다 돌배꽃이다
半白의 사랑이
떨며 지나가네
神들의 바튼기침 사이로 난 오솔길을
半白의 고독이
절며 지나가네
義湘이 이제 오나
방금 깨친 신라가 연초록이듯
배고픈 풀잎 위에서
한 숨 자고 오나
풀
고개 치켜들고 살아
한 평생 풀이여
빈 산 빈 하늘 불러 병풍 두르고
양지쪽 잔솔밭에 몸을 누이다
풀이여 뉘 있어 그대 손과 가슴
깎아 세울까
覺華寺 대웅전
낙숫물 소리 맑아질 적
한 줄기 兩白사랑 빠르게
흰 눈발로 그으며
뉘 있어 그대 떠나간 자리
그리워할까
木蓮
하느님의 신음이듯
목련이 지고
느티이파리로 돋아나는
불혹의 그리움
가볍다 내 사랑 하나
맑은 하늘 속에
살려 보내면
한 때는
불타오르는 금단의 新婦
아리 아리
소라 속 구비길 사려 돌아
이제야
군자란 곁에 비슷이 누워
마음 흐려 바라보는
잠시의 그리움
1998년 3월 28일 佳仕里
경로 화장지 타러 오세요 선착순입니다
고성능 확성기를 탄 사내의 목소리가 마을을 흔들면
공민왕 맏딸이 사는 부인당이 배시시 문을 연다
나무등걸처럼 서서 밭일을 하던 노인네들
흙손을 문지르며 주섬주섬 봉고차 옆으로 모여든다
농사일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아이엠에프
에 또 정부의 축산정책상 충북 축협산 염소 액기스
두 통에 십 구만 팔천원, 농촌을 지키시는 수고에 보답하는 뜻에서
한 통은 선물이고 한 통 값만 받습니다
봄햇살에 꺼칠한 얼굴 순한 황소눈만 껌뻑껌뻑
경로 화장지 안 주고 그냥 가니껴
사는 사람만 줍니다 샛된 얼굴의 양복쟁이
건너 마을 이장님 팔고 영대 축산학과 팔아도
목만 칼칼하고 영 입질이 없구나 촌놈들이 뭘 알아야지
중간쯤 들어보이 약장수더구만
촌사람치고 안 아픈 사람 있나
덕분에 좀 쉬고,
봄햇살은 여전히 따사롭고 부인당이 쪽문을 닫는다.
낙동강
울지 말자
눈물도 몇 해를 흐르면
뿌리를 다하는 법
잠든 강은 하느님의 거울
심심한 하느님은
풀꽃 하나 필적마다 쉽게 울곤 했다
눈물의 뿌리를 쪼아먹다
목숨이 다하는 투디티새의 눈빛으로
잠든 논공마을의 구름과 바람과
하느님의 강 위를
시간의 물새 몇 마리 남모르게
물빛으로 사라지곤 했다
강은 조용히 금이 가고
언어는 물결에 닿자말자 은어떼가 되어
상류로 올라갔다
울지 말자
울지 않는 하느님의 거울 속에서
시간은 풀꽃 몇 개 피우고 있었다
水平線
수평선 너머
꽃 하나 지고 있다
외항선의
둥근 霧笛이 남긴 여백을
바닷물이
조금씩 채우고 있다
冬栢의 잎마다
숨죽인 바다의 눈동자가
가끔 출렁이고
낯익은 사내들이
鮮魚가 되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北斗를 바라보며
북두를 바라보며
황폐한 이 시대 먼저 걸어 간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뚜렷한
북두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張三李四 눈물 나누나
별 하나 별 둘 별 셋
자잔한 냉이꽃 되어
우리들 가슴 사이 사이 피어나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들녘마다 피어나
오늘밤은 산 자들끼리 어깨동무
북두를 바라보며
五 月
부러진 말
굽은 말
덜 익은 말들이
노는 세상
뒷장에
아아라이 그어지는
소쩍새
울음 소리
풀밭
이 땅의 가장 가난한 영혼들이
살아와 다시 이룬 장엄한 분노
세상 너머 또 세상
- 故 朴景緖에게
오늘 하루 품은
이름 없이 풀씨로 흘러가다
세상 너머 또 세상 바라보면
하얗게 보이누나 우리 살던 옛땅
얼음 박힌 모진 땅 겨우 피해
차진 흙 골라 발 뻗어내며
九泉속 깊이깊이 고인 눈물
쩡 쩡 몇 금 쪼아내며
우리는 봄하늘을 향해 피웠노라
넓은 세상 고루 퍼질 풀씨들의 욕망을,
이제 산새들도 외면하는
한 줄기 겨울벌판 쓰라린 길을
불빛 모두 사그라져 꽁꽁 닫힌 세상을
신발끈 고쳐매고 성큼성큼
빗발이듯 눈발이듯 우리 살던 옛하늘
여뀌들 근처로 흘러가
몸 풀고 누우면 보이누나 또 한 세상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내 살 땅을 달라네
거친 삶 추스리며 천리 만리 훨 훨 날아
노래 흩어진 언덕 잿빛 침묵의 기슭에
작은 발 디디며 내 살 땅을 달라네
정든 사람 떠난 땅, 비 피하듯 사라진 신작로
끝내 버리고
오늘은 어느 하늘 끝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인지
막걸리 한 사발로 아린 속 적셔내며
망초 개망초 하얗게 부서진 땅
무늬 진 손끝으로 일으켜 세우며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그대 죽을 땅을 달라네
찬란한 오기로 돋아난
지칭개 여뀌 땅비수리 모두 거느리고
손님이듯 날아와서
패랭이꽃처럼
산과 들에 버려졌구나 허전하게
기억의 늪에 등을 대고 누워서 보는 여름 하늘의 끝
갈 길이 먼 사람들의 앞에 비가 내리고
비가 내려 환한 의식의 마당가를
마음 여린 나무 몇 그루 우두커니 지키고 서있다
어디로 가야하나 세상은 모두 남루해져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날마다 저마다의 굳은 껍질 속으로 삶을 감추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패랭이꽃처럼
산과 들에 버려져 쓸쓸해진 풀씨처럼
삶의 한 쪽 귀퉁이를 툭 툭 털고 일어나
땅을 열고 하늘을 열고 마침내 몸을 열고
줄줄이 달려오는 산것들 힘껏 안을까
망초들 쪼록싸리들 노랑마타리들 함께 사는
검재골 가는 길가 한 뼘 땅 골고루 나누어서
비바람과 찬란한 햇살
물명주빛 자잔한 욕망의 아지랑이들
검재골에 사는 거 모두 불러모아
한 잔씩 섞어 마시며
우리는 그렇게 산단다 패랭이꽃처럼
튼튼한 분노 속에서
씨앗을 넣으며
씨앗을 넣는다
모진 사람 모진 세월 손 흔들어 보내고
씨앗을 넣는다 상추씨 배추씨 파씨
아직은 손끝 시린 바람 부는 우리 금수강산
자갈은 치우고 흙덩이는 바수어
사방 두 자 반 마당귀를 다듬어 씨앗을 넣는다
상추씨 배추씨 파씨
죽은 자들이 잘 썩어 부드러워진 흙 속으로
저마다의 희망을 안고 몸을 숨긴다
돌맹이가 누르면 밑으로 기어가자
비닐조각이 덮치면 옆으로 기어가자
씨앗봉지 속에서 손가락 걸어 맹서한 대로
상추씨는 밑으로 배추씨는 옆으로 파씨는 모로
한 금씩 기어가자
잠들지 말자 동무야
물러서지 말자 동무야
내가 살아가는 세월은
호미자루 움켜쥐고 죽어라 흙을 매던
어머니의 터진 손 끝에 돋아난 콩꽃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월이 이름 지어져도
몸 속 깊이 가라앉은 기다림의
끝에서 반짝이는 한 조각의
아픈 사랑은 누구 몰라라
어디를 둘러봐도 어머니가 피운
그리운 하늘은 보이지 않고
갈가마귀떼 자욱한 이승의 하늘
순한 눈빛의 짐승들은 산으로 숨고
고운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살아가는 세월은
어머니의 허기진 손 끝 따라 인 콩꽃으로
이름하여 낮게 피어나도
호미질을 하듯 억세게
몸 속 깊이 가라앉은 그리움의 하늘을 매면
환히 보이려나 우리 사는 세상
보리들
이 넓은 세상에
우리 보다 못난 종자 있는가
세월 좋던 한 때는
부황난 백성들 오진 친구 되었고
방물장수 머리에 실려
대명천지 구경도 양껏 하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 만들어
껄떡껄떡 온 조선땅 흔들었지
후드기는 빗소리에 꿈을 깨면
우리는 갈데없는 겉보리 신세
농협창고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온몸으로 비를 맞는 후진 신세들
아끼바리 통일벼 등살에 밀리고 밀려
식량증산 포스타 옆에 붙어서서
광고사진이나 한 장 박혀주고
막걸리 한 병에 아랫도리 흔들리는
우리 주인농부 닮아서
손마다 등마다 굵은 금만 났구나
이제 먼길 떠나면
동지섣달 앙심품은 추위 속에서도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늘 푸른 보리밭 따라 크는
조선의 아이들 배불리 먹이다가
끝내는 보리답게 죽어 가리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얇은 살가죽을 한 그는
젊은 시절 한 때 월남에서 빨갱이들과 싸웠다고 한다
팔십년대 후반기 예비군 훈련 받는 날
여름방학 잔잔한 땡볕 아래
후줄근한 개구리복을 입고 앉아
허허 웃는 여든 명의 선생들 앞에서
십여년 전 육군 대위로 제대한 그는
한창 때의 표정 그대로
월남전 무용담이랑 군대시절 에피소드랑
학생데모랑 노사분규랑 대강 마친 뒤
여담이라면서
아오자이 고운 월남여인 이야기를 했다
군 주둔지 근처에는 늘 민가가 있고
비번 날 설렁설렁 걸어나가
빨래하는 소녀도 아가씨도 아줌마도
헤이 꽁가이 쓰리 달라 붕붕 휘파람 불면
예측없이 오오케이
자갈밭에서 야자수 밑에서
헐렁한 이국여인의 육체 위를 낮은 포복하는
하루치 전투수당 원 달러 짜리
황갈색 따이한의 허기진 향수
설흔 몇 해 전쯤
보리밭 고랑에서 초가지붕 밑에서
박꽃으로 피어
단돈 몇 달라 벌이로 속살을 팔던
더러는 공으로 뺏기기도 하던
우리들 어머니 세대 또는 큰 누님 세대의
쪼글쪼글한 젖가슴들이
연병장으로 난 길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리는 산을 타고
서러운 것들 모두 꺼내
산에 버리자
산에서 목숨 진 사람들
푸른 울음소리
산을 타고 올 때까지
산에서 돋아
산에서 진 사람들
가만 가만 손짓해 부르면
한 모금의 눈물로도
그리운 사람들
오늘 아침
강아지풀로 보란 듯 피어나고
아버지의 나라
쩡쩡한 햇살 받아
한 금씩 고개 드는 풀잎 따라
서러운 것들 모두 꺼내
산에 버리자
산에 사는 사람들
푸른 울음소리
산을 타고 올 때까지
山門을 닫으며
억새 사초 띠풀들
팔 걸어 서걱이는 산자락 한 점
목로를 놓는다
한 바가지 양식을 위해 귀 쫑긋하는
산의 것들 붙들려고
아이들과 함께 목로를 놓는다
내 봄날의 노동과 콩잎들의 안녕을 위해
단내나는 육식의 즐거움을 위해
산의 것들 잘 다니는 길목마다
예닐곱 점 철제의 욕망을 놓는다
작은 것 걸리면 집에 키우자
아이들의 건의를 지내 들으며
좀 더 큰 것을 위한 욕망의 굴레를
억새들 가에 밤나무 옆에
든든히 얽어 놓는다
내일 아침은 맛있는 고깃국
토끼 고기는 뼈가 많지만
참 맛있단다
노란 입의 식구들에게 음각으로 새겨주며
오늘 새벽, 이슬에 담뿍 젖은
산의 것들 항복을
손아귀에 움켜 쥘 즐거움에
삼십대 가장의 가슴이 설렌다
찔레 덤불 속에 납작 엎드린
큰 눈과 작은 눈의 속 떨림
귀여운 내 어린것들아
고저장단이 확실하지 못한 소리
저 소리가 인간의 소리란다
우리 늘 익숙한 길섶 여기 저기
날카로운 육식의 습성을 감춘 척
은빛으로 반짝이는
몹쓸 것들 곁에 아예 가지 말아라
인간의 입맛을 위해
산에 사는 순한 것들 다칠 수 있느냐
억새풀 가로 다니지 말고
밤나무 옆에서 숨박꼭질 말아라
콩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
억새 사초 띠풀들
팔을 걸어 서걱 서걱
살아있는 모든 것들 조용히 우는 세상
산의 것은 산의 것대로
인간의 것은 인간의 것대로
섬돌 위에 나란히 신발정돈
山門을 닫는다
觀骨法
고등어란 놈
오늘 아침은 내 앞에서 항복이다
언제나 거만하던 놈
동해바다 만한 양양한 가슴을 가졌노라
언제나 큰 소리 치던 네놈이
오늘 아침은 우리 집 연탄불 위에서
네가 마신 자유란 자유는
모조리 토해 놓고 거만한 네놈의
등뼈도 훤히 내놓고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이 뻔뻔스런
네놈의 갈비뼈와 꼬리뼈를
보기 좋게 해방시키고
오늘 아침에야 내 밥상 위에서
항복하다니
오늘 아침 식사는 즐거웠어
끝내는 조그만 가시 하나
싱싱한 바다의 아침을 끌고 와
나의 영토에서 항복하는
고등어의 등뼈 근처에서
남모르게 제적된 가시 하나,
아침 밥상 아래 떨어져 농성하는
낮은 금속성이
출근길 마음 한구석에 박혀 찜찜하지만
오늘 아침 식사는 그런대로 즐거웠어
共和國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끼리 서서 종알대며 살아갑니다
큰 나무는 큰 나무끼리 우렁대며 살아갑니다
작은 나무의 작은 눈으로 쳐다보는 남의 하늘
오늘은 빗소리입니다
安東行
밤이 깊구나
꽁한 마음 아직 사그라지지 않아
다리 뻗고 잠들지 못하는
설 푼 머리칼 핏발선 눈
다스리는 태백이의 달
귀비의 입술 같은 달이로구나
몇 몇 구비의 밤과 낮을
모진 자갈 돌멩이에 채여
엎어지고 자빠지며
모래톱에 청춘 쓸리우고
억새깃에 옆구리 베이며
흘러 흘러온 우리들
온몸에 소름 돋는 욕망의 끈으로
예안 장터 근처까지
떠내려 온 우리들
쓸데없는 것
죽어서나 이름 남길 상것들
한 줄로 세워 이끌고서
산간지방 좁좁은 삶의 모서리를
한 금씩 깎아내어
무명바지 속주머니에 넣고서
청량을 훨 훨 지나
도산서당 먼발치서
공자왈 맹자왈 한나절쯤 따라 읊다가
문득 서늘한 바람
우리 몸 풀 데 여기 아니지
짚신 감발 갈아 신고 길 다시 나서면
이거 몇 해 만이요
이 골 저 골에서 손 흔들며 달려오는
장삼이사 맨상투들
반가워라 생김새는 조금씩 달라도
사는 법이 같은 우리들
밤이 깊구나
드난살이 신세끼리 등을 맞대고
칼잠을 청하자
공업용수 생활용수 확 트인 출세길
면도칼 본드 잘 붙는 눈치들은
취수탑 아랫도리를 간질이다
홍패 백패 참봉 군수
요령 좋게 풀려 나가고,
변두리에 몰려 웅성대는 것들은
척박한 상류지방 빗발과 바람 속
감자알과 조밥으로
잔뼈가 굵은 우리들 뿐
사방을 둘러봐도 남아있는 것
맨상투 핫바지저고리들 뿐
그렇다
우리들의 달을 만들자
스스로의 무게로도
세상의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우리들의 함성을 모아
우리들의 세상을 비추는 달을 만들자
우리 걸어가는 길 성큼 막아서는
잘난 것들
어깨힘을 모으고 팔힘을 엮어서
영차 영차
길이 오백 너비 백이십 미터의 벽을 밀자
앉아서 당하느니
일어서서 꺾이기 위해
영차 영차 한 평생을 밀자
그렇다
어깨가 무너지고 팔힘이 꺾여도
결코 기죽지 말자
아비 어미 생명꽃 피운
척박한 상류지방 빗발과 바람 속
보리밥과 된장으로
피 엉기고 살 오른 뒷사람들
스스로의 무게로
세상의 낮은 곳으로 가려는 고운 뒷사람들
훗날 어느 땐가 하루 품으로
어깨힘을 모으고 팔힘을 이어서
어기여차
우리 사는 시대 함성 보다 더 붉게
어기여차
두 평생를 든든하게 밀리니
풀씨로 날아서
고운 님 숨어사는 하늘가를
풀씨로 날아서
무리 산 너머 너머
풀씨로 날아서
두어 점 아느작 人家의 불빛 바라
풀씨로 날아서
날개 떨며 허이 허이 그리운 하룻길
풀씨로 날아서
순이
풀잎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풀잎의 눈물을 마시고
일어선단다
순이야
봉긋한 가슴 두 더미
묻어 둔
순정으로도
일어서지 못할 순이야
하늘가는 길은
하늘가는 길은
지상의 온갖 길이 끊어져
황금빛 내장을 토할 때
한 줄기 푸른 눈을 뜬다
하늘가는 길은
구절초 이피리 뒤에 나붓이 숨어
춘향이 짬짬이 걸어오는
아야어여 아찔한 눈정
가볍게 튕겨 보낸다
山
사람은
산 하나 쌓으며 산다
흙과 바위 몇 음절의 짧은 분노
가지런히 잘라서
사람은
분수에 맞는 산 하나 쌓으며 산다
산에는
푸른 잎이 피고 하얀 꽃이 피고
산능선을 따라 비행하는
동전 만한 새떼의 날개짓
주황빛을 따 물고 와 안심하는
나비 나비
산에는
떡갈나무 가문비나무 사이로 트인
토끼 길 노루길
햇볕 잘 드는 서너 평의 사초밭
산은
풀과 나무의 영혼을 조립하는
잘 익은 누드의 여인
산은
가랑잎 속에서 여리게 우는 풀무치
얇은 속날개 무늬
어디 산 하나 있을까
맑은 물에 발 담그고 선선한 바람 불어
흔들 흔들
날개 찢긴 새들 털 뽑힌 산짐승들 데리고
하룻밤 깊은 잠을 잘
산 하나 마음속에 있을까
宿水寺
당간지주 연화대 주춧돌 한 바퀴 돌아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을 세울까
대성전 학구제 일신제 명륜당 한 바퀴 돌아
마음이 서는 곳에 몸을 태울까
일천 오백년 석가 말씀이 낱낱이 부서져 누운
순흥땅 여름 하늘은 오락가락 여우비
사백 년 공자 말씀이 켜켜이 쌓인
면소재지 슈퍼 겸 간이 버스정류장 낡은 시간표
아름다워라 남진과 겨집이 사랑하는 짓
아름다워라 남진과 겨집이 소꿉하는 짓
숙수사 소수서원 숙수사 소수서원
영어로는 다같이 에스자로 시작되지만
조선말로 하면 한 마리 소쩍새 울음
남진 하나 대성전 마루턱에 졸고 있다
안향 선생의 변발은 자의일까 타의일까
마루 종 내릴 사 이마 액 글월 서 성 원
수면제 다섯 알 아름다워라 당겨집 善妙
당간지주연화대주춧돌돌기둥토막무싯돌땅속부처
침향내음그윽하다나무아미타불
등칡을 자르며
미끈한 상수리나무의 알몸을 칭칭 감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타오르는 너는
前生에 이녘 하고는 무슨 까탈이 있었는지
무자수의 등허리 같은 욕망을
염치없이 비벼대면서
무슨 사랑을 은밀히 전하느뇨
그 눈꼴 시림을 참다못해
오늘 작은 톱을 들고 네 앞에 섰다
썩 썩 톱질할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지는 등칡의 음모
그 시뻘건 불륜을 재판하는
나의 톱질은 자유다
톱질 한 번에 반쯤 잘라지는 등칡의 욕망
톱질 두 번에 무너지는 등칡의 現生
사질토 위에 맥없이 쓰러지는
등칡의 사망을 확인하고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거기 그 땅도 지금쯤은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을 거다
버들강아지 하얗게 눈을 뜨고 있을 거다
사람이 사는 곳, 두 눈과 두 귀와 붉은 뺨을 한
귀여운 아이들이 깊이 잠들어 있을 거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깊이 잠든 아비와 어미 사이에서
작은 손의 아이들은 꿈의 들판을 쏘다니고 있을 거다
거기 그 땅도 지금쯤은
잠 못 든 별들의 근심 아래
언 흙 속에서도 한 금 씩 발을 펴는 풀씨들이
무성한 가을날의 풍요를 꿈꾸고 있을 거다
사람이 사는 곳, 사람이 살기 위하여 만드는 온 몸짓이
수고로운 우리들의 시대 한복판에서
거기 그 땅도 지금쯤은
긴 잠을 털어 낸 뿌리들이 힘차게 양식거리를 장만하고 있을 거다
얼음은 한 겹씩 얇아지고 있을 거다
다시 씨앗을 넣으며
하느님께
일전에 바람편에 부친 편지 잘 받아 보셨는지
뒤숭숭한 세상이라 편지 한 장 쓰기도 버거워
버거워서 다시 몇 자 적어 보내오니
상추씨 배추씨 파씨 모두들 무고하시며
모래흙 진흙 자갈흙들 모두들 근력 여전하신지
살피시어 속세 목숨들 마음놓게 하소서
편지는 무슨 편지 이 바쁜 세상에
상추씨 배추씨 파씨
어느 하늘 어느 서방 무릎 위엔들
몸 풀고 누우면 보이나니
늘 둥근 세상
草史
그대는
한 포기 풀로 세상에 나타나
비 바람 수악한 천둥과 번개
우산없이 맞으며 어젯밤은 자갈밭에 눕더니
사각 사각 속살 베어내는 소리만 내더니
한 모금의 물을 위해
허리를 숙이고
한 그릇의 밥을 위해
알몸을 털더니
오늘 아침 ,
한 모금의 물보다 소중하다
한 그릇의 밥보다 소중하다
느릅나무 가지 끝에 걸린 무지개 따라
풀들은 일제히
굽혔던 허리를 편다
예안 장터
창수네 옥이네 모두 돌아와
지난번에 못다 꾼 꿈 이루더라고
물먹은 기와장 십 년 너머 물살이 하는
초가지붕 화안한 박꽃
오랜만에 옥희로 오랜만에
지상에 나타나 반가운 오후
골목어귀 미장원집 미스 정도 돌아와
한 겹 서울 먼지 산뜻 털어내고
미스 정 오늘 오후는 한 그루 산벚꽃
이루지 못할 꿈 오르지 못할 나무
다음 세상 기약하며
우리끼리 돌아와 따스한 오후
초가 이어진 골목 돌아 몇 채 기와집
감나무 한 그루 일년국화 곱던 길섶
마음속에 그렸다 지웠다
하루종일 수선스럽던 예안 장터
풀을 뽑으며
참깨들 흰콩들 유세하는 텃밭
틈새에 겨우 돋아나 뿌리 내린
잡초들, 인간이 이름 불러주지 않아 늘 불안한 것들
한 주먹 뽑아서 내던지면
참깨들 콩들 킥킥대는 소리보다
한 음정 낮은 잡초들의 시 시 씨발
허리가 부러져서 다신 못 일어나겠어
다리를 다쳐 다신 못 벌어먹겠어
온 밭을 설쳐대는 잘난 것들의
발길질에 멋지게 쓰러지는
좌판 숙이 엄마 리어카 김씨
日氣
바람이 분다
풀이 흔들린다
누구는
풀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중생의 눈에는
바람이 불고
풀이 흔들릴 따름
오늘 일기. 쾌청.
交信
눈을 들면
아까시 가지 끝과
프라타나스 가지 끝의
은밀한 교신
원산지 북미 대륙
황량한 아시아 대륙 한 구석
반도땅에 뿌리내려
어언 한 세기
이제는 금수강산 구석구석
정액냄새를 피우며
어엿한 토종 대접을 받는
아까시
반도땅 관공서 뜨락이나
학교 운동장 가에 줄로 심어져
수천 수만의 잎새로 그늘 지워
초등학교 오학년 체육시간
더위 피해 주는
프라타나스
그 둘의 알 수 없는 교신
糧食
쓰레기터에 버려진 옥수수알 하나
거두는 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자라
가을 햇살을 받아 잘 여물었다
내 비록 비료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알알이 햇살을 머금고
통통하게 잘 익은 옥수수를 보며
사나흘 뒤에는 양식으로 거두리라 흐뭇하였다
이튿날 아침, 웬걸 옥수수가 보이지 않았다
들쥐에게 온몸을 내주고
싱긋이 웃고 선 옥수수 대궁
어쩌다 쓰레기터에 버려졌지만 살아남아
햇살과 비바람이 나를 익게 했으니
들쥐 식구들의 양식이 되어 이제는
빈 몸으로 서걱일지라도 흐뭇하구나
인간의 욕심 참 끝이 없구나
씨 뿌리지 않은 자가 거두려 하고
비료 한 번 주지 않은 자가 먹으려 하는
세상 참,
들쥐의 양식이 되고 산새의 양식이 되어
그들을 배부르게 하리
루드베키아를 위하여
鄭聖美
봉화 정 성인 성 아름다울 미
방년 열 일곱 중졸 현장 2년
그녀는
자갈 모래 진흙 잘 섞은 가슴밭에
루드베키아 세 포기를 기른다
고향과 어머니를 위해 한 포기
부끄러운 첫사랑을 감추며 두 포기
노동으로 움직이는
평등 세상 위하여 세 포기
루드베키아
원산지 남부 유럽
홍적세 깊숙한 상처의 마지막 밤
급히 만들어진 꽃
지금은
읍소재지 언덕배기 스레트 지붕
브로크 담장 아래서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초성 좋아라
한실에서
강에서 태어나
강물 따라 흘러가다
잠시 쉬는 여울 가에 뿌리 내리다
알맞게 부는 바람 따라
꽃을 피우다 열매를 맺다
갱변 잡초 엉겅퀴
모난 얼굴 둥근 얼굴
강에서 태어나 강물 따라 흘러가다
인연 따라 흘러가다
모기향 한 순간에 타듯
잠시 쉬다 뿌리 내리다
갱변 잡초 엉겅퀴
女人 하나
겨울 나비
가을을 떠나
내살미 부근까지 걸어 온 겨울이
갈대로 서있다
인연을 끊고 일어서는
事物의 등 뒤로
낯선 얼굴의 손님으로 마주 보는
겨울 나비는 錦紅이
흐린 징소리로 가라 앉는
근대백년 강물의 근심
아무도 모르게 풀어 버리는
마른 풀잎들의 混淫
은박지 사랑 끝에 타오르는
한 줄기 푸른 연기
긴 머리 선뜻 날리며 떠난 그대
빈 자리에 고여 있는
외곽선을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갈대 몇 생애
겨울 하늘을 한 올씩 풀어서
지우고 있다
霜寒圖
서리꽃 피어 꼴리는 길
사람 실은 짐차가 간다
등굽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흔들리는
예안가는 길
떠나지 말자
시린 음성으로 다가서는 秋史
버리고
그림 한 쪽 귀를
문득 깨뜨리고 날아가는
배고픈 새 한 마리
登典敎堂
春日陶梅潑花時
登枝結實絶境知
白雲起沒居仙潮
溪水芳香源山師
撫草洗碑一丹心
秋日山堂經世吹
登階一覽黃葉臥
後學襟坐滿月期
雲臺詠秋
陶翁穿耕南學開
古今羣儒盛弘臺
紅顔勤學務經國
銀髮樹下弄菊杯
暫茂草木綠易黃
毋憂與君無續來
掩卷焚香望黎山
三日寒雨登旅催
강 언덕 너머에는
강 언덕 너머에는
사람이 산다
마을을 떠나
강을 향하여 등을 돌린
삶의 비 내리는 부분에도
갑남을녀
후줄근한 성명의 사람들이 산다
강 언덕 너머에는
한 뼘의 마당 귀에 피어난
패랭이꽃의 꿈만하게
시간이 출렁이고
아내여
삶의 풍요는 어디 있는가
비비추새
몇 마디 언어는
하늘에서 풀풀풀 떨어져 내리다가
이윽고 비비추새가 되어
날아갔다
몇 마디 언어는
언덕에서 풀풀풀 굴러져 내리다가
이윽고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다
청동의 거울 속
시간의 가루를 뿌리는 비비추새
울음소리 속으로
많은 민들레꽃씨가 날고 있었다
김경숙 -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1979.8.11새벽2시
YH노투 한 여성노동자의 죽음을
숙아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황홀하다
배운 것 많고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은
모두 외면할 때
너는 용감하였다
아무도 눈 주지 않는
아스팔트 한쪽 귀퉁이에 피어나
뼈 없는 세대를 웃으며
홀로 무한한 자유를 호흡하는
숙은
생긴 모습 그대로
젊은 조국의 황홀한 象徵이다
새벽은 어디쯤 오고 있나
진달래꽃은 언제 피나
문을 미는 우리의 허기는
조용히 설레인다
낙동강을 흐르는 자유의 공기
무등산에 피는 정의의 풀꽃
그 모든 사물로도 다하지 못하는
생존을 위하여
팔월과 함께 떨어진 너의 주검앞에
생각있는 사람들은 목이 메인다
분노 하나만으로
응시하는 팔월의 하늘이다
숙아
너를 보내는 나의 시계는
새벽이다
그리움
내 오늘밤은
그대 집 옆 물소리로 흐르고
내 오늘밤은
그대 지붕 위 별빛으로 빛나고
내 오늘밤은
그대 처마 끝 풍경으로 울고
내 오늘밤은
그대 마음 한복판 향으로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