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원
경주 손씨(慶州 孫氏)는 신라 건국 초기인 서기 32년 유리왕 9년에 6촌 중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손씨로 사성(賜姓)받은 것이 시초이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5) 때 석종고사(石鍾古事)의 주인공인 국효 손순(孫順)을 중조로 하고 밀양(密陽), 평해(平海), 경주(慶州) 세파로 갈렸다. 손순(孫順)의 손자 손익원(孫翼洹)도 월성군에 봉군되어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는 세계가 실존하지 않고 고려말에 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본관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 사로, 사라로 하고, 수도를 금성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로 하였고,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고려 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고려 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고려 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고려 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조선 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조선 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