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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허씨(金海 許氏) 허씨는 가락국의 김수로 왕의 35세손이며,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로 한 성씨이다. 양천 허씨, 태인 허씨, 하양 허씨, 인천 이씨 등의 분가가 있다
김해 허씨(金海許氏)
시 조 휘(諱): 허 염(許 琰), 가락군(駕洛君) 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서 532년(신라 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어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
그 후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680년(문무왕 20)에는 김해(金海)로 개칭하여소경을 두었다. 고려 때에는 김해부(府), 995년(성종14)에는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1000년(목종3)에는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1270년(원종11)에는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의 일부가 되었다가 부민(府民)의 반란으로 1276년(충렬왕2)에 현(縣), 그후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었다.
1413년(조선태종13)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32)에 군(郡)이 되었고 1981년에 김해읍(金海邑)이 시(市)로 승격되었다.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始祖) 허염(許琰)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으로 전(傳)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의 세거지(世居地)인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駕洛君仁全派)·호은공기파(湖隱公麒派)·중승공린파(中承公麟派)·전직공인부파(典直公仁副派)·증성군구년파(甑城君龜年派)·판서공언룡파(判書公彦龍派)·상서공상파(尙書公相派) 등 크게 7파로 분파(分派)되었다.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지공거(知貢擧:시험관)를 지낸 유전(有全)이 충숙왕(忠肅王) 때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었으며 옹(邕)은 문과에 급제한 후 헌납(獻納)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강직(淸廉剛直)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백기(伯琦)와 목사(牧使)수겸(守謙)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위(蔿)는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日本統監府)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日本軍)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監獄)에서 옥사했다.그외 독립운동가인 겸(兼)·빈(斌)·병률(秉律)·형(炯) 등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허씨(許氏)
* 같은 형제 성씨
김해김씨(金海許氏), 양천허씨(陽川許氏), 태인허씨(泰仁許氏) , 김해허씨(金海許氏), 인천이씨(仁川李氏), 양산이씨(梁山李氏) ,하양허씨(河陽許氏) 입니다
허씨(許氏)의 창성(創姓) 유래에 관해서는 '許氏大同譜(丁巳譜)'의 '가락국기(駕洛國기)'편이 자세하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은 배를 타고 우리나라 김해(金海)에 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와 결혼해서 열 명의 아들을 낳아, 그중 둘째아들에게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였다.
그 연유는 왕비의 본성(本姓)이 허씨(許氏)라, 자기 성(姓)이 이어지기를 바란왕비의 간청 때문이었다.
그 뒤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0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양국(讓國)케 됨으로써, 가락국(駕洛國)은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갔다고 한다. 그때 옛 땅인 김해(金海)에 눌러 살게 된 후손은 김해허씨(金海許氏), 河州땅(河陽)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河陽許氏), 孔巖(陽川)에 터잡은 자손은 양천허씨(陽川許氏), 시산(詩山, 지금의 泰仁)에 이거한 후예는 태인허씨(泰仁許氏)로 각각 관향을 삼게 되었다.
또 허씨(許氏) 일파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라진다. 신라 때 허기(許奇)란 분이 사명(使命)을 받아 唐나라에 들어갔다가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있어, 현종(玄宗)을 호종한 공으로 당 황실의 성(姓)인 이씨를 사성(賜姓)받고 소성백(邵城伯)에 피봉되었다. 고려조에 와서 그의 후손 허겸(許謙)이 역시 소성백(邵城伯)으로 피봉된 연유로 소성이씨(邵城李氏)로 관적(貫籍), 시조가 되었다. 또한 양산이씨(梁山李氏)도인천이씨(仁川李氏)로부터 분관(分貫)된 것이다.
김해김씨(金海許氏), 양천허씨(陽川許氏), 태인허씨(泰仁許氏),하양허씨(河陽許氏),인천이씨(仁川李氏), 양산이씨(梁山李氏)는 이처럼한 형제이므로 성(姓)이 다른 종씨(宗氏)로 여겨 서로 결혼을 피한다.
해방 후에 가락(駕洛)종친회를 조직해 혈족의 유대를 다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허씨(許氏)는 같은 뿌리라는 인식 아래 '大同譜'를 간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허씨(許氏)를 한 편으로 묶어 씨족사(氏族史)의 개요를 기술하고, 씨족(氏族)의 연원과 본관지(本貫地) 연혁, 주요 세거지(世居地)와 변천, 등과인명(登科人名), 벌열(閥閱), 종문행례(宗門行禮) 등은 각 관향별로 나누어 소개한다.
<氏族史의 개요>
허씨(許氏)는 김해허(金海許)가 50%로 가장 많고, 양천허(陽川許)가 40%,하양허(河陽許), 태인허(泰仁許)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허문(許門)은 결코 많지 않은 인구지만 조선조의 정승 6명을 비롯, 고려와 조선 양조(兩朝)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해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 <陽川許>는 조선조에 정승 5명을 낳았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기도 했다. 양천허씨(陽川許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의 3파로 나뉘어지고, 각 분파(分派)가 다시몇개로 세분된다.
허난설헌(許蘭雪軒) · 허균(許筠) 남매는 조선조에 양천허씨(陽川許氏) 가문이 낳은 천재들이다. 아버지는 경상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주기파(主氣派)학자 허엽(許曄)이었다.장남 허성(許筬, 吏判), 차남 허봉(許篈, 府使)도 당대의 뛰어난 재사들로, 일가족이 모두 5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허균(許筠)은 1569년(선조2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10년) 50세 때 능지참형을 당하기까지 벼슬에서 여러 번 쫓겨나는 등 실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벼슬길에 있을 때도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으로 당시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미치광이 패륜아 부도덕자로 조소를 받았으나 오늘날엔 선구적 사상가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재승덕박(才勝德薄)의 성품 탓으로 드러난 많은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썩고 병들고 불평등한 계급사회에 과감히 도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해 서자의 등용을 제한하던 당시의 제도와 관습에 항거했고, 마침내는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은밀히 동지들을 규합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 끝내는 이 같은 기도가 발각돼 능지처참의 혹형으로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회개혁 사상을 담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홍길동(洪吉童)은 서민 대중의 우상으로 살아 숨어왔다. 그의 문재(文才)의 한 면을 보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은 또한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을 여러차례 왕래하며 천주교 서적을 처음 들여왔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허균(許筠)이라는 설도 있다. 27세로 요절한 허난설헌(許蘭雪軒)도 '규원(閨怨)' '추한(秋恨)' '유선사(遊仙詞)' 등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우리 여류 문학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조선시대의 뛰어난 여류시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성 특유의 감상과 애상적 시풍(詩風)으로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했고,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許筠)이 明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건네 주어 중국에서도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이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
양천허문(陽川許門)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당파싸움의 소용돌이에서 그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송시열의(宋時烈) 서인(西人)과 <예송(禮訟)> 시비를 벌였던 남인(南人)의 영수 허목(許穆) · 허적(許積)은 조선 당쟁사의 거두들이다. 12촌간이던 이들은 남인(南人)이 득세하면서 허적(許積)이 영의정에, 허목(許穆)이 우의정에 나란히 올랐으나, 송시열(宋時烈)의 처벌 문제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여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렸다.
특히 허목(許穆)은 학문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룬 당대의 대유학자로서 당시허문(許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學 · 文 · 書의 三古>라 불렸으며,특히 그의 전(篆)은 <동방제일>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오리(梧里)정승 이원익(李元翼)의 손주사위이자 선조 때의 문장가 · 풍류객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외손이기도 한 그는 대유학자였지만 벼슬길엔 나가지 않고 있다가 56세 때야 처음으로 참봉(參奉)에 천거됐다. 그러나 이 자리에도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다 63세 때 비로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됐고, 나이 80이 되던 1674년(숙종원녀) <2차예송(禮訟)> 때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을 누르고 집권하게 되면서 대사헌(大司憲) ·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들에 앞서 성종 · 연산군 때에 각각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 · 허침(許琛) 형제와, 허종(許琮)의 현손 허욱(許頊, 선조 때 좌의정), 허침(許琛)의 아들 허굉(許硡, 중종 때武判), 허반(許磐, 戊午士禍5賢의1人) 등도 모두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인물들이다.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은 일찍이 세조 때 이시애란(李施愛亂)과 장영기란(張永奇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승진된 뒤에는 북정도원사(北征都元師)로 변방의 여진족을 소탕했다. 문무(文武)에 모두 명성을 떨친 그는 우의정으로 있던 1479년(성종10년), 계비 尹씨(연산군의 생모)를 폐하는 조정회의에 가던 중 누님의충고에 따라 일부러 말에서 개울로 떨어져 훗날(甲子士禍 때)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허침(許琛)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 애썼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재능 많은 許씨 전통의 한 갈래는 남도(南道) 진도(珍島)의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3代畵脈>으로 피어났다.
소치 허유(小痴 許維) · 미산 허형(米山 許瀅) · 남농 허건(南農 許楗)으로 이어지는 3대의한국남화(韓國南畵)는 우리 예술사의 자랑스런 한 줄기이다. 일문의 의재(毅齋)허백련(許百鍊) 역시 이들에 못지 않은 한국남화의 거목으로 허문(許門)을 빛냈다. 조선조의 許씨 인물 가운데 또 하나 특기할 사람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낸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이다. 그는 선조의 어의(御醫)로 있으면서 의서(醫書)를 저술하라는 명을 받고 양예수(楊禮壽) · 정예남(鄭禮男) · 김응탁(金應鐸) 등과 집필에 착수했었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작업이 중단됐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모함을 받아 한때 유배까지 되었다. 허준(許浚)은 이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집필을 시작한지 15년만인 1610년 25권에 달하는 '東醫寶鑑'을 완성, 우리 의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
'東醫寶鑑'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韓 · 中 · 日에서 한의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며, 독일에서까지 번역본이 출간됐다.
<河陽許>는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허조(許稠)와 아들 허후(許詡, 좌찬성), 손자 허조(許慥)의 3대(代)가 모두 사육신(四六臣)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꼽힌다. 분파(分派)는 공간공파(恭簡公派), 정간공파(貞簡公派) 등 몇개 파로 나눈다. 허조(許稠)는 조선 초기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법전화하는 데도 노력을 쏟았다. 경사(經史)에도 밝아 후일 사육신(四六臣)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됐다.
허후(許詡)는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을 죽인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다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돼 끝내 교살당했다. 그의 아들 허조(許慥)는 사육신 이개(李塏)의 매부이자 김문기(金文起)의 사돈으로, 그의 집에서 이들과 함께 단종복위 모의를 하다 발각되자 자결했다. <金海許>는 고려조에 허홍재(許洪材, 平章事) · 허유전(許有全, 政丞) · 허옹(許邕, 典理判書) 허기(許麒, 五隱 중 1人)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나,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탓으로 조선조에선 크게 번영하지는 못했다.
허대현(許大賢)의 후손으로 된 상서공파(尙書公派), 허인전(許仁全)의 후손인 가락군파(駕洛君派) 등 9개파로 나누고 있다.
허유전(許有全)은 1321년(충숙왕8년) 81세의 노령으로 元에 귀양간 上王(충선왕)의 환국 운동을 위해 티벳까지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했다.최근 학계에서는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불은면(佛恩面)에 소재한 그의 묘역을 확인하여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묘제(墓制)연구에 큰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한말(韓末) 이 나라가 일인(日人)들의 손에 넘어가던 때 두 차례나 의병을 모아 일군(日軍)에 맞서 싸운 의병장이다. 그는 1897년(광무1년) 이은찬(李殷燦) · 조동호(趙東鎬)와함께 의병을 규합해 금산(金山) · 성주(星州) 등지에서 싸우다
고종의 종용에 따라 해산하고 귀향했다.
이듬해에 그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1905년 乙巳조약 반대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됐다.일본(日本)은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勅任官)2등에 임명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낙향하여 1907년 원주(原州)에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전국의병연합부대>를 조직하고,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 한국의 정식군대로서 발족했음을 선언했다. 곧 이 부대의 군사장(軍師長)이 된 그는 같은 해에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이른바 7조약이 체결되자 일본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해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군했으나, 후속 부대가 일본군에게 진로를 차단당하는 바람에 포위돼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밖에 許斌(陽川) · 許秉律(河陽) · 許炯(陽川) 등 숱한 독립운동가가 나와 허문(許門)을 구국의 집안으로 자리잡게 했다. 이들 중 허빈(許斌)은 1924년 용정(龍井)에서 동계(東季)중학교를 설립,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가르쳤다. 이듬해 일본군에 의해 학교가 해산되자 영안현성(寧安縣城)으로 가 신민부(新民府) 산하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설립했고,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체포돼 신의주(新義州)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태인허씨(泰仁許氏)의 분파(分派)는 지평공파(持平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직장공파(直長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의 5개파로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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