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sati, 念)의 의미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인 ‘정념(正念)’의 내용은 ‘사념처’이지만, 사념처가 ‘정념의 모든 내용인 것’은 아니다. 이를 구별하려면 ‘사념처’라는 용어를 잘 해석하여야 한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라는 말은 ‘사띠를 세워둘 네 곳, 사띠를 확립할 네 곳, 네 군데에 사띠를 확립함’ 등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사띠를 확립할 네 곳’이라는 번역이 합당하다.
‘사띠를 확립할 네 곳’에 <일차적으로는 ①사띠를 굳건히 세워두고, 나아가 이차적으로는 ②심(心)을 확립하는 것>이 ‘정념(正念)’이다. 그런데 ‘②심(心)을 확립하는 것’은 ‘부동심, 평정(우뻭카)’ 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라한의 단계’이므로 ‘다쌍가의 정념’을 말하는 것으로써 본다면 ‘반야를 갖춘 심(心)을 세워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①사띠를 굳건히 세워두고’는 ‘의(意)의 의지처인 사띠’를 되찾아 ‘사띠를 확립할 네 곳’에 세워두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의(意)차원의 사띠와 심(心)차원의 반야를> 상호 연관 지워서 볼 근거는 충분하다.
말하자면 팔정도의 정념은 정온(定蘊)에 속하는 것이지만, 사띠 자체는 혜온(慧蘊)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띠와 반야’는 공통점이 있고 관련이 있으며 당연히 차이점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사띠(sati, 念)의 의미’를 조명해 들어가면 ‘총명함, 머리 좋음, 영악한, 눈치 빠른’ 등의 의미를 만날 수 있다.
37조도품에서는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에서 사띠를 접할 수 있고, 특히 칠각지에서 가장 자세한 설명을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경문은 ‘오근(五根)’의 경문이다.
Katamañ ca bhikkhave sat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ṃ 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SN. vol.5. p.197]
비구들이여, 어떠한 것이 念根인가? 비구들이여, 聖弟子가 ‘최상의 분별 있는 사려를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念을 지닌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念根이라 한다.
칠각지의 해당 경문은 아래와 같다. 아래의 경문에서 ‘택법각지’의 내용이 반야이다.
비구들이여, 念覺支의 목적이 되는 법들(dhammā)에 대하여 올바른 작의를 많이 하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念覺支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念覺支를 닦아 완성시키기 위한 食(āhāra, 자양분)이 된다.
비구들이여, ‘善하거나 不善한 法들(dhammā) · 비난받거나 비난받지 않는 法들(dhammā) · 열등하거나 수승한 法들(dhammā) · 어둡거나 밝은 法들(dhammā)’에 대하여 올바른 작의를 많이 하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擇法覺支를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擇法覺支를 닦아 완성시키기 위한 食(āhāra, 자양분)이 된다.[SN. vol.5. p.103]
‘염각지(念覺支)’라는 용어는 ‘사띠라는 깨달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이 ‘올바른 작의(作意)’를 많이 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하고, 반야의 경우에는 ‘불선법들과 선법들을 비교하는 그러한 올바른 작의(作意)’를 많이 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해진다.
결국 사띠는 ‘현명함, 똑똑함’ 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팔정도의 정념을 언급하는 경문에 “있는 그대로 사띠하면 그것이 정념(正念)이다.”이라는 표현이 있다. 얼핏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는 그대로(yathābhūta)’라는 말의 의미가 ‘사띠’에 가장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있는 그대로(yathābhūta)’는 ‘색안경[=탐진치] 끼지 않고, 편견 없이, 선입감 없이, 조작함이 없이, 사실 그대로’의 뜻이고, 오개(五蓋, 오장)에 덮이어 있으면 일차적인 ‘있는 그대로(yathābhūta)’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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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하다보면 곧잘 감정적인 싸움으로도 번지는데,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면이 많은 공부가 된다. 분한 마음에서 더 열심히 관련경문을 찾아 반박하고자 하기 때문에 ‘질 높은 토론 분위기’가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슈를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도 있어서 권장할만한 일이다. 친구가 일요일에 찾아와 사띠에 대하여 물었는데, “게시판에다 답 할께”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본 카페의 글을 읽지 않는다. “한자가 많고, 머리 아프고, 뭔 소린지 모르겠고” 해서 읽지 않는단다. 그런데도 사띠는 궁금하단다.
학자들끼리 싸움이 붙으면 ‘무조건 좋은 일’이다. 포교에 그것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드물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첫댓글 궁금증만 더하는 설명이기는 하나, 사띠를 '마음새김'으로는 절대로 해석하면 안됨. '작의(作意)'가 '마음새김'임.
또한 '알아차림'으로 해석하면, 사띠가 지니고 있는 '흐리멍덩하지 않고 깨어 있음'의 의미와 상통하기는 하나 아무래도 <사띠가 이미 있어야 알아차리는 것임>을 고려할 때, 선후가 뒤바뀐 번역어 같음.
사띠를 잘 표현하는 우리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주시,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이 사용되는데요.
김재영박사님은 '집중하고 지켜보기'라고 하시던데요...^^
저 개인적으로 '깨어있음'이라는 번역어가 마음에 들긴 합니다만, '총명함'이라는 의미가 약간이라도 들어가야만 '사띠에서 반야로 이어지는 맥락'이 표현된다고 봅니다. 반야가 '무분별지'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참고할만 하다고 봅니다. 사띠는 '식의 분별지'를 막는 역할도 하거든요. 하여간 '눈치가 엄청 빠른 것'이 사띠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띠가 있으면 '불선법들'이 침범하지 못하거든요. 워낙 총명해서 금방 알아보고서는 '차단'시킨다고 설해집니다. 보통 수문장이 아닙니다. 육근수호의 수문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띠가 많이 궁금하시면 '칠각지'에 대한 교설을 찾아 보시면 됩니다. 칠각지의 첫 번째 각지가 '사띠각지'이거든요. 그 '사띠각지'는 나머지 '여섯가지'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설해지므로 <거기에서 '왜?'라는 질문>을 지니고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또한 오근과 오력에서 언급되므로, 왜 사띠가 '인드리아'인지를 생각해 보시고, 왜 사띠가 '파워'인지를 생각해 보시구요. 또한 일체법과 관련된 경문에서도 '사띠의 위력'이 언급됨을 참고하시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그러한 사띠가 '니미따와 그 니미따를 올바르지 않게 작의하는 경우에 사라짐'을 설하는 경문을 잘 보시고요. 선정[삼매가 아니고 '선정'을 말함]이 반듯이 '사념처에 사띠가 확립된 상황'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제 경우는 사띠보다 '반야'에 더 관심이 많은데, 다른 분들은 사띠가 엄청 궁금하신 것 같네요. 그래서 저는 '사띠와 반야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었는데요. 하여간 제가 알기로는 '사띠가 없으면 반야는 어림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띠의 목적은 반야(=무분별지)에 있습니다. 분별지가 '식'이라는 것입니다.
고짜라에서 '반야(=무분별지)'는 '법에 대한 반야(=택법각지)'입니다. 그런데 고짜라에서 '사띠'는 '선법과 불선법을 분간하는 능력' 즉, 자신에게 손해가 가는 것과 이익이 있는 것을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이 있어야만 '사띠가 반야'로 이어집니다. 명색을 '법'이라고 하는 경계로 바꾸어 보아야만[=명색을 고짜라로 끌고 들어와야만] 그 둘은 기능을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을 자세히 소개해 주시면 저도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