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얀시(Philip Yancey)란 빼어난 글쟁이가 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란 책을 읽다보면, 어찌 이리 예수를 새롭게 그려내는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널리스트답게 그의 상상력은 오늘날 세상의 이 구석, 저 생각을 훑어 내려가며 이천년 전의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조명을 해낸다.
기독교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바탕한 신앙이다. 진정한 기독교를 말하고자 한다면, 결국 진정한 예수가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탐구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질문은 그것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였을까? 교회는 예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거꾸로 교회의 관심을 예수에다 투사한 것은 아닐까? 최근 한국에서 김용옥의 발언으로 촉발된 역사적 예수 논쟁은 비록 지엽적 사안에 대한 과도한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는 감이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란 존재의 역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성경적 예수를 믿는 복음주의자들도 이 질문에서 예외가 아니며, 이 논의의 바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다루는 것이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해줄 것이란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다. 그리고, 소위 '제3차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third quest for historical Jesus)'로 불리는 신학자들의 노력과 그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이 주목할 만한 학자인 톰 라이트(N. T. Wright)를 소개하려한다.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1985년에 일단의 북미 신학자들은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란 이름의 연구모임을 시작한다. 이들은 예수의 말씀이 실린 서기 300년 이전의 모든 문서를 대상으로 이것이 실제 예수가 한 말인지, 아니면 후대에 삽입된 것인지를 학자들의 투표로 결정했다. 이것을 빨강, 분홍, 회색, 검정의 네가지 색으로 나누어서 '확실하다'에서 '확실히 아니다'까지를 표시한 <다섯 개의 복음서>란 책을 93년에 내었는데, 결과적으로 여기서는 외경인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와 가상의 전승인 Q 문서가 가장 신뢰할만한 예수의 어록을 담고있다고 제시하였다.
그 모임은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예수는 유대지방을 돌아다니며 금언(aphorism)과 비유(parable)를 주로 쓰면서 사람들에게 낡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설파한 현자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있었으나, 스스로가 해답을 가졌다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해답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았던 인물이며, 비종교적인 독특한 발상을 과장법과 패러독스를 통해 전달했고, 예루살렘에 축제 기간 중 올라갔다가 성전에서의 분명치 않은 사건을 통해 재판 없이 처형된 인물로 그려졌다.
이들의 연구결과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우선 세미나 구성원이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대표할 수 없는 편협한 인선이란 비판이 가해졌다. 유럽 쪽의 학자들은 거의 참여를 하지 않고 있다거나, 주도적인 몇 학자들이 연구의 방향을 거의 독점적으로 이끈다는 비판도 나왔다. 투표로 예수 어록의 진정성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발상이란 문화적 비평도 있었다. 어쨌든 예수 세미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탐구'의 한 극단적 결론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톰 라이트(N. T. Wright)
톰 라이트는 예수 세미나의 정 반대편에 선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주의자 일색인 역사적 예수 연구의 지형도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비판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로 이 분야의 일급학자로 자리매김되어 있지만, 그가 내놓은 결론들은 오히려 신앙의 그리스도를 닮아있다. 그의 학문적 경력은 화려하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전과 신학 두 영역에서 우등(first class)으로 졸업했고, 캐나다의 맥길(McGill)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에서 가르쳤다. 캐나다 뱅쿠버에 있는, 복음주의권의 대표적 대학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서도 자주 강의했다. 그는 지금 성공회 목사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주임 신학자(Cannon theologian)로 있다.
그는 99년 2월호 미국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에 케빈 반후저(Kevin Vanhoozer),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등과 더불어 주목할만한 차세대 복음주의 신학자로 꼽힌 적이 있는데, 거기에 그의 흥미로운 이력이 좀 소개되어 있다. 그는 학생시절 성서유니온 (Scripture Union) 캠프에 리더 역할을 했었고, 옥스퍼드 IVF 모임의 학생대표를 지냈다. 그는 성경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졌는데, 신학공부를 하던 이년간 매년 구약성경은 영어로 두번, 신약은 헬라어로 네번을 보았다고 한다.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와 히브리서는 헬라어로 녹음해서 언제나 들었고, 갈라디아서는 헬라어로 거의 암송할 정도라고 한다. 그는 학생 시절, 당시 복음주의 성경학자로 유명했던 존 웬함(John Wenham)의 초청 강의를 들으면서 성경학자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가 쓴 <신약과 하나님의 백성(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1992)>과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Jesus and the Victory of God, 1996)>은 각각 500페이지, 7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인데, 애초 5부작으로 기획된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시리즈의 서두에 해당한다. 그의 저작은 신약학이나, 일세기 유대주의, 심지어는 교회의 선교를 논할 때에도 꼭 찾아보게 되는 중요한 저술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그는 첫 번째 책을 브라이언 왈쉬와 리차드 미들턴이 제시한 세계관 논의에서 시작한다. 그의 첫 책은 왈쉬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학적 저술 외에도 대중적인 책들을 많이 쓰고 있다. 가장 최근에 낸 <예수의 도전(The Challenge of Jesus, 2000)>은 자신의 주요 저작에 담긴 문제의식을 쉽게 풀어쓴 150여 페이지 남짓한 책자이고, <예수의 의미: 두 비전(The Meaning of Jesus: Two Visions, 1999)>에서는 주요한 쟁점(부활의 역사성, 예수가 십자가 처형된 이유 등)에 대해 자유주의 학자 마르쿠스 보그(Marcus Borg)와 대화하듯 각자의 견해를 실어놓아 어디서 동의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예수 관련된 프로그램을 방영할때면, 어렵지 않게 그의 얼굴이 BBC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독특하게도 일급 신학자이면서도 대학강단이 아닌 교회의 목회자로 지내고 있는데, 죽기 전까지 현재 계획한 저술 완성하기에도 벅차다며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고 있다한다.
NT Wright의 저서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역사와 지형도
위의 인물들만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예수 연구가 최근에 시작된 것도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톰 라이트가 간단히 요약한 것을 따라 정리해보면,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성경의 기록을 교회의 신앙적 관심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전제하였기에 기적이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했고, 이런 미신적 요소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재구성에 치중하였다. 그 결과로 여러 종류의 예수전(傳)이 등장했고(에른스트 르낭의 전기가 특히 유명하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시각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작업들을 활발히 해왔다. 이 첫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for historical Jesus)'는 20세기초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이들의 작업이 예수 당시 유대의 사회-종교적 정황, 특히 종말론적 차원(Eschatological dimension)을 고려하지 않은 저자들의 시대적 관심(계몽주의, 낭만주의?)에 입각한 재구성에 불과하다는 치명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침몰하고 만다.
슈바이처의 비판이후 한동안 역사적 예수 탐구는 불가능한 작업으로 인식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예수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성경자체의 신빙성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학자들을 지배하고 있었고(이 시기의 대표적인 성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성경에서 역사성을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은 예수란 존재가 있었다는 정도에 불과하단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 외에는 달리 연구할 자료가 없었기에 이 시기에 성경학자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설화나 신화를 도입해서 이런 저런 이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 역사적 예수 탐구(흔히 'New Quest'라고 불렸다)는 신약의 신빙성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는데, 불트만의 수제자였던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semann)은 1950년대에 자신의 스승의 견해에 반해서 성경 기록이 역사적 연구를 수행할만한 내용을 담고있다는 주장으로 다시한번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이 흐름은 그다지 많이 확산되지는 못하고, 신약의 한 배경사 연구 차원으로 물러앉는 듯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세 번째 탐구는(이 명칭은 톰 라이트가 제안했고, 상당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8-90년대에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와 달리 신학 외에도 고고학, 역사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관여하고 있고, 지역적으로도 북미와 유럽권 학자들이 고루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쿰란(Qumran)에서 발굴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나, 일세기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여러 고고학 발굴 성과, 인류학과 사회학적 연구 등이 보태지면서 연구의 지평을 풍성히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가 파격적인 연구결과들을 내어놓으면서, 일반 언론의 주목을 한껏 받은 것도 이런 흐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데 한 몫을 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도 자료의 문제가 핵심적인 사안이다. 특히 성경의 역사성, 혹은 어떻게 성경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추론해 낼 것인가가 숨은 쟁점인데, 예수 세미나는 정경을 희생하고, 외경을 주된 자료로 삼은 셈이다. 아니면, 전적으로 인류학이나 사회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하고, 최소한의 성경 근거만으로 작업을 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이런 경우 예수는 인접 문화권의 사례연구에 종속되는 경향이 보인다. 가장 비중 있는 접근은 일세기 유대교의 배경아래서 예수를 조명하는 경향인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는 지점과 헤어지는 지점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성경의 증거를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기에 많은 성경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이 작업에 관여하고 있다.
역사의 예수를 연구하는 이유
예수에 대한 질문은 아마도 예수 당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그가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이란 출신 배경을 들어 그의 가르침을 폄하하는 일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를 뛰어난 랍비로 받아들이면서도, 왜 그가 유대교와 혹은 로마권력과 물러설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을 벌였는지 궁금해했다. 그 시대의 사람들도 '이 예수가 누구인가(Who is this Jesus?)'란 질문과 씨름해야 했다. 예수를 탐구하고자하는 노력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그 탐구의 결과는 매우 긴박한 현실적 함축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세가지 교회사적 사례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함축을 읽어낸다.
첫째, 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historical)'이고 '종말론적(eschatological)'인 읽기를 시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개혁가들은 중세교회가 정교하게 체계화시킨 도그마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예수, 혹은 바울이 '정말' 말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것은 당대의 교회가 스스로 인정하는 기원을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과연 '그런 기원'에서 '이런 이해'가 도출되는 것이 옳은가를 반문하게 만들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이 단한번으로 완성하신 사역임을 천명함으로써 예수 사건의 종말론적 본질을 재천명하고, 중세교회의 체제가 현상유지에 봉사하는 영구불멸한 순환 시스템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었다.
둘째, 한 세기 후 이번에는 종교개혁가들 자신이 이런 비역사화의 굴레에 들어가게 된다. 여전히 교리(dogma)가 성경을 지배하는 경향 속에서 예수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추고, 영원한 진리의 수호자로 자신을 인식한 교회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 이성의 이름으로 도전을 받았다. 헤르만 라이마루스(Hermann S. Reimarus, 1694-1768)는 '역사'의 이름으로 당대의 지배적 사회-사상 체계였던 기독교를 공격했는데, 그는 예수는 결국 실패한 유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고, 기독교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톰 라이트는 이런 시도들을 두고, 올바른 질문을 잘못된 방식으로 제기하였다고 요약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배적 사상에 대한 체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제기된 만큼, 공격의 예각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이마루스의 논증이 안고 있는 여러 결함들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하겠으나, 당시 기독교가 일세기 유대-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가 서있던 역사적 좌표를 상실하고, 탈역사화한 그리스도로만 바라보고 있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셋째, 소위 '새로운 탐구'를 촉발시킨 에른스트 케제만은 1953년 강의를 통해, 20세기 초반,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신학자들의 관심권에서 밀려난 시기에 비역사적 예수, 혹은 탈역사화된 기독교가 나찌 이데올로기를 신학화 혹은 정당화하는데 철저히 이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더욱 집요하게 해나가는 것을 잊어버릴 때마다, 우상숭배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당할 가능성이 항상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새롭게 화장한 예수의 얼굴을 찾아보려는 유별난 관심이 아니라, 인간들의 어떤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화장으로도 덧칠 할 수 없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공간 속에 독특하게 나타났던 한 존재를 발견하자는 관심이다. 물론 이런 탐구의 결과가 당혹스런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역사적 예수 탐구가 정당한 것은 아닐것이며, 학자적 상상력이 도를 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할 수 있다. 이천년의 시공간을 넘어선 오늘날의 연구는 여전히 가설 혹은 가장 근접한 추론으로 자리매김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톰 라이트는 초월적 층위를 배제하고, 역사적 자료들만을 가지고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을 세워보고, 그것이 여타 역사적, 신학적 검증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이 우리가 견지할 수 있는 가장 근사치의 '역사적 예수'를 보여줄 것이란 입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이 이런 전제를 갖고 작업한 결과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명확히 조명해준다는 것이다. 연역적 신앙이 아니라, 귀납적 신앙인 셈이다.
맺는 말
톰 라이트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는 지면상의 제약도 있고, 필자의 역량 때문에라도 벅찬 감이 있다. 아직 국내에는 톰 라이트의 책들이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곧 소개가 이루어지면 독자들이 눈여겨보도록 권고하는 것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그의 주된 관심영역이 '역사적 예수'에 있긴 하지만, 그가 관련하는 영역은 사실상 성경신학 전반에 걸쳐있다. 해석학(hermeneutics)과 일세기 유대주의(First Century Judaism), 유대 묵시사상(Jewish apocalyptic) 등의 최근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그의 저작은 아마 신학적 사전지식 없이 바로 소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쓴 대중적 저술들은 신학적 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상당한 자극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약간 맛보기를 한다면, 그가 <예수의 도전>에서 다루고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예수는 일세기 유대의 배경 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나? 부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 모든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의 과제와 비전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일관성 있고, 포괄적인 답을 구하는 작업이 마른 가슴에 냉수처럼 와 닿는 사람들이 있다면, 번역본을 기다릴게 아니라 톰 라이트 읽기 모임을 하나 꾸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