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memorial - 유재원을 기억한다[추모사] 피켈에 새긴 그 이름 아직도 선연한데 글 손경석 한국산악회 원로회원
◇ 1974년 유재원(오른쪽)과 몽블랑을 등반 중인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 손경석
'샤모니의 수많은 침봉(針峰)을 뒤로하고 히말라야로 갈 순 없습니다. 어느 해엔 가게 되겠지만 알프스에서의 숙제가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유재원이 나에게 준 마지막 편지가 되었고 그렇게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재원이가 간 지 벌써 30년이라니. 평소 그렇게 즐겨 부르던 로제 듀프라의 산시(山詩)에 맞춘 기타 가락이 아직도 역력하거니와 싱긋 웃으며 "클라이머들은 개미 쳇바퀴 돌듯 인수봉, 선인봉 암벽에만 매달리고 넓은 뜻의 산은 모르는 것 같아요. 이번 산 스케치를 위해 설악산 외에 덕유산, 변산반도, 속리산에 올라가 보니 나의 클라이밍이란 하나의 좁은 틀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아요. 이제 등산이 무엇인지 알만 해요"라던 재원이의 이 말은 지금도 내 귀에 남아 있다. 필자가 <전국 하이킹시리즈 10명산>을 출판할 때 경희대 미술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산 스케치를 하러 근교 암벽을 잠시 떠나서 여러 산을 올라갔었다. 그때 말한 구절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전통이 뚜렷했던 경동고등학교 산악부에서 경희대에 입학하면서 재원이는 암벽타기에 누구보다 열중했었다. 그는 예비역 장성의 외아들로서 누가 말려도 주말엔 근교 암벽에 매달렸다. 1960년대 중반에 조직된 KCC(한국클라이머스클럽)의 중견 간사로서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기타와 더불어 암벽 아래 캠프 속에 있었다.
유재원이 한국산악회에 입회할 때는 고교산악부장 경력으로 경희대생이면서도 회원자격을 얻게 되었다. 당시 한산 입회는 엄격한 자격과 규정이 있어서 회원자격을 얻고 에델바이스 마크의 회원증을 받게 되는 것이 큰 영광이었던, 명예롭고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 재원이는 한산 회원이 되자 산악구조대로 활약하면서 회보 편집위원이 된다. 당시 수없이 방한해 오는 일본의 대학산악인들과도 교류하면서 때로는 설악산 암벽이나 근교 암벽에서 합동등반을 하는 등 헌신적 산악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필자의 출판사에 근무도 하고 그 당시 등산안내책자가 전무한 상태라 명산 시리즈의 편집과 산 스케치, 코스 답사에 종사하다가 알프스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한국산악회의 꿈을 실현코자 했던 해외원정훈련등산대가 설악산에서 10동지를 눈사태로 잃자 해외기술을 연수받기위해 1971년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국립스키등산학교(ENSA)에 1차 훈련대를 보냈다. 그들이 돌아와 프랑스 빙설기술인 피올레(피켈) 조작법을 보급하자 많은 산악인들은 거기에 매료되었다. 김인섭, 김항원, 차양재와 유재원은 2차 알프스 훈련대를 조직해서 샤모니로 떠났다. 1972년이었다. 이 무렵은 월남전과 더불어 냉전의 극한시대였다. 북한이 유네스코에 가입하면서 남북관계도 외국에서는 극도로 냉각되고 있었다. 그 당시엔 여권을 받으려면 한국산악회의 사업일지라도 대한산악연맹의 추천을 받아야 문교부 허가로 발급되는 옹색한 시대였다. 2차 훈련대의 여권은 6개월 유효기간의 단수여권이었다.
유재원과 차양재는 샤모니에서 30여일의 연수훈련과 교육을 받고난 후에 알프스에 매료되어 귀국일이 넘어도, 현지에 여권기한과 비자기한을 넘기면서까지 체재하며 등반에 열중했다. 그들의 귀국보고가 없자 당국에서는 기한을 넘겼다고 빨리 귀국시키라고 성화였다. 만일에 적성국(敵性國)인들과 연관을 갖게 되면 안 된다고 위협적인 경고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강제로 여권무효의 불법체류자가 되었지만 샤모니의 매혹적인 빙·암벽에서 떠나지 못하고, 샤를레 모제 등산장비공장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주말이나 휴가 때는 빠짐없이 샤모니 산군의 암벽에 매달렸다. 그곳의 명사인 샤모니아드 볼랑 산장 사장은 평소 유재원의 성실함에 호의를 갖아 그의 보호 아래 산장 일도 돌봐주었다. 때로 프랑스 당국의 단속 때는 마을사람들이 미리 알려주어서 숨게 되어 곤경을 면하면서. 이 무렵 필자는 유고 델니체에서 열리는 UIAA(국제산악연맹) 총회 참석으로 모스크바와 제네바를 경유하게 되어 총회 후 샤모니 정류장에서 그와 만나게 됐다. 당시 유럽출장 중이던 조선일보 기자이자 산악인 백기범씨도 합류했다. 7일간 그와의 만남은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되었다.
◇ 샤모니의 산악인 묘지에 잠든 유재원의 묘. 당시 ENSA 교수로 유재원에게 등산기술을 전수했던 조르쥬 파이요씨가 올해 7월 자비로 묘지 사용 기한을 연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