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ㅡ《그날이 오면》(1949)
이 시는 심훈의 비밀 노트에 수록되어 일제 치하에서 세상에 발표된 적은 없다. 해방 후 1949년 그의 유고 시집인 《그날이 오면》을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바우러C. M. Bowra는 그의 저서 《시와 정치 Poetry and Politics》에서 “일본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했으나,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1930년 3월 1일에 쓴 이 작품은 심훈이 3·1 운동의 의미를 역사에 투사하기 위한 의도로 이 작품을 창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 운동에 참가하여 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중퇴당한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민족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고 기만적인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반일적인 학생 운동이 일어나고, 이와 같은 사건이 심훈에게 이 시를 쓰게 한 동기를 제공한 것 같다.
이 시는 조국의 해방을 예측한 시가 아니라, 염원하고 있는 시이다. 비장미와 살신성인의 자세가 두드러진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격정적 어조를 그대로 토해 내고 있다.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표현과 내용이 격렬하고 거칠지만 당시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저항 의지를 생생히 발견할 수 있다.
「다시 읽는 한국의 명시」 김원호 지음
맹태영 옮겨 적다